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인반수(半人半獸).
지금은 수인이라 불리는 이것은 본디 짐승의 몸으로 태어나 대략 6~7살 정도가 되면 인간의 형태로 변할 수 있는데 성인이 되기 전까진 꼬리나 귀 등을 잘 숨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사람과 흡사한 그들의 생김새 덕에 꺼려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수인 입양 전문 회사인 PeT(personal taste)의 설립 후 입양이 본격화되면서 이제는 그 어떤 애완동물보다도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과 비슷한 생김새를 가졌다는 것을 악용해 그들을 학대하고 성적 노리개로 일삼는 등 부정적인 면 또한 크게 증가했다. 결국 정부에서는 수인 보호법을 만들어 의무적으로 애완 수인을 등록하고 1년에 2번 의무적인 건강검진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고의로 수인 등록을 하지 않고 유기된 수인들의 수가 매년 5만마리를 훌쩍 넘기는데다 그 수가 점점 늘어가는 추세를 견디다 못한 정부는 결국 유기 수인 보호소에서 일정 기간 이상 잔류된 수인의 안락사를 허용한다.
w.빛다
-
"언제까지라고?"
"한달이면 됩니다."
망할. 진짜 귀찮게도 하네.
백현은 짜증스레 머리를 헝크러트리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유기 수인 보호소]
애완동물은 꽤 좋아하는 편이지만 사람과 꼭 같은 모습을 한 수인은 그닥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주인님 거리며 따라다니는 모습에 괜히 기분이 이상하기도 했고 동물보단 사람에 더 가까워보이는 이들을 애완동물 취급한다는 것이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덕분에 내로라 하는 B그룹의 막내 도련님으로 자라면서도 수인만큼은 절대 키우지 않았던 백현이었는데. 백현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잠재우려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 미친 새끼.
백현과는 무려 20살 차이가 나는 B그룹의 장남, 백현과 더불어 B그룹의 후계자로 거론되는 변정현이 수인을 죽였다. 뭐, 아직 죽진 않았으니 '미수' 라고 할테지만 전해들은 말로는 이번주를 넘기기 힘들 것 같다고 했으니 죽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백현은 사진으로 봤던 수인의 처참한 몰골을 떠올리며 인상을 구겼다. 수인이 연예인이 되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사람과 수인이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기까지 하는 세상이다. 비록 수인을 유기하는 사람이 해마다 늘고있다고는 하지만 수인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요즘 세상에서 감히 수인에게 폭력을 휘두른 정현의 이야기가 쉽게 가라앉을 리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정현에 대한 비난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정현이 B그룹 자제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B그룹 전체로 비난이 옮겨왔다. 백현은 정현의 뒷수습을 하기 위해 부랴부랴 유기 수인 보호소로 온 제 모습이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수인을 좋아하지도 않고.
그러나 이미 구속이 되어 끌려간 정현은 스스로 수습할 방법이 없었고 백현은 제게 넘어온 총애를 허무하게 흘려보낼 이유가 없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를 하는 심정으로 보호소를 찾은 백현은 한달동안 '보여주기 식' 봉사활동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민석의 친절한 안내가 지금은 꼭 재촉과도 같다. 백현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보호소 안으로 걸어갔다. 이미 그가 온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보호소 원장이 묘한 얼굴로 백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현은 싸늘하게까지 느껴지는 남자의 시선에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마주했다.
"김준면씨?"
"얘기는 들었습니다. 많은 건 바라지 않으니 애들한테 피해가는 일만 없게 해주세요."
건방지게까지 느껴지는 말에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차마 티낼 수는 없었다. 백현은 어금니를 으득 물었다. 현재로써 백현은 을의 입장이었다. 극악으로 떨어진 B그룹의 평판을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 몇년 전부터 꾸준히 수인 보호소에 후원을 해온 척 기사를 내기로 했다. 겨우 한달동안 이어질 봉사 활동은 근 10년간 이어진 헌신으로 각색되고 이틀 전 강제에 가까운 방식으로 건넨 돈은 정기적으로 보내진 후원금으로 탈바꿈해 신문에 실릴 예정이었다. 백현은 앞서 걷는 준면의 뒷통수를 노려봤다. 이 보기 좋은 연극의 주인공 역할은 원하던 원치않던 백현의 몫이 되었다. 후계 싸움을 벌이던 정현이 저 꼴이 났으니 백현에게는 다시 없을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백현은 자신이 수인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영 탐탁치 않았다.
"백현씨가 맡게 될 C동은 들어온지 얼마 안 된 수인들이 거주하는 곳이에요. 인간의 손에 망가진 수인들이 얼마나 비참한지, 모르시죠?"
"알고 싶지 않습니다."
"하...! 그래요. 하긴. 형제가 뭐 다를 게 있겠어요?"
백현은 대놓고 비아냥대는 준면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시선을 돌렸다. 문득 바닥에 흩뿌려지듯 날리던 금빛 머리칼이 눈 앞에 아른거리는 느낌에 절로 인상이 구겨져서였다.
"...상처가 많은 아이들이에요. 언성을 높이지 말아주세요."
어쩐지 조금 떨리는 목소리를 내보인 준면이 당부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백현은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준면의 눈을 마주봤다. 알겠습니다. 겨우 떨어진 말이 그닥 믿음직스럽지 못할텐데도 준면은 한결 가벼워진 얼굴을 했다.
"저희 보호소는 A동부터 C동까지 있고 유기된 수인들의 상태에 따라 숙소가 분류되요. 각 동은 기숙사 형식이라 몇명의 수인들이 같이 방을 쓰는 방식이고 하루 일정은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지만 백현씨가 오시는 낮 시간대에는 의무적으로 1층 휴게실에 모여 다같이 보내요. 할 일은 특별히 많지 않을 거에요. 밥도 알아서 먹고 씻는 것도 각자 알아서 하는 편이에요. 밥을 먹지 않거나 씻는 걸 거부하는 아이들이 종종 있긴 하지만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부탁드리는 일만 그때 그때 처리해주시면 됩니다."
준면은 조심스레 C동 문을 열며 분주하게 말을 이었다. 꽤 커다란 복도, 말랑말랑한 고무 바닥에 발자국이 스며들듯 사라졌다. 백현은 마른 입술을 연신 혀로 쓸며 준면의 뒤를 따랐다. 낯선 사람의 등장에 놀란 수인 몇몇이 소파 뒤로 달려갔다. 백현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제 뒤를 졸졸 따르는 수인들을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고양이나 강아지부터 시작해서 토끼, 뱀 심지어는 부엉이 수인까지 있다. 백현은 눈 앞이 아찔해지는 기분에 입술을 감쳐물었다. 아아, 어디로 눈을 돌려도 시야에 들어오는 수인들에 결국 눈이 질끈 감겼다.
-
C동은 학대받고 유기당한 수인들이 임시로 모이는 곳이었다. 대체로 수인 등록이 이루어졌거나 상태가 나쁘지 않은 수인들은 A동과 B동으로 이동했는데 유독 온 몸을 부들부들 떠는 수인들은 모두 C동으로 모였다. 백현은 준면이 자신을 C동으로 보낸 이유가 훤히 보여 기분이 상했다. 이런 식으로 저를 도발해봐야 수인을 좋아하지도 않고 애초에 마음 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자신에겐 전혀 무용지물인 것인데. 첫 날은 안내만 해주겠다더니 벌써 1주일째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준면이 조금 우스웠다. 백현은 아닌 척 저를 감시하는 준면의 시선을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본래 C동을 관리하던 선생님은 백현이 출근 도장을 찍은 뒤부터 본 적이 없다. 준면은 혹시 소문이 새나갈까 잠시 관리 선생을 바꿨다고 했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저를 감시할 목적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담요 좀 주세요!"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센터에 출퇴근 도장을 찍은지 열흘 밖에 되지 않은 주제에 나름의 요령이 생긴 백현은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조금씩 여유를 부렸다. 어차피 저를 못미더워하는 준면은 왠만한 일을 스스로 하는 편이었기에 멋모르고 빈 손으로 향했던 처음 몇일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있기만 했었다. 결국 대부분의 시간을 멀뚱히 앉아 보내야 한다는 것에 질린 백현은 이틀 전부터는 아예 작은 책 한권을 챙겨왔다. 처음에는 경계하며 주변을 맴돌던 수인들도 백현이 책에 집중하면 흥미 잃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고 무엇보다 얌전한 태도에 준면이 꽤나 흡족해하는 것이 보여서 백현은 억지로라도 책을 들고 왔다. 대놓고 감시하는 티를 내며 저를 보는 시선은 백현으로써도 달갑지 않았으니까. 그나마 책을 읽고 있으면 준면의 감시가 덜해졌다. 해서 오늘도 팔자에 없던 필독도서 독파에 들어간 백현은 다급한 얼굴로 뛰어 들어오는 준면에게 반응하지 못했다.
"뭐해요? 담요!"
잠깐 자리 좀 비우겠다더니, 새로운 수인이 온 거였나보다. 백현은 떨어뜨린 책을 줍지도 못한 채 서둘러 담요를 건넸다. 온 몸을 부들부들 떠는 작은 어깨가, 신경쓰지 않으려 해도 시야에 들어온다. 백현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담요를 덮어주려 다가서는 준면을 경계하면서도, 끝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완벽한 체념과 당연하다는 듯 이어지는 무력함. 백현은 구역질이 치미는 기분에 견딜 수가 없었다.
"욕실에 물 좀 받아 놓을게요. 잠깐만 안아줘요."
"뭘 하라고요?"
"안아주라고요."
"제가 욕실에,"
"욕실이 어딘 줄은 알아요?"
"...."
"3분이면 되요."
백현은 낭패감 서린 얼굴로 입술을 잘근거렸다. 왠만한 일은 준면이 도맡아 했고 저를 못미더워 하는 것이 눈에 보여서 굳이 나서지 않았다. 아이들을 씻기기는 커녕 욕실의 위치조차 모르는 백현이니 준면이 욕실로 가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백현은 준면에게 떠밀려 제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수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는 조그만 얼굴과 달리 가슴팍에 닿은 머리칼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제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물러서는 순간 쏟아질지 모르는 폭력에 차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굳어있다. 백현은 소리없는 욕지기를 내뱉으며 입술만 잘근거렸다. 고개를 돌리느라 슬쩍 거리가 벌어지자 작은 머리통이 조심스레 앞으로 기울여졌다.
