전체 글 (21) 썸네일형 리스트형 [슈준] Blooming day 흉부외과는 외과의 특성 상 하루하루가 미친 듯이 바쁜 과는 아니었다. 대부분은 검사와 입원, 약물 주입을 통한 치료가 많았고 하루에 두어번 정도 이루어지는 수술이 주를 이뤘다. 갑작스레 일어난 사고로 인해 정신이 없어지는 경우엔 지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그런 경우는 일주일에 두어번, 많아야 다섯번을 넘지 않았으므로 흉부외과는 다른 과에 비해 퍽 여유로운 과였다. 그러나 한번 응급 콜이 울리기 시작하면 인턴, 레지, 교수 할 것 없이 모조리 내려와 환자에게 매달렸고 과 전체가 비상이 되서 24시 대기조가 되었다. 어제도 ICU(중환자실)에 있던 환자가 갑자기 심정지가 오는 바람에 새벽을 꼬박 지새워야 했던 터라 여직 눈이 뻐근했다. 핏발 선 눈을 꾹꾹 눌러가며 앓는 소리를 낸 준면이 의자에 몸을 .. [백도] PeT 반인반수(半人半獸). 지금은 수인이라 불리는 이것은 본디 짐승의 몸으로 태어나 대략 6~7살 정도가 되면 인간의 형태로 변할 수 있는데 성인이 되기 전까진 꼬리나 귀 등을 잘 숨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사람과 흡사한 그들의 생김새 덕에 꺼려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수인 입양 전문 회사인 PeT(personal taste)의 설립 후 입양이 본격화되면서 이제는 그 어떤 애완동물보다도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과 비슷한 생김새를 가졌다는 것을 악용해 그들을 학대하고 성적 노리개로 일삼는 등 부정적인 면 또한 크게 증가했다. 결국 정부에서는 수인 보호법을 만들어 의무적으로 애완 수인을 등록하고 1년에 2번 의무적인 건강검진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고의로 수인 등록을 하지 않고 유기된 수인들.. [백도] 메스 mess - 경수가 L병원을 자신의 병원으로 선택한 것은 물론 제 출신 대학의 병원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이 병원에 있는 한 의사가 더 큰 이유가 됐다. 본과생 시절, 우연히 보게 된 수술 영상에서 마치 연주를 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그림과 같은 손길에 넋을 놓은 경수는 그 날부터 그 영상 속 집도의를 동경하게 됐다. 그는 겨우 레지 3년 차에 그렇게 깔끔한 손길을 보이는 그가 경이로웠고 부러웠다. 그처럼 되고 싶었다. 경수는 반드시 그와 같은 병원에서 일할 것이라 다짐하며 노력했다. 5년 내내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은 것은 온전히 그 남자 덕분이었다. 변, 백현. 경수는 자신이 꿈꿔오던 것이 조금씩 실현되어 가는 기분에 설레는 마음으로 그와 만날 날을 기다렸다. 그와 만나면 할 말도 준비했다... [백도] 백일의 도화 도화 ¹徒花; 헛되이 피는 꽃. ²徒花; 재앙이나 화를 일으킴. ³刀火; 칼과 불. 몸과 마음에 고통을 주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⁴ 導火;폭약을 터지게 하는 불. 사건의 원인이나 동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일이 벌어졌다고 믿기에는 너무 해가 밝은 날이었다. 경수는 내리쬐는 햇빛이 따가운 줄도 모르고 제 앞에 선 공 내관을 쏘아봤다. 평소라면 강렬한 햇볕에 눈이라도 찌푸릴까 호들갑을 떨며 차양을 대령하던 공 내관이 요지부동 움직일 줄을 몰랐다. 어쩔 수 없이 먼저 입을 뗀 경수는 제가 들었던 말을 재차 확인하고자 공 내관의 어깨를 쥐었다. "다시 말해보거라." "저하…." "다시. 말하라고." "홍문관 교리 변백현이 극極 양인으로 밝혀져 그를 중심으로 신 왕조를 세워야 한다는 무리가 나타났습니.. [백도] ANTINOMY "생각보다 잘 생겼네." 송곳처럼 뾰족하게 날이 선 공기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를 낸 남자에게 향했지만 정작 그 목소리가 향했던 이는 시선 한번 돌리지 않은 채 묵묵히 자리에 서있었다. "너 지금 수작거냐?" 