"...."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온 몸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리는 주제에. 백현은 순간의 온기가 그리워 제게 다가서는 수인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머리칼이 슬쩍 닿을 거리가 되서야 멈춰선다. 차마 저를 붙잡지 못하고 혼자 매달리듯 쥐어진 주먹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백현은 생명줄이라도 쥔 듯 필사적으로 움켜쥔 주먹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쪽으로 갈까?"
준면의 부름에 수인이 등을 돌리는 순간에서야 한숨이 터졌다. 백현은 그제서야 제가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씨발."
좆같은 새끼. 왜 쳐울지도 않는거야.
-
덤덤한 얼굴을 한 아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 백현은 창 밖만 바라보는 그 뒷모습이 거슬려 책에 집중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냥 없는 존재인 것처럼 그를 무시하려 했는데, 문득 고개를 들면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서 뚱하니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견딜 수가 없었다. 백현은 벌써 일곱번째 읽고있는 구절을 노려보다 결국 책을 덮었다. 꽤 신경질적인 손길에 겁에 질린 수인들이 담요를 뒤집어쓰고 몸을 낮췄다. 학대를 받았던 기억 때문인지 조금만 큰 소리를 내도 C동 내 수인들은 모두 꼬리를 말아내리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잘못 했어요, 때리지 마세요.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기까지 하는데, 무감한 얼굴로 저를 보는 저 커다란 눈만은 변함이 없다. 백현은 그를 노려봤다. 제 눈빛 하나에도 머리 위에 달린 하얀 귀가 파들거리는데, 그러면서도 시선은 피하지 않는다.
왜 도망치지 않는 거야. 무서우면 피하면 되잖아.
백현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말을 눌러 삼키며 짐을 챙겨들었다. 짜증나. 유독 눈에 들어오는 목덜미의 붉은 자국이 거슬렸다. 발견됐을 당시 살갗을 파고든 가죽끈에 목이 죄인 채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다는 그 흔적이. 낙인처럼 저를 죽이는 그것을 끊어내려는 손길에 죽음을 기다리듯 눈을 감았다던 작은 얼굴이 백현은 끔찍하리만큼 싫었다.
결국 내려놓은 책을 챙기지도 못한 채 도망치듯 보호소를 나선 백현은 민석의 인사도 무시한 채 차에 올라탔다. 아무 말없이 운전석에 올라탄 민석이 이내 천천히 차를 출발시키자 그제야 시트에 등을 기댄 백현이 고개를 젖혔다.
"나도 알아."
"...."
"도망칠 수 없다는 게 학습되서 저러는 건 나도 알아."
"...백현아."
"근데 씨발, 답답하잖아. 달려들어서 물어뜯기라도 하지, 딱 한번만 더 도망쳐 보지."
나한테, 살려달라고 말이라도 하지.
손에 가린 목소리가 떨려왔다. 민석은 백미러로 비친 백현을 흘깃거리며 혀를 굴렸다. 단순히 가해지는 것만을 폭력이라 할 수 있을까. 빨갛게 부어오른 작은 손을 꼭 쥔 채, 눈물에 짓이겨진 얼굴을 하던 백현을 잊을 수가 없었다. 민석은 핸들을 힘주어 쥐었다.
너는 너무 어렸어. 네 잘못이 아니야.
어쩌면 그때 했었어야 할 말을 아직까지 가슴에 품고있는 자신이 가장 큰 가해자일지도 몰랐다. 민석은 입술을 뻐끔거리며 말을 골랐다.
백현아,
"백화점으로 가. 밀린 일 많지?"
"...네."
네 잘못이 아니야.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삼키며 핸들을 고쳐잡은 민석이 이내 방향을 틀었다. 오래 알고 지낸 동생의 얼굴에서 제가 모시는 도련님의 얼굴로 돌아온 백현은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기대며 눈을 감고 있었다.
-
버릴까.
백현은 손에 쥔 목도리를 멀뚱히 내려다봤다. 이걸 왜 샀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순간 제가 미쳤었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백현은 손에 쥔 목도리를 잡아당겼다. 보호소에 출퇴근을 하면서 백화점 관리에 소홀해진 것 같아 일부러 들렸었다. 제가 없는 사이 매출 변동이 어떻고, 프로모션 진행 상황이 어떻고 바쁘게 설명하는 민석의 말을 들으면서 주변을 돌아보다 마네킹에 걸린 목도리가 눈에 들어왔다. 하필이면, 짙은 남색 계열의 목도리를 보자마자 아이가 입었던 남색 니트가 떠올라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찬 바람이 쌩한 날씨에도 자국을 가릴 생각없이 멀끔하던 그 하얀 목이. 결국 뭔가에 홀린 듯 목도리를 사고만 백현은 다음날 보호소까지 쇼핑백을 들고 왔다. 그러나 대체 어떻게 건네야 할지. 백현은 바스락거리는 쇼핑백을 손에 꾹 쥔 채 조심스레 C동 안으로 들어섰다.
"...."
제가 들어서는 기척을 느꼈으면서도 미동이 없다. 백현은 제 손에 들린 쇼핑백을 흘깃거리는 수인들을 무시한 채 소파에 앉았다. 웃기는 새끼. 관심도 없는 척 창 밖만 바라보는 주제에 제가 부스럭거리기라도 하면 귀를 쫑긋거린다. 백현은 괜시리 헛기침을 내뱉으며 요란하게 기척을 드러냈다.
"...야."
차마 네 생각나서 샀다는 둥의 말은 못 할 것 같아서 괜히 퉁명스레 아이를 부른 백현이 투박한 손길로 성의없이 쇼핑백을 내려놨다. 툭하니 떨어진 쇼핑백이 무릎께에 부딪히는 것에 놀란 듯 어깨를 움찔거리던 그가 커다란 눈을 슬쩍 굴려 쇼핑백을 내려다봤다. 멀뚱히, 쇼핑백을 처음 보는 아이처럼 그저 바라보기만 하자 결국 참다 못한 백현이 아랫입술을 감쳐물며 목도리를 꺼내들었다.
"가져."
"...."
코 앞까지 내미는 손길에도 반응이 없다.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다 할 반응은 보이는 편이었는데. 백현은 의아한 얼굴로 눈썹을 치켜떴다.
"뭐. 이거 그냥 목에 두,"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현은 그제서야 두려운 얼굴로 제 손에 들린 목도리를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을 발견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자신은 그저-
백현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코 앞에 내민 목도리를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을 마주했다. 아이는 그를 갉아먹듯 목을 옥죄던 가죽끈을 떠올리는 듯 온 몸을 부들거리면서도 끝내 피하지 않았다. 백현이 손에 든 목도리로 목을 옥죄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러나 그럼에도 낙인처럼 드리워진 두려움은 어쩔 수 없는지 커다란 눈이 연신 이리저리 움직이며 불안감을 드러냈다. 백현은 순간 울컥 치미는 울화에 부러 목도리를 양 손으로 늘어뜨렸다.
"야. 잘 봐."
"...."
"이렇게. 이렇게 하는 거야, 이거."
그 좆같은 거 아니라고.
뒷말을 억지로 삼키며 아이의 목에 목도리를 매주었다. 처음에는 제게 뻗어오는 손을 견디지 못하고 팔을 후들거리던 아이가 목에 감기는 낯선 촉감에 절로 어깨를 움츠렸다. 백현은 험악한 표정과 달리 조심스러운 손길로 목도리를 매듭지었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느낌.
언제나 저를 괴롭히던 감각과는 전혀 다른 것에 의아함을 느낀 아이가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제 목을 조를 줄 알았는데, 이 이상한 것을 목에 매단 백현은 머쓱한 얼굴로 코만 훔칠 뿐이었다. 아이는 더듬거리는 손으로 목에 둘러진 낯선 것을 조물거렸다.
"그.... 하고 다녀, 이제."
고개를 돌리며 내뱉는 목소리가 낯설다. 아이는 멍한 얼굴로 손에 쥐어진 폭신한 것을 욕심껏 손에 쥐었다.
-
아이는 똑똑했다. 빛조차 잘 들지 않는 2평짜리 방에서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자랐음에도 아이는 주변 수인들이 하는 행동을 관찰하여 똑같이 따라했다. 가르쳐주지도 않았던 젓가락질이나 씻는 법, 심지어는 스스로의 침구를 정리하는 방법까지 터득해 척척 해내는 모습에 준면은 기특하다며 연신 물개박수를 쳐댔다. 그러나 백현은 그런 아이의 모습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지독한 새끼.
처음 발견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입을 연 적이 없어 모두들 아이를 벙어리로 생각했다. 10여년 동안 목을 죄던 목줄 탓에 성대가 압박을 받았을 게 뻔했고 말을 배울 만한 기회도 없었을테니 다들 당연하게 아이를 벙어리라고 여긴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는.
"안 때려?"
백현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솔직히 그냥 말을 건 것이었다면 이렇게 기분 나쁠 리는 없었다. 빌어먹을 놈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까지 갸웃거리며 왜 안 때리느냐 묻는데, 백현은 차마 거기다 대고 대답할 말이 없어 입술만 뻥긋거렸다. 벙어리인줄 알았던 아이가 말을 한다는 것보다, 제게 쏟아질 폭행을 당연시 한다는 것이 더 엿같았다. 결국 짜증이 치민 백현은 준면의 경고를 깡그리 잊어버린 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때려!"
켕! 갑작스런 제 고함에 놀란 수인들이 온 몸을 움츠리고 덜덜 떨었다. 제 목소리에 놀란 아이도 동그란 눈을 좀 더 크게 키웠다가 어색한 얼굴을 해보였다.
"...안 때려?"
사람 말을 뭘로 듣는 거야. 백현은 다시 한번 단호하게 안 때려 라고 대답했다. 제 말에 조금이나마 반응을 보일만도 하건만, 잠시 백현을 바라보던 아이는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어쩌면 작은 반응이라도 보일 것이라 기대했던 백현도 끝내 시선을 피하는 아이에 역시나 라고 여기며 등을 돌렸다. 이제는 백현의 지정석이 된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기 무섭게 휴게실로 들어선 준면이 인사를 건넸다. 생각보다 유순한 백현의 태도 덕분인지, 처음보다 조금 친절해진 준면의 목소리가 가볍게 휴게실을 울렸다. 백현은 그의 인사에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대청소가 있는 날이었다. 상태가 심각하지 않은 수인들은 각자의 방을 청소하고 준면과 백현은 커다란 휴게실을 청소하는 것이었는데, 처음에는 B그룹의 도련님으로 자라 이런 일은 서툴 것이라 여기던 준면이 그를 골탕먹일 작정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물론 생각보다 능숙한 백현의 행동에 무용지물이 되버리고 말았지만. 백현은 창문을 열기 위해 창가로 다가섰다.
"...."
잘못 느낀 건가. 백현은 설마 하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 아이를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러 좀 더 먼 곳에 위치한 창가로 걸어가자 소리없는 발이 저를 따라온다. 백현은 어쩐지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눈, 여전히 감정이라곤 보이지 않는 얼굴. 저를 경계하는 듯 하면서도 제게서 서너걸음 떨어진 거리를 유지한다.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 않으면서도, 제가 멀어지면 부리나케 제 곁으로 달려오는 아이의 발에 어쩐지 목구멍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백현은 저를 따라오는 아이를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청소에 집중했다. 이제는 아예 대놓고 저를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에 놀란 준면이 창백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으나 백현은 이를 무시한 채 창문만 연신 닦아댔다. 멍청한 새끼. 저를 키우긴 커녕 마음 줄 생각조차 없는 자신을 왜 따라오는지 모르겠다. 왜 저렇게 멍청하게 굴어. 차라리 준면에게 가 아양이나 떨면 안아주기라도 할텐데, 그를 안아주긴 커녕 손길 하나 줄 수 없는 자신이 뭐 그리 궁금하다고 저렇게 따라오나 모르겠다. 백현은 청소가 대강 마무리될 때까지 저를 쫓아오는 아이의 시선을 무시했다. 평소보다 이르게 끝난 청소에 지치지도 않는지 수인들을 욕실까지 안내하는 준면의 체력이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백현은 지친 얼굴로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잠깐이면 되는 건데, 응?"
달래는 준면의 목소리가 쩔쩔매는 것이 여기까지 느껴진다. 백현은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에서 였다. 그리고 역시나 백현의 예감대로, 백현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아이를 달래는 준면의 뒷통수와 그런 그를 경계하며 목에 두른 목도리를 꾹 쥔 아이를 바라봤다. 씻어야 하는데 목도리를 벗지 않으려는 아이 덕에 준면이 애를 먹고 있었다. 짜증나. 백현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긴 한숨을 내뱉었다. 저 까짓 게 뭐라고, 목도리를 사다준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백현은 관자놀이를 짚으며 미간을 구겼다. 예민한 성정을 그대로 드러내듯 치켜올라간 눈썹이 날카로운 분위기를 냈다. 그리고.
"...."
제게 다가서는 기척에 놀란 백현이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아이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못해도 서너걸음 거리를 유지하던 건 언제고, 한 걸음만 뻗으면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선 아이가 불쑥 몸을 숙였다. 백현은 그제서야 아이가 목도리를 손에 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선 아이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 준면의 곁으로 다가섰다. 서너걸음 거리를 유지하며 재촉하듯 바라보자 조금 얼빠진 얼굴을 하던 준면이 어색한 얼굴로 아이를 욕실로 데려갔다. 백현은 아이의 뒷모습이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바라보고 나서야 고개를 숙였다.
"하-"
발치에 곱게 접혀진 목도리에 괜히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미는 기분이었다.
-
결국 오늘도 가져온 책은 다 읽지 못했다. 백현은 댓장은 넘어갔을까 싶은 페이지를 스르륵 넘기며 입술을 내밀었다. 되도 않는 동정심으로 아이에게 목도리를 사다줬던 날 이후, 아이는 백현에게 조금씩 가까워졌다. 서너걸음 거리였던 것이 어느새 두 걸음, 한 걸음. 이제는 손만 뻗으면 아이의 어깨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백현은 아닌 척 저를 관찰하는 아이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책에 집중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얼빠진 얼굴로 그런 아이와 백현을 멍하니 바라보던 준면은 집에 돌아가기 위해 C동을 나서던 백현의 뒤를 따라와 말했다.
"처음이라 그래요."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백현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자 씁쓸한 얼굴을 감추지 못한 준면이 눈을 내리깔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디오를 때리지 않은 남자 인간은 백현씨가 처음이니까."
그 말에 제가 대꾸할 말이 있었던가. 백현은 뻐끔거리던 입술 새로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가만 입술을 깨물었다. 작게 움직이는 행동에도 흠칫 놀라는 주제에 조금이라도 제 곁에 있으려 눈치를 보던 그 커다란 눈이 자꾸만 떠올랐다. 백현은 잘근거리던 입술을 겨우 떼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관심 없어."
"...."
"내가 상관할 바 아니야."
씹어뱉듯 내뱉은 말은 꼭 다짐과 같았다. 말을 하는 백현이나 그 말을 듣는 준면이나 이것이 다짐이라는 것이 절실히 느껴져서 절로 당황한 얼굴을 했다. 백현은 순간적으로 귀가 뜨거워지는 기분에 절로 고개를 돌려 준면의 시선을 피했다. 덩달아 당황한 얼굴로 잠시 말을 잊었던 준면은 고개를 돌리는 백현의 행동에 붉게 달아오른 그의 귀를 뒤늦게 발견했다. 매번 말은 퉁명스레 하면서도 시키는 일은 꽤나 성실히 하던 행동이나 기대라곤 없이 건넸던 작은 경고에 언성 한번 높이지 않고 묵묵히 굴던 백현이 떠오르자 준면의 표정도 조금씩 기묘하게 변했다. 언론에서 떠들썩하던 형과 달리 그의 동생은 어째....
제 시선이 변한 것을 눈치챈듯 꽤 다급한 얼굴로 등을 돌린 백현이 인사도 없이 걸음을 옮기려는 것에 그를 불러세운 준면은 부러 걱정스러운 말투로 목소리를 낮췄다.
"아이는...! 디오라고 부르지 마세요. 이름을 알려주지 않아서 임시로 그렇게 지칭하는 것 뿐이지, 아이 앞에서는 절대 불러선 안 되는 이름이니까요."
"...."
"디오라는 이름으로 수인 등록이 되어있긴 한데 본명은 따로 있는 것 같아요. 디오라는 건, 이전에 주인이 지어준 이름이고요. 아마 학대를 당할 당시 불렸던 이름 같은데...."
"...."
"디오라고 부르면 경기를 일으켰어요. 지금은 괜찮아진 편이지만 한 때는 단순히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패닉에 빠졌었고요."
본명을 알 수 있으면 좋을텐데.
무의식 중에 중얼거리는 제 말에 어쩐지 어깨를 움찔거린 백현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내리깔다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준면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뭐라 더 말을 걸까 하다 그냥 입을 닫았다. 뭐 때문에 수인들에게 거리를 두는진 몰라도 그가 수인들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을 사람이라면, 단지 그것으로 되었다. 아무리 평판이 좋고 인상이 좋은 사람이라도 뒤에서는 수인들을 학대하고 괴롭히며 무시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입양을 갔다가 또다른 상처를 안고 보호소에 들어오는 수인들을 보며 얼마나 무력감을 느꼈던가. 자신은 수인을 키울 생각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곤히 잠든 수인들에게 담요를 툭툭 던져주는 저 투박한 남자같은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다는 것으로 감사할 일이지. 준면은 입맛을 쩝 다시며 저도 등을 돌렸다. 무의식적으로 했던 제 말이 어떤 일을 불러 일으킬지도 모르고.
-
본명이라도 알 수 있으면 좋을텐데.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준면의 목소리가 왜 자꾸 떠오르는 건지. 백현은 제게 말을 걸었던 아이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떠보이며 제게 묻던 아이의 목소리는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꽤 좋은 목소리였다. 낮고 단단한 목소리는 적당히 무게감이 있었고 그러면서도 탁하지 않아 단정한 느낌이 들었다. 준면에게는 단 한번도 입을 연 적이 없어 당연히 아이가 실어증 내지 벙어리라고 여기는 준면은 아이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을 자연스레 여겼지만 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적 있는 백현은 달랐다. 말을 하는 어투나 행동이 꽤 자연스러운 것을 보면 말을 못 하는 것도 아닌데 아이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싫어했다. 준면이 실수로 아이의 발을 밟았을 때에도 아이는 비명 한번 지르지 않고 고통을 참아냈다. 그것을 발견한 백현이 성의없는 손길로 준면을 밀어내지 않았다면, 구둣발에 발을 짓눌리고도 아이는 침묵했을 것이었다.
백현은 슬쩍 눈을 굴려 제 시야에 걸리는 아이의 작은 머리통을 내려다봤다. 소파에 앉은 저를 관찰하듯 한참이나 바라보던 아이는 백현이 가져다준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며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본명. 디오라는 이름에 경기를 일으킨다는 준면의 말이 머리에 맴돌자 기분이 묘해졌다. 백현은 퉁명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디오."
"...?!"
덜컥, 소리가 나기라도 할 것처럼 아이가 움칠거렸다. 백현은 관찰하듯 아이의 행동을 주시했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목도리를 만지던 아이의 손이 덜덜 떨리며 목도리를 꾹 잡아쥐었다. 파르르 떨리는 어깨,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와 잘근거리는 입술. 이내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올린 아이가 금방이라도 고통에 물들 듯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자 백현은 부러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이게 네 이름 아니야?"
"...."
"이렇게 부르는 거 싫어?"
"...."
"그럼 널 뭐라고 불러야 돼?"
우물쭈물.
톡 튀어나온 입술을 뻐끔거리던 아이가 눈치를 살피듯 재차 저를 올려다봤다. 백현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한 채 아이의 눈을 똑바로 마주봤다. 그저, 아이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생각보다 무감한 백현의 반응 탓일까. 잠시 고민하는 듯 보이던 아이는 한참만에야 고개를 숙여 목도리를 내려다봤다.
"경, 수...."
"어?"
"경, 수. 경수."
"경수. 그게 네 이름이야?"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의 얼굴이 생각보다 복잡하다. 백현은 자꾸만 답지 않은 행동을 하는 스스로를 짜증스레 여기면서도 제게 이름을 알려주는 아이의 행동에 기분이 묘해졌다. 마치 특별한 사람이 된 것처럼. 결국 뭔가를 기대하듯 저를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을 이기지 못한 백현이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래."
어쩐지 손 끝이 덜덜 떨리는 기분이었다.