되려 그 목소리에 반응한 사람은 남자가 기대했던 이와는 달랐다. 남자는 미소 띈 얼굴을 지우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제게 말을 건 이를 바라봤다. 당장 욕지기라도 쏟아낼 듯 이를 드러낸다. 이렇게 감정을 감추지 못해 큰 일은 어떻게 하시려고 이럴까. 작게 혀를 찬 남자가 상체를 뒤로 젖혀 소파에 등을 기댔다. "수작이면, 넘어오려나?" 여전히 남자의 말은 닿지 않았다. 제게 향한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그는 소문과 꼭 같아서 남자는 그가 재밌기도.. [백도] play, boy play, boy - 격동의 시대였다. 곳곳에서 신분증을 검사하고 소지품을 확인하는 행동에 그 아무도 불평을 토로하지 않았다. 경수는 저 멀리서 신분증을 검사하는 이들을 흘깃보고는 모자를 더 깊숙히 눌러썼다. 때마침 지나가는 한무리의 사람들 뒤로 몸을 숨긴 채 인적드문 골목길로 빠지자 다행히 아무도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어디야? "가고 있어." 저 멀리서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간간히 최루탄 연기나 화약 냄새도 났다. 경수는 잠시 최루탄 연기가 치솟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메가 인권 운동. 약 20여년 전 시작된 이 운동은 오메가로 판별되기 무섭게 가축처럼 등급이 낙인찍히고 출산 기계 취급을 받던 오메가들이 일으킨 혁명이었다. 모든 국민들은 만으로 9살이 되면 국가에서 .. [백도] 특별한 연애 번외(+tmi) 경수는 요즘 골치가 아팠다. "이사님." "으응." "저 좀 놔주시면 안 될까요." 아침잠이 별로 없어 알람 없이도 벌떡벌떡 잘 일어나는 경수와 달리, 백현은 아침잠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아침이 되면 저를 품 안 가득 끌어안은 채 단잠을 자는 백현의 팔에서 벗어나는 게 일이 되었다. 이렇게 벗어나려고만 하면, "더 자." 잠기운이 가시지 않아 반쯤 쉰 목소리로 웅얼거린 백현이 힘주어 경수를 당겼다. 폭신한 이불 속에 파묻혀 뜨끈해진 체온으로 귓바퀴에 쪽쪽 입술 도장을 찍고 어쩔 때는 뺨을 깨물기도 하니 혹시 잠을 핑계로 수작을 벌이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국이라도 남을까, 이에 부딪혀 아프기라도 할까. 입술로만 광대를 우물우물 깨무는 것에 질색을 하여 고개를 저으면 히히, 장난스런 웃음을 .. [백도] 특별한 연애 下 직접 마주하는 날을 상상한 적이 있었다. 그가 불러서, 혹은 우연히. 단 둘의 만남일 때도 있었고 백현이 함께한 자리일 때도 있었다. 마주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떤 목소리로 어떤 말을 할지 수십 번 수백 번을 상상하며 고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오늘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모든 것이 밝혀진 뒤 그와 만난다는 것은 경수의 상상 속에서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 일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찻잔을 그의 앞에 내려놓은 경수는 버릇처럼 테이블 밑으로 제 손을 숨겼다. 초조함이 드러나는 손끝을 겨우 맞잡자 땀이 배인 손바닥이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하려고 온 거지. 바싹 목이 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물 한 잔을 가져올 걸. 마른 목이 비명이라도 지를 듯 아팠다. 찻잔을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을 읽..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