-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다. 백현은 셔츠 단추를 채우며 거울에 비치는 민석을 바라봤다.
"무슨 일 있어? 아침에는 회사 업무 보잖아."
"오늘부터 회사 업무 보시기로 되어 있잖습니까."
"뭐?"
백현은 셔츠 깃을 정리하던 손을 멈춘 채 민석에게 고개를 돌렸다. 생각했던 것과 다른 백현의 반응에 제가 더 의아한 얼굴을 한 민석이 달력을 가리켰다.
"어제가 한달 째 되는 날이었는데, 모르셨습니까?"
달력에 쳐진 붉은 동그라미가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백현은 어쩐지 아찔한 기분이 들어 입술을 깨물었다. 이름을, 알아냈는데. 조금 떨리는 듯한 손길로 머리를 쓸어내린 행동에 아이가 처음으로,
백현은 신경질적인 손길로 넥타이를 집어던졌다. 갑작스런 제 행동에 놀란 민석이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굳이 반응하고 싶지 않았다. 백현은 제게 다가오는 민석을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사장님."
"가지."
신경쓰지 말아야지. 그딴 새끼, 그까짓 수인들따위. 멍청한 수인들에게 마음을 줘봤자, 그들을 도와줘봤자 좋은 꼴 못 본다는 걸 재차 상기시키며 걸음을 서두른 백현이 차에 올라탔다.
여섯살이었나, 처음 수인이라는 것을 보게 된 백현은 그저 수인이라는 존재가 신기하고 좋았었다. 바싹 마른 그는 제 귀와 꼭 같은 밀빛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는데 엉킨 것 하나 없이 부드러운 그 감촉이 너무 좋아서 백현은 그를 볼때면 그 머리칼을 손에 쥔 채 놓을 줄을 몰랐다.
좋아, 너무 좋아.
어린 백현의 두서없는 말에도 그는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고 백현의 손을 마주 잡아주었었다. 그 다정함이 너무 좋아서, 그래서 더 좋아했다. 엄연히 정현의 소유물이었던 그를 자신이 가질 수는 없는데도, 그래도 좋았다. 정현에게 짓밟히는 그를 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고귀한 도련님께서는 그런 장면을 봐선 안된다고 말리는 메이드들을 모두 뿌리치며 정현의 발에 채이는 그를 감싸안았다. 너무나도 예쁜 사람인데, 이렇게나 빛나는 사람을 괴롭히는 제 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소란에 달려온 그의 어머니조차, 백현을 밀어냈다. 제발 그를 살려달라는 백현의 매달림에 그녀는 구태의연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구나. 저러다 저게 죽을 수도 있겠어.'
'엄, 엄마...! 얼른 살려주세요! 형이,'
'그래. 우리 집에서 저게 죽으면 골치가 아파지지.'
엄마...?
제 머리를 쓸어내리는 다정한 손길에 이질감을 느낀 백현이 그녀를 부르기 무섭게 그녀는 정현의 방으로 들어섰다. 불길한 기분에 재차 그녀를 부른 백현이 그녀를 뒤따랐지만 코 앞에서 닫힌 문은 열릴 줄을 몰랐다. 백현은 작은손이 온통 붉게 물들 정도로 문을 두들겼다. 곁에 선 메이드들이 저를 말리는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백현은 목이 터져라 그녀와 형을 부르면서 연신 손을 움직였다. 한참만에 열린 문 틈 사이로 보이던 처참한 모습과 핏자국, 무력한 자신은 끔찍하리만치 잊혀지지 않는 악몽이었다.
"사장님."
"형."
"...."
"왜 도망 안 쳤을까?"
여우 수인이라는 것을 이용해 아버지를 유혹했다는 그 수인은, 모진 매질과 폭력적인 관계를 당하면서도 정현을 떠나지 않은 그 멍청한 이는 대체 왜 그랬을까.
백현은 우울한 얼굴로 창 밖을 바라봤다. 말없이 제 어깨를 그러쥐었던 민석에게 몇번이고 매달려 마련했던 것이었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민석은 꽤 유능한 비서였고 어머니와 정현에게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있는 작은 거처는 그가 살기에 충분히 좋은 환경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어서 도망가라는 백현의 말을 거부했다. 손과 발에 채워진 족쇄를 풀어내고 문을 열어 재촉하는 백현의 행동에도 그는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았고 끝내 백현의 도움을 거절했다. 쉬지 않고 쏟아지는 정현의 폭력 속에서도 백현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고 죽을 걸 알면서도, 정현의 뒤를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왜 그랬을까.
그는 왜 자신의 도움을 거절한 채 등을 돌렸을까.
백현은 수십번을 고민했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그저 그가 멍청한 수인이었을 뿐.
-
생각보다 일상은 쉽게 회복되었다. 언론에 공개한 사진과 후원 내역에 사람들의 반응은 반반으로 나뉘었지만 그래도 정현의 사건 이후 하락세를 이어가던 B그룹의 주식이 처음으로 상승세에 올랐다. 비록 작은 폭이긴 했지만 분위기가 조금 반전된 것은 사실이었기에 백현은 적극적으로 수인 관련 행사에 참여하며 상승세를 이어가려 애썼다. 뜻하지 않은 인터뷰에 흔쾌히 응하게 된 것도 이러한 활동의 연장선이었다. 백현은 조금 묘한 얼굴로 저를 보며 마주 앉은 남자를 바라봤다. 분명히 인터뷰를 하기 위해 온 기자라고 들었는데 남자의 차림새는 기자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백현은 저 또한 즐겨쓰는 익숙한 수제 만년필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
"얼마 전에 남모르게 행하셨던 기부와 봉사 활동이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셨던데 특별히 수인들에게 도움을 주시게 된 계기가 있나요?"
"글쎄요. 어린 시절부터 수인에게 관심이 많았어요. 같은 듯 다른 그들의존재가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 안타깝기도 하고."
"저도 수인들에게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봉사 활동은 주로 유기 수인 보호소에서 하셨던 것 같던데, 맞나요?"
"네. 괜히 떠들썩하게 알릴 생각은 없어서 최대한 조용히 찾았습니다."
"그렇군요. 무려 10년 동안 그렇게 봉사 활동을 해왔는데 7년을 그 곳을 찾았던 저는 단 한번도 변 사장님을 뵌 적이 없군요."
역시.
백현은 입 안에서 이질적으로 움직이는 혀를 잘근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기자랍시고 다가온 사람이 뭔가 수상하다 했더니 제 뒤를 캐내려는 자였다. 정체가 뭘까. 혹시 아직 감옥에 있는 정현이 저를 무너트리기 위해 보낸 자일까. 백현은 분주하게 계산하며 구태의연하게 커피잔을 들었다. 고소한 커피향이 코 끝을 맴돌자 부러 여유롭게 커피를 입에 머금은 백현이 미소 띈 얼굴을 지우지 않은 채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게 큰 보호소에서 서로 마주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죠. 보호소에서도 저는 주로 C동에만 있는 편이었고 그 곳을 벗어난 적은 거의 없으니 아마 저를 보시는 건 힘들었을 겁니다."
"...그래요?"
"네."
남자의 시선이 생각보다 단단하다. 백현은 제 말을 믿지 않는 남자를 알면서도 그 눈을 똑바로 마주봤다. 미소 띈 얼굴과 달리 서로를 마주한 뒷편으로는 치열한 수 싸움을 벌인다. 결국 흔들림없는 백현의 시선에 한 발 물러나듯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수첩을 뒤적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아, 잠깐."
"...."
"전화가 와서."
나이스 타이밍, 이라고 할까.
백현은 생각지 못하게 울리는 전화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소장 김준면. 백현의 말을 뒷받침 해주기라도 하는 듯 휴대폰에 비추는 이름에 숨김없이 그 화면을 남자에게 보여준 백현이 여유로운 태도로 전화를 받았다.
"네. 변백현입니다."
-...변백현씨?
"네, 준면씨. 말씀하세요."
부러 친근한 척 말하자 앞에 앉은 남자의 눈썹이 슬쩍 위로 올라간다. 백현은 다정한 얼굴로 수화기 너머 준면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꾸민 듯한 제 목소리 때문인지, 잠시 망설이며 침묵을 지키던 준면이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한 달이 이렇게 금방 갈 줄은 몰랐네요. 마지막 날엔, 가시고나서 알았어요. 제대로 인사를 못해서 전화라도 드릴까 했는데 불편하실까봐 일부러 안 했어요.
"괜찮습니다. 저도 다음 날 비서 통해서 알았으니까요."
-...그래요.
준면의 목소리는 어두웠다. 처음에는 눈 앞의 남자를 의식하느라 그를 눈치채지 못하던 백현은 뭐라 말을 꺼내지 못하고 어색한 침묵을 이어가는 준면에 이질감을 느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 있나요?"
-변백현씨.
"네."
-정말, 정말 정말 전화를 안 드리려고 했는데요.
백현은 곤란한듯 말을 늘이는 준면의 목소리를 끈기있게 기다렸다. 어쩔 줄 몰라하며 연신 난감한 기색을 보이던 준면이 한참만에야 조심스레 본론을 꺼냈다.
-디오, 요...
"경수 말입니까?"
-경수요? 디오 말씀하시는 거에요? 디오 본명이 경수에요? 경수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것 같은데, 경수가 왜요? 그 애한테 무슨 일이 있습니까?"
백현은 저도 모르게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끼며 미간을 구겼다. 빌어먹을,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아이는 언제나 자신의 역린을 건드렸다. 왜 자꾸만 그 무기력한 수인을 떠올리게 하는지. 그 멍청하게 한심하던 수인처럼 두려움에 떨면서도 끝내 뒷걸음질 한번 치지 않고, 제게 쏟아질 폭력을 알면서도 체념하듯 눈을 감아버리는지. 백현은 경수를 볼 때마다 숨통이 틀어막히는 기분이었다. 결국 방금 전까지 신경전을 벌이던 남자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백현이 수화기 너머에 집중하자 잠시 당황한 듯 침묵을 지키던 준면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그동안 변백현씨 보면서 나쁜 사람은 아니구나 싶었어요. 하지만 그래도 백현씨가 수인을 키우기에 적당한 사람은 아니시죠. 아는데, 그래도 현재로써 디오 아니 경수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백현씨 뿐이라 전화 드렸어요.
"무슨 일입니까."
-경수를 학대했던 전 주인한테 연락이 왔어요.
"네?"
-무죄 판결 받았대요. 어떻게 받았는진 모르겠어요. 분명 현행범으로 체포된 사람인데, 알아보니까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이 났다고 하더라고요.
"...."
-서류 절차가 있어서 바로 인도할 수 없다고는 했는데.... 저희로써는 경수를 계속 데리고 있을 명분이 없어요.
손이 덜덜 떨려온다. 치미는 감정은 분노일까, 혐오일까.
백현은 침묵을 지키는 제가 불안한듯 연신 저를 부르는 준면의 목소리에 간신히 대답하며 마른 침을 삼켰다. 준면이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며 말하는 상황은 지나치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래, 불과 몇달만 있으면 조용해진 언론의 뒤로 쉬쉬하며 감옥을 나설 정현 또한 경수의 주인과 똑같은 절차를 밟을 것이다. 확실한 증거는 오간데 없이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애초에 죄는 성립조차 되지 않은 채 당당하게. 백현은 목구멍에 가시가 박힌 듯한 기분에 연신 마른 침을 삼켜댔다.
-내일이면 더 이상 댈 핑계도 없어요. 실례인 거 알지만, 이름이라도 올려주시면 안 될까요?
"...."
-다른 건 아무것도 바라는 거 없어요. 원하신다면 각서라도 쓸게요. 그냥, 서류상으로만 경수한테 보호자가 생겼다고 해주세요. 수인 보호법 상 수인은 주인을 거부할 권리가 있어요. 백현씨라면,
"제가, 그럴 이유가 있나요?"
-....
제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요.
마치 방어기제처럼 튀어나온 말에 준면은 말이 없었다. 백현은 앞에 앉은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손님을 뵙는 중이라. 다음에 다시 전화 드릴게요."
-변백현씨.
"다음에요."
마치 도망치듯 전화를 끊었다.
백현은 제게 쏟아지는 남자의 시선을 받아내며 의연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어디까지 했죠?"
"...변 사장님과 변정현 전 상무님의 사이가 괜찮은지 물으려던 참입니다."
"아.... 글쎄요. 사실 형이라곤 하지만 텀이 많은 형제 사이이다보니 형제로써의 친밀감은 없는 편이에요. 조금 어렵고, 그렇지만 조금 특별한.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사이라고나 할까요."
"그럼 얼마 전 변정현 전 상무님의 수인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본인은 수인들을 위해 10년동안 봉사 활동을 할 정도로 애정이 각별한데, 형인 변정현씨는 수인 살인 미수로 검찰에 송치된 상황인데."
"...글쎄요. 제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럽네요."
백현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보이면서도 손에 쥔 핸드폰을 놓지 못했다. 제가 준 목도리를 손에 꼭 잡아쥐던 납작하고 동그란 손이 자꾸만 눈 앞에 아른거렸다.
-
준면은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잘근거렸다. 이 핑계 저 핑계대며 남자를 붙잡아놓고 싶은데 여유작작 미소를 지으며 앞에 앉은 남자는 앉자마자 경수를 불러달라 종용했다.
"그 아이를 볼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이거 왜 이러세요? 저 법적으로 무죄 판결 받고 나온 사람입니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거 법적 처벌도 가능한 거 아시죠?"
"뻔뻔하시네요."
"살면서 안 뻔뻔하면 먹고 살기가 힘들어요. 안 그래요?"
"...."
"디오는, 아직 멀었습니까?"
다리를 꼬고 앉아 발끝을 흔들자 준면의 인내심도 그와 같이 흔들렸다. 준면은 울컥 치미는 화를 참으려 애쓰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마음같아선 썩 꺼지라고 소리치고 싶다. 하지만 그는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이미 무죄 판결을 받았고 준면으로써는 그를 막아설 명분이 없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준면은 저를 경계하던 경수의 커다란 눈을 떠올렸다. 상처입은 아이의 눈은 언제나 빛을 잃은 채였다. 아무런 희망도, 목적도 없이 그저 살아있기에 살아가는 것만 같던 그 죽은 눈이 이제야 조금 빛을 찾았는데. 백현을 쫓아 연신 바쁘게 움직이던 커다란 눈은 조금씩 생기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게 보기 좋아서, 그게 너무 좋아서 일부러 경수를 백현의 곁으로 밀어넣고 모른 척하기도 했다. 조금씩 거리를 좁혀가는 경수를 보며 몰래 미소를 지었고 그런 경수를 못 본 척 흘깃거리는 백현을 기쁘게 생각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러지 말았어야 했던 걸까.
준면은 남자의 재촉에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아직 수료 중인 교육이 남았습니다. 그거라도 다 받고,"
"아 글쎄 그런 걸 왜 받냐니까?!"
"부탁드립니다."
준면은 남자를 무시한 채 꿋꿋하게 검찰 측 남자를 바라봤다. 서류 절차 진행을 위해 동행한 남자였는데 일단 남자가 경수를 데려가는 과정 또한 남자가 진행해야 해서 그의 의견이 중요했다. 제발. 준면은 필사적인 눈빛을 남자에게 보내며 조금만 시간을 끌어달라 빌었다.
"...어, 그치만 그건 센터 내 수인만 받는 교육이고, 이제 주인이 다시 오셨으니까 그런 교육은 딱히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이 개새끼가.
준면은 한순간에 표정을 굳히고 남자를 노려봤다. 멍청한 새끼. 눈 앞의 남자가 경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저 절차만 씨부리는 반푼이가 분명했다. 준면은 이를 아득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지만 수인들에게 필수적인 교육을,"
"아 왜 안 데려오는데?! 혹시 디오한테 무슨 짓 한 거 아니야?!"
"뭐라고요?"
"뭐가 찔리지 않고서야 애를 왜 안 보여주냐고."
"그게 무슨-"
"그렇잖아. 내가 주인이고, 주인이 와서 데려간다는데 왜 애를 보여주지도 않냐고. 혹시 애한테 무슨 짓 한 거 들킬까봐 이러는 거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린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하고. 일단 나는 디오 얼굴 봐야겠으니까 디오 좀 데려와."
이제는 완전히 제 본색을 드러낸 남자가 사납게 이를 세우자 옆에 앉은 멍청한 남자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더럽다, 진짜. 준면은 주체 없는 욕을 짓씹으며 힘없이 고개를 돌려 호출 버튼을 눌렀다.
"종인씨."
-네.
"...디오 좀 소장실로 부탁해요."
짧게 떨어지는 대답에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 남자의 얼굴이 보기 싫다. 준면은 경수의 커다란 눈을 떠올리며 절로 고개를 숙였다.
-
혹시 백현이 온 것일까.
저를 부르는 직원의 목소리에 경수는 문득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무뚝뚝한 말투와 퉁명스런 얼굴을 하곤 했지만 민감한 수인들이 그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두려워하는듯 하면서도 은근히 백현 주위를 맴돌던 다른 수인들도 경수와 마찬가지였다. 아닌 척, 수인들에게 눈길을 주던 백현은 그 누구보다 다정했다. 약한 아이들에겐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였고 수인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대하는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그들을 존중해준다는 것이 눈에 보여 모두들 백현을 좋아했다. 말은 안 했어도 백현이 마지막으로 오던 날, 모든 수인들이 조금 우울해했다는 것은 인간들 빼고는 모두 아는 이야기였다. 경수는 저도 모르게 목에 두른 목도리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온 걸까? 무슨 이유에서라도 좋으니 그가 온 것이면 좋겠다. 제대로 된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가버린 백현이 아쉬웠다. 물론 경수는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그와의 만남에 겨우 용기내어 제 이름을 알려준 것이었지만. 제 머리를 쓰다듬던 그 길다란 손가락이 여직 머리칼을 스치는 기분에 괜히 머리를 만지작거린 경수가 소장실 문 앞에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똑똑-
단정하게 울리는 노크 소리에 잠시 조용하던 안에서 준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제 손으로 열리는 문 틈 사이로 보이는 수트 차림에 역시나 백현이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다. 한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는데. 조금 설레는 기분도 들었다. 경수는 평소보다 상기된 얼굴로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기 무섭게 선명해지는 인영은 자신이 생각한 인물이 아니었다. 목도리를 조물거리던 손이 덜덜 떨리자 그 목도리에 둘러싸인 제 머리도 덜덜 떨리는 것 같았다. 아니, 이제보니 온 몸이 다 떨리고 있다. 경수는 공포와 혼란에 휩싸인 얼굴로 소파에 앉아 저를 보며 미소짓는 남자를 바라봤다.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정말로, 나는 정말로-
이리 오라며 손짓하는 남자의 얼굴에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아니야, 이러지 말아줘.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절망어린 얼굴이 절로 준면을 향해 돌아갔다. 그때 나를 구해줬던 것처럼, 제발 이번에도.
그러나 저를 보는 준면의 시선은 그저 안쓰러움과 미안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저를 도와주지 못하리라는 것이 선명히 드러난 그 얼굴의 죄책감과 고통에 경수는 체념한 얼굴로 더듬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언제까지고 따뜻하게 제 목을 감싸주었던 목도리인데, 이것이 곧 제 목을 틀어쥘 목줄이 될 것만 같아 목이 답답해졌다.
"일단 다시 한번 서류 확인 좀 부탁드릴게요."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려 애쓰는 준면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지만 미봉책으로 그치고 말 것을 알았다. 경수는 무력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단 몇분 사이에 생기가 돌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이미 한번 절망을 겪어봤던 아이는 희망이란 끈을 쉽게 놓았다. 귀찮게 군다는 듯 투덜거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짜증이 가득했지만 이번에는 준면의 편을 들어준 직원의 말에 남자는 결국 서류를 재검토하며 사인을 진행했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덜덜 떨리는 손을 꾹 쥔 경수는 그저 다가올 고통의 시간들을 담담하게 기다릴 뿐이었다. 아무리 시간을 끈다해도 한계가 있었다. 이미 확인했던 서류인만큼 남자는 재빠른 손길로 확인해야 할 부분만 다시 체크하며 서류를 넘겼고 준면은 그를 말릴 수 없었다.
"아이가 경계가 심한 편이에요. 청각이 발달해서 소리에 민감하고, 특히나 문 같은 걸 세게 닫는 걸 싫어하니까 꼭,"
"그런 건 주인인 내가 알아서 할테니 신경 끄쇼."
"...."
"서류도 다 봤고 설명은 들어봤자 다 아는 내용이니 이제 가도 되겠죠?"
여유로운 남자의 목소리가, 제 끝을 예고한다. 경수는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은 채 제게 목도리를 매주던 백현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실은, 사실은 좋았는데. 퉁명스러운 체 하면서도 저를 챙겨주는 행동도 아닌 척 저를 쫓던 그 시선도 다 좋았는데. 정말 좋았는데.
"가자."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듯 전보다 다정한 남자의 목소리가 더 두려웠다. 경수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남자의 뒤를 따랐다. 다가오지 못하는 스스로가 괴로운듯 잔뜩 구겨진 얼굴로 저를 보는 준면에게 마지막으로 허리를 숙이고, 문을 닫았다. 차가운 금속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기 무섭게 경수의 목도리를 잡아챈 남자가 경수의 목덜미를 잡아채듯 마구잡이 손길로 목도리를 잡아당겨 풀어냈다.
"이딴 건 어디서 나서 하고 있어?"
금세 본색을 드러낸 남자가 짜증을 숨기지 않은 채 목도리를 집어던졌다. 제가 새긴 흉터가 보이지 않은 것이 못마땅했는지, 훤히 드러난 경수의 목을 잘 보기 위해 턱까지 추켜올린 남자는 꾸준한 관리로 흐려진 흉터를 보고 작게 혀까지 찼다.
"다 없어졌네."
"...."
"집에 가서 다시 새겨야겠다. 그치?"
흉터를 더듬는 손길이 차갑다. 남자의 손이 차가운 건지, 경수가 느끼는 온도가 차가운 것인지는 가늠이 어려웠다. 경수는 그저 눈을 질끈 감은 채 두려움을 삼키려 애썼다. 그러나 경수의 침묵이 탐탁치 않은 듯 대번에 험악한 얼굴을 한 남자가 경수를 위협하듯 몸을 돌렸다.
"대답 안 해?"
"목도리는."
아아.
감았던 눈이 절로 떠졌다.
갑작스런 목소리에 몸을 돌린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바닥에 떨어진 목도리를 주워드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경수는 이미 손톱 자국이 새겨진 손바닥에 다시 한번 손톱을 박아넣었다.
"그쪽한테 준 게 아닌데."
"누구시죠?"
깔끔하고 고급스런 차림새에 백현의 정체를 가늠하듯 하던 남자가 꽤 정중한 태도로 말을 걸었다. 그러나 백현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성큼성큼 경수를 향해 걸어왔다. 뚜벅뚜벅, 구두 소리가 조용한 복도를 울리며 조금씩 조금씩 커졌다. 경수는 작은 행동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 일련의 행동들을 바라봤다. 눈에 보이지 않은 먼지가 묻기라도 했다는 듯 조금 성의없는 손길로 목도리를 털어낸 백현이 손을 뻗어 경수의 목에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아직 춥다."
"이보세요."
"목도리 꼭 하고 다녀."
"제 말 안 들립니까?!"
신경질적인 남자의 말에 다정한 빛을 띄던 백현의 얼굴이 가라앉는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백현은 냉기가 감도는 얼굴로 남자를 바라봤다.
"안 들리는 척 하고 있는데 모르셨습니까?"
"뭐라고요? 이봐요!"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 남자를 무시한 백현이 조심스런 손길로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는 경수의 손을 덥석 잡아쥐었다.
"가자."
"...."
"경수야."
다정한 목소리에.
저를 부르는 그 달콤한 이름에.
커다란 눈이 좀 더 크게 뜨였다. 경수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 백현을 바라봤다. 저를 보는 눈이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저를 향하고 있었다. 아주 단단하고, 아주 따뜻하게.
경수는 제 손을 잡아쥔 백현의 손가락을 어설픈 손짓으로 마주 잡았다.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인 백현이 경수의 손을 이끌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엄연히 얘는 제 소유,"
"아까 한 질문 답해드릴까요?"
따뜻할까, 상상만 해보던 백현의 손은 상상만큼 따뜻하고 말랑했다. 경수는 제 손을 잡아쥔 백현의 손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겨우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남자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춰선 백현이 여유있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 아이를 '경수' 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B그룹의 차남 변백현이라고도 불리죠.
부드럽게 눈을 접어 웃는 얼굴은 다정함을 표방한듯 했지만 맹수가 이를 드러내기라도 하듯 날카로웠다. 남자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백현이 천천히 표정을 굳힌 채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경고, 또는 위협. 날이 선 분위기를 굳이 숨기지 않은 백현은 경수의 손을 고쳐잡으며 몸을 돌렸다. 타닥타닥, 백현의 발소리에 맞춰 들리는 경수의 발소리가 제법 가벼웠다.
"...."
정신없이 차를 재촉해 뛰다시피 달려들어가더니, 결국에는 수인의 손을 잡고 나오는 백현의 모습에 눈썹을 치켜뜬 민석이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아이를 먼저 태우고, 저도 차에 올라탄 백현은 충동적이었던 제 행동에 마음이 복잡한듯 연신 한숨이었다. 경수는 가만 백현의 눈치를 보았다. 여직 손을 놓지 않은 백현이 고맙기도 하고, 기분 좋기도 했다. 따뜻한 체온을 좀 더 느끼고 싶어 숨조차 죽인 채 가만 닿은 손에 열중하는 사이, 숙여진 머리를 가만 내려다보는 백현의 얼굴은 조금씩 체념의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래, 요새 수인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내가 안 갔으면 그 새끼한테 끌려가서 또 무슨 짓을 당했을거야. 어차피 또 여기로 돌아왔을지도 모르는데.
폭력에 짓밟힌 채 도망도 포기한 경수의 모습을 상상한 백현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이번엔 다를 거야. 그렇게 되지 않을거야. 지금은 그 때와 달리 힘도 가지고 있고 제 사람을 움직일 줄도 안다. 그러니까.
갑작스레 제 손을 꾹 잡아쥐는 것에 당황한 경수가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떠보이며 눈을 굴리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백현이 경수의 손에 깍지를 꼈다.
지킬거야.
반드시.
-
한번 마음을 열기로 하자, 굳게 쌓아놓았던 둑이 터진 것마냥 속에 눌러 감췄던 애정이 넘쳐 흘렀다. 백현은 여전히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얼굴로 아닌 척 집을 둘러보는 경수의 뒷통수를 살살 쓸어내렸다.
"집 구경 할래?"
"...."
센터에서 무작정 경수를 데려왔던 게 벌써 열흘 전이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 자리에 못 박힌 것마냥 앉아서 눈만 굴리고 백현만 바라보던 경수가 이제 슬슬 다른 것에 흥미가 생기는지 아닌 척 눈만 돌려 집 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모습에 백현은 모른 척 지나가듯 제안했다.
구미가 당기는 듯 커다랗게 뜨인 눈이 올곧이 저를 향해 돌아오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 백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아이는 당연하다는 듯 그런 백현의 옆으로 다가섰다. 매일 뒤에서 백현의 발걸음을 쫓기만 하던 아이가 열흘 새 보인 장족의 발전이었다.
제 곁에 다가선 아이의 존재가 기꺼워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어보인 백현은 경수를 이끌고 이 방, 저 방 문을 열고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저도 필요한 방에만 들어갈 뿐이지, 제대로 집 안 곳곳을 둘러본 적은 드물어서 경수에게 이렇다 할 소개의 말을 해줄 만한 게 없었다. 결국 사이좋게 손을 잡고 길게 늘어진 방문만 열어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작은 행동이 기분이 좋아서, 백현은 자꾸만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별 다를 것 없는 방문을 열때마다 귀를 쫑긋거리는 경수 탓이었다.
귀여워.
절로 나오는 말을 중얼거리며 경수의 귀를 바라본 백현이 당장이라도 그것을 쓰다듬고 싶은 마음에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이사님."
물론 저를 찾아온 민석으로 인해 그 짧은 산책도 끝이 났지만.
"...."
경수는 민석을 좋아하지 않았다.
민석이 경수에게 냉정하게 대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어쩔 땐 민석이 백현보다도 세심하게 경수를 챙겼다. 눈치가 빠르고 기민한 편이라 민석이 저를 신경쓰는 것을 모를 리 없는 경수가 민석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지난 번에 미루셨던 인터뷰 오늘 3시로 잡혀있습니다. 저녁에는 A그룹 상무님과 저녁 약속 있으시고요. 8시에는 다음 달 출시 예정인 핸드폰 마케팅 관련 회의가 잡혀있습니다. 결재하실 서류는 가시는 동안 체크하도록 챙겨왔고요."
민석이 매번 백현을 뺏어가기 때문에.
백현은 눈치를 보듯 흘깃 경수를 바라봤다. 수인답지 않게 감정 표현이 극히 적은 아이는 낯선 사람을 마주할 때면 백현의 뒤로 한걸음 물러서서 조용히 사람을 파악했지만 민석이 오는 날이면 백현의 소매깃을 꼭 붙잡고 입술을 내밀었다. 물론 워낙에 표정 변화가 없어 입술이 나온다는 것도 처음 며칠동안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제 나름 보이는 서운한 기색이 이렇게 사랑스러워도 되는 걸까. 수인을 애지중지 키우는 사람들의 심정을 실감하며 여지없이 제 소매를 쥐어잡은 경수의 손을 내려다 본 백현이 금방이라도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기 위해 입술에 힘을 주었다.
처음에는 제가 무슨 죄를 지었냐며 억울해하던 민석도 저를 볼 때마다 경수가 입술을 내밀자 그 귀여운 모습에 괜히 더 백현을 재촉하곤 했다.
"다녀올게."
"...."
심통난 얼굴에 참지 못하고 머리를 쓰다듬자 경수의 인상이 슬쩍 구겨진다. 머리 쓰다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경수는 백현의 손이 제 머리나 귀에 닿을 때마다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면서도 그 손을 뿌리치진 않았다. 백현의 손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손길을 수용하는 듯한 태도에 백현은 경수가 제 귀를 만질 때마다 질색하는 것을 알면서도 손을 떼지 못했다.
집을 나서는 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현관에서 인사만 십분을 넘게 했다. 결국 이젠 진짜 시간이 없다며 시계를 보던 민석이 백현을 질질 끌어내서야 겨우 집을 나섰다.
"아주 좋아 죽네."
"...좋은 것 같아."
"좋은 것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좋은 거야. 백현아, 넌 네 얼굴 못 봤지? 경수씨만 보면 너 입꼬리가 귀에 걸려서 내려오질 않는다."
"...응."
사실 좋아.
백현은 하도 웃어서 얼얼한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작은 소리라 듣지 못한 듯 민석이 별다른 대꾸없이 서류를 뒤적였다. 집이 그리워지는 유일한 이유가 생겼다.
-
"반갑습니다, 박찬열입니다. 지난 번에 한번 인터뷰했었는데, 기억하시나요?"
"네. 기억합니다. 지난 번엔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급한 일이 있으셨던 것 같은데, 잘 해결되셨습니까?"
"다행히도요."
간단히 악수를 한 뒤 자리에 앉으며 미소를 짓자 찬열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예전이랑 분위기가 조금 달라지신 것 같네요."
"그런가요?"
"특별한 일이라도 있으셨나봐요?"
"아니요, 그냥."
"...."
"그냥...."
수인 아이를 들였어요.
저도 모르게 떠오른 경수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백현은 스스로도 너무 달라진 제 모습이 낯설어 괜히 입가를 가렸다. 조금 놀란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찬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축하인사를 건넸다.
"기쁜 소식을 듣게 돼서 기쁜데, 제가 드릴 질문이 좋은 분위기를 망치겠군요."
"제 형에 대한 질문입니까?"
"아니요. 물론 그것도 있지만, 요새 기자들 사이에서 은근한 소문이 돌고 있어서 말입니다. B그룹의 차남 변백현이 T기업 자제가 키우던 수인을 강제로 뺏었다는 소문이요. 알고 계셨습니까?"
"T그룹 자제요?"
백현은 순간 경수의 턱을 함부로 쥐던 남자를 떠올렸다. 그 아이의 목에 새겨진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만든, 그 자.
싸늘하게 굳어진 백현의 표정을 눈치챈 찬열이 손에 쥔 만년필을 버릇처럼 돌렸다.
"누군지 압니다. 그 아이를 학대해서 구속됐었는데, 풀려났다고 들었습니다. 아이가 보호소에 있는 동안 제가 아이를 제 수인으로 등록했는데 그런 소문을 만들고 다니는 줄은 몰랐군요."
"자세한 얘기를 해주실 수 있습니까?"
"아이가 겪은 고통을 함부로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모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사장님께서는 제가 가진 권력으로 수인을 빼앗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을 피해자로 잘 포장하고 있고요."
"...."
"혼자 결정하기 그러시면 일단 그 수인 아이와 한번 얘기를 나눠보시고 말씀해주십시오."
이제야 겨우 마음을 열고 저를 표현할 줄 알게 된 아이에게 과거의 고통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백현은 어두워진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성의없는 동작이었는데도 찬열은 가벼운 미소를 띄며 수첩을 넘겼다.
"다음에 드릴 질문도 좋은 질문은 아니라 죄송하네요. 수인 살인 미수로 구속됐던 변정현 전 상무 이사가 오늘 풀려난다고 하던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벌써 그렇게 됐었나.
반사적으로 민석을 쳐다보자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백현은 자세를 고쳐앉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형님의 일에 대해선 저 또한 깊은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형님께서 풀려나시는 것에 대해서는 제가 감히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스스로 부끄럽지 않으시다면 앞으로 맡은 바 소임을 하시는데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죗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고 나온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듣기로는 죽은 수인과 같은 종의 수인을 재입양하기 위해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고 하던데, 아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깍지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결국 죽었나. 정현이 구속될 당시 이번주를 넘기기 힘들다던 수인은 2주를 연명했다. 제법 상태가 좋아져 중환수인 병동에서 나왔다고 들었는데, 그 뒤로는 소식을 듣지 못했었다. 민석이 딱히 소식을 전하지 않아서 그럭저럭 치료를 잘 받고 있는 줄 알았는데. 죽어서 제게 소식을 전하지 않았던 건가보다.
순간적으로 눈가에 어른거리는 밀빛 머리칼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린 백현이 고개를 저었다.
"몰랐습니다. 형님께서 수인을 입양하신다고 하면 최대한 만류해보겠습니다. 많은 분들께 심려를 끼친 것 같아 마음이 안 좋군요."
바쁘게 울리는 진동에 고개를 숙인 민석이 자리를 비우자 만년필을 돌리며 수첩에 무언가를 적던 찬열이 흘깃 민석이 빠져나간 문을 바라봤다.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질문입니다만."
"...."
"지금 입양하신 수인, 많이 아끼십니까?"
"그게 왜 궁금합니까."
"T기업의 자제는 예전부터 암암리에 수인을 학대하는 것으로 아주 유명했습니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수인을 데려다 제 입맛대로 키운다고요."
"...."
"수인들은 학습됩니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요. 그가 매를 들면 무릎을 꿇고 죄를 빌죠. 그가 바지 버클을 두드리면 다가와서 그의 페니스를 빨고 그가 손뼉을 치면 엎드려서 스스로 다리를 벌린답니다."
"박 기자님."
"그렇게 하도록 교육받았고 강요받았으니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어나서 배운 거라곤 그것뿐인 거에요. 할 줄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오직 그것 뿐이니까."
"...."
"그 남자가 저지른 짓을 밝히려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는데 기사를 내는 건 실패했습니다.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요."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습니다."
"왜 상관이 없습니까."
"...."
"디오."
"...!"
"그 남자가 길들이는데 실패한 유일한 수인입니다. 바지 버클을 두드리면 뒤로 물러섰고 손뼉을 치면 도망을 쳤답니다. 단 한번도, 그의 명령을 들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잠시 채우는 목줄을 성체가 될 때까지 풀지 않은 것도, 그 아이의 몸에 남은 수많은 상흔들도모두 그 아이가 반항한 것에 대해 내린 벌입니다."
"몸에, 상흔이요."
백현은 경수의 목에 남은 깊은 상처를 떠올렸다. 지금은 꾸준한 치료와 관리를 통해 많이 호전됐지만 완전히 지워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던 그 끔찍한 과거의 낙인. 목줄을 풀어주기 위해 다가갔던 사람들을 보며 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침내 끊어지는 목줄은 네게 어떤 의미였을까. 어쩌면 기쁨보다는 오히려-
"이번에 그 남자가 체포됐던 것도 우연은 아닙니다. 아이가 반항을 하던 것을 우연히 자택에 방문했던 손님 중 한명이 발견하고 신고했다고 하죠."
힘없이 눈을 감는 너를 보며,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도 피하지 않는 너를 보며 나는 너의 한심함을 한탄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수인, 덜 떨어진 수인이라고. 도망치면 될 걸 왜 도망치지 않냐고. 왜 멍청하게 가만히 있기만 하냐고 욕했다.
...너는 이미 모든 반항을 했는데.
"아이는 그가 죽이지 않은 유일한 수인입니다. 아니, 죽이지 못한 수인이라고 할까요? 워낙에 손속이 사정없는 자라 하루만에 죽어나가는 수인들도 한둘이 아닙니다. 아이는 그 폭력을 견뎠고, 살아남았습니다. 듣기로는 아이가 희귀한 종이라 나름 손속에 사정을 뒀다고 들었습니다만, 일주일만에 수인 넷을 죽였던 남자가 사정을 두면 얼마나 뒀을지. 별로 믿음가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째서 그런 사람이."
끔찍했다. 백현은 마른 세수를 하며 들끓는 속을 잠재우려 애썼다. 그런 백현의 얼굴을 머리카락 하나까지 샅샅히 살피던 찬열이 부러 담담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였다.
"대체로 그 자가 들이는 수인들은 유기 수인들이 많습니다. 정식 등록을 하지 않고 키우다가 버리거나, 키우던 수인이 낳은 것을 책임질 생각이 없어 갖다 버리면 그 새끼들을 모아서 들여오죠. 어쩔 땐 유기 수인들끼리 강제로 짝짓기를 하도록 해서 새끼를 만들기도 합니다. 남자가 후원하는 유기 수인 보호소 중 하나가 이 모든 일을 총괄하고 있죠."
"...씨발."
참을 수가 없었다. 백현은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터져나오는 욕설을 뱉어냈다. 무언가라도 토해내야 속이 좀 깨끗해질 것 같았다. 너무 더러운 것들을 많이 보고 들은 기분이었다. 경수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의 교육을 받은 수인들 중 절반은 그의 자택에서 죽고 남은 절반 중 일부만 그의 자택에 남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수인 쇼핑몰로 이동하는데, 어차피 정식 등록이 되지 않은 수인들이니 흔적도 없고 증거삼을 것도 없죠. 제가 의문인 건, 그 아이는 제법 오랜 기간동안 그의 교육에 반항했음에도 계속 자택에 남았다는 겁니다. 심지어 그는 아이를 정식 등록까지 했어요. 대체 그 남자가 왜 그 아이에 그렇게 집착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아니요. 궁금하지 않습니다. 하고자 하는 말의 뜻은 알겠지만 굳이 그걸 알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군요."
"변 사장님."
"인터뷰는 충분했던 것 같은데, 이만 나가주시죠."
"그 남자는 생각보다 악질인 사람입니다."
"나는 뭘로 생각하는지 모르겠군요."
"...."
"수인이니 뭐니 하는 것들에 관심 끄고 있으니 이쪽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얼뜨기로 여기는 모양인데, 나는 관심 없는 것에 굳이 힘을 쏟지 않은 것 뿐입니다. 경수를 책임지기로 한 이상. 경수가 수인인 이상. 나한테 수인이라는 건 더 이상 별개의 일이 아닙니다. 관심없는 주제도 아니죠."
"...."
"뭘 걱정하는진 모르겠는데 그 걱정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씀드리죠."
백현은 손수 찬열을 배웅했다. 직접 손잡이를 잡아 문까지 열어주자 혼란스러운 얼굴로 수첩을 만지작거리던 찬열이 제쪽으로 다가왔다.
"군림하지 않을 뿐, 왕이라는 거군요."
"아니요."
"...."
"겨우 왕 따위 일리가."
마주하며 웃는 얼굴이 섬짓했다. 찬열은 손에 쥔 수첩이 구겨지는 것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자신감이 근거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할 말이 없었다. 그 수인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되려나. 조금 마음을 놓으며 수긍한 찬열이 좀 전보다 공손한 태도로 목례를 했다.
"백현아!!"
다급한 민석의 목소리만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끝이 날 하루였다.
-
혼자 있는 집은 외로웠지만 그래도 좋았다.
집안 곳곳에는 백현의 향이 깊게 배어있어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백현의 품에 안긴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백현에게 허락을 받지는 않았지만 백현이 없으면 종종 그의 침대에 누워 하루종일 몸을 부비기도 했다. 제 것이라는 표식을 남기는 것인데, 백현의 집에는 다른 수인들이 없어 그닥 소용없는 행동이긴 했다. 하지만 그 침대에서 자고 일어난 백현의 몸에는 제 냄새가 가득 배어있어 기분이 좋았다. 경수는 아침에 막 일어나 거실로 나오는 백현을 제일 좋아했다. 제 냄새가 가득 묻은 채 제 머리칼을 헝크러트리는 그 다정한 온기를.
오늘은 백현이 즐겨앉는 소파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심심할까봐 티비를 틀어주긴 했지만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없어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아직 경계심이 많이 남은 상태였기에 집안일을 돕는 여섯명의 직원은 백현과 민석이 있을 때만 출입했다.
덜컹-
그러니까, 이 시간엔 올 사람은 없는데.
경수는 귀를 쫑긋 세우며 몸을 일으켰다. 경수가 있는 곳은 1층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백현의 방이라 들어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니, 백현이 유일했다. 그런데 지금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발소리는 정확히 백현의 방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백현의 발소리가 아닌데. 백현이의 냄새가 아닌데.
경수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불안하게 발을 놀리며 문을 주시했다. 발소리는 망설임이 없었다. 경수는 몸을 숨길 곳을 찾아 침대 뒤에 주저앉았다. 혹시라도 제게 위협을 가할까 온 몸의 털을 세우자 이내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다. 철컥,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조금씩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경수는 아주 느리게 벌어지는 문 틈 사이에 온 신경을 집중한 채 경계했다.
"...넌 누구니?"
손자국이 잔뜩 남도록 시트를 쥐고있던 손에 힘이 탁 풀렸다. 경수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백현과 꼭 닮은 눈매를 가진 사내였다.
-
손이 덜덜 떨렸다. 벌써 몇번이고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렸는데도 습관적으로 손이 올라갔다. 백현은 엄지를 잘근거리며 서두르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백현이 재촉하지 않아도 민석은 이미 최대한의 속도를 내려 애쓰고 있었다. 위태로운 운전이 계속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 위험성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급했다. 백현은 또다시 머리를 쓸어올렸다.
'변정현이 집으로 오고 있대.'
본가로 간다면 민석이 호들갑을 떨 리가 없었다. 백현은 그 말을 듣자마자 옆에 있던 찬열을 밀치고 무작정 달려나갔다. 뒤늦게 백현을 쫓은 민석이 차키를 챙기지 않았다면 아마 뛰어서라도 집에 갔을 것이다. 백현은 창백해진 제 안색을 느끼지 못한 채 불안에 떨었다. 구속에서 풀려났으면 집에 가서 회장님 기분이나 풀어줄 것이지. 기자들을 의식한 그가 제 잘못을 진심으로 참회하느니 어쩌느니 하며 제 집으로 올 줄은 몰랐다. 아마 친親수인 이미지를 구축한 자신과 돈독한 모습을 보여줄 요량으로 이런 생각을 한 모양인데 가당치도 않았다.
자신은 정현이 구속되어 있는 동안 그와의 나이차를 강조하며 어색한 형제 사이를 은연중에 내보였다. 그와는 다른 성향의 사람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와 돈독한 형제인 척을 해? 웃기지도 않았다. 실제로도 사이가 좋지 않은 형제 사이였다.
어린 시절에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하여 본 척도 하지 않더니, 제가 어느 정도 자라고 나선 경쟁자로써 저를 의식하고 경계했다. 저를 곤란한 상황에 빠트린 채 즐거워하던 모습을 제가 잊을 리 없었다.
백현은 다시 한번 민석을 재촉했다. 집이 가까워지니 마음이 더 급해졌다. 집에는, 오직 경수만 있었다. 아직 경계를 완전히 풀지 못한 아이를 위해 수행인들은 백현이나 민석이 있는 시간에만 집안일을 처리했고 그 외에는 모두 수행인 전용 건물에서 머물렀다. 혹시 생길지 모를 일에 대비해 곳곳에 CCTV를 설치해놓고 경호원들이 감시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상대는 변정현이었다. 수행인들이 그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침내 차가 집 앞에 다다르자 백현은 민석이 미처 브레이크를 다 밟기도 전에 차 문을 열었다. 놀란 민석이 곧바로 브레이크를 밟은 채 백현을 불렀지만 돌아본 뒷좌석에는 백현이 없었다. 민석은 시동도 끄지 못한 채 차에서 내렸다. 달려온 직원에게 차키를 던지듯 내맡기며 백현의 뒤를 쫓자 저만치 멀어진 백현이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
백현은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쉬지 않고 뛰었다. 몇번의 헛손질 끝에 현관문을 열자 고요한 거실이 곧바로 눈에 보였다. 백현은 곁눈질로 경수의 흔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곧장 제 방으로 향했다. 경수는 모르겠지만, 설치된 CCTV를 통해 경수의 하루 일과가 실시간으로 백현에게 알려졌다. 경수가 하루동안 제일 많이 머무는 곳이 자신의 방이라는 것을 백현이 모를 리 없었다. 백현은 덜덜 떨리는 손을 몇번이고 쥐었다 펴며 반쯤 열린 제 방문을 밀어젖혔다.
"경수야!"
기다렸다는 듯 아이가 달려온다. 백현은 경수의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온 힘을 다해 아이를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아이의 온기가 느껴지자 그제야 안심이 됐다. 품에 안은 아이의 뺨에 몇번이고 입을 맞추자 당황한 아이가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백현의 어깨를 밀어냈다. 미약한 손짓이라 거부라고 느끼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백현은 기꺼이 아이의 뺨에 쏟아붓던 입맞춤을 멈추었다.
"보기 좋네."
"...변정현."
"나 없는 새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길래 수인을 들였어?"
"나가."
"예전에 그 아이 이후론 수인은 보는 것도 싫어했잖아."
"나가라고."
"화 내지마. 안 그래도 오늘은 소란 피울 생각 없으니까."
"...."
"경수야. 나중에 보자?"
"나중에라도 볼 일 없어. 너 같은 새끼랑은."
"서운하게 왜 그래. 형제끼리. 너 없는 사이에 경수랑 대화도 얼마나 많이 했는데?"
"끌려나갈래?"
"알았어, 임마. 나가면 될 거 아니야."
결백하다는 듯 양손을 들어 흔드는 것에 경수를 제 품에 당겨 그를 보지 못하게 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차라리 경수가 그를 무시하거나 그에게서 도망쳤다면 모를까, 그와 대화를 나누다니.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 친해지기라도 했나. 불안했다.
백현은 저를 지나치는 정현의 발소리에 집중하며 귀를 쫑긋거리는 경수의 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아."
근데 백현아.
"예전에도 그렇고, 넌 변함이 없다."
"...뭐?"
"지키고 싶으면 잘 숨겨야지. 그렇게 티를 내면 어떡하냐. 다 보이잖아. 지금 네 약점이 그 수인이라는 거."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백현은 빳빳하게 굳은 몸을 돌려 정현을 바라봤다.
"하긴, 넌 예전부터 그랬지. 그 여우 수인. 이름이 미, 뭐였는데. 아무튼 걔. 걔 살리겠답시고 뒤에서 수작부리는 거 우리 다 알았잖아."
"...."
"너는 정말 걔가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밀빛 머리카락. 제발 나가라고 울며 소리치던 저를 끌어안은 채 가만 고개를 젓던 수인. 목소리를 낼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은 주제에,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기어코 제 뺨의 눈물을 닦아주었던 손.
모든 것들이 주마등처럼 지나쳤다. 재촉하는 자신에게 미소를 지어줬었다. 마지막이 될 것을 알면서도 정현을 따라가면서, 그는 끝까지 백현을 향해서 웃어보였다. 끝까지. 마지막까지.
백현은 품에 안았던 경수를 천천히 밀어냈다. 분노로 눈 앞이 새하얗게 변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몸이 감당하지 못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백현은 단번에 정현에게 달려들었다.
죽여버릴거야.
죽일거야.
몇번이고 저를 돌아보던 수인을 향해, 저는 화를 냈었다. 멍청하다고, 도망치지 않은 네가 답답하다고 몇번이나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었다. 그런데, 그랬는데.
비참함에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백현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정현의 목을 틀어쥐었다. 벽에 밀쳐진 그가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벗어나려 애썼으나 놔주지 않았다.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백현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정현의 얼굴을 바라보며 좀 더 힘을 주었다. 뒤늦게 달려온 민석이 경호원 두어명과 달려들어 백현을 떼어놓으려 애썼으나 악에 받친 백현을 만류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백현아. 야, 변백현! 손 놔! 손 놓으라니까!"
차라리 정현을 죽이고 그에게 속죄하고 싶었다. 그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정현의 시체를 그에게 바치고 용서를 빌고 싶었다. 백현은 제 팔과 허리에 매달리는 이들을 밀어냈다. 정현을 죽이고 저도 죽고 싶었다. 살아있는 제가 끔찍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아예 눈이 까뒤집히는 정현의 얼굴을 노려보며 조금만 더, 라고 생각하던 순간. 백현은 제 시야 안으로 들어오는 하얀 귀를 발견했다.
"하지마."
제 허리를 끌어안은 아이가, 백현의 어깨와 목에 제 이마를 부볐다. 피부에 느껴지는 아이의 온기에 그제서야 이성이 돌아온 백현이 천천히 손에 힘을 풀고 뒤로 물러섰다. 얼마나 힘을 줬던 건지, 손이 하얗게 질려 핏기가 전혀 없었다. 백현은 덜덜 떨리는 손을 허벅지께로 늘어트리며 저를 끌어안은 아이를 내려다봤다.
"경수야."
"...가지마."
정현을 죽이고 스스로를 죽이려던 백현을 알았던 걸까. 아이는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되려 필사적으로 힘을 주어 당기는 것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통각을 느낀 백현이 겨우 손을 들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가지마."
"안 갈게. 잘못했어."
"가지마."
"응. 안 가."
너를 두고 가려 하다니. 반드시 지키겠다고 했던 너를 두고 가려고 하다니. 제 생각이 짧았다. 백현은 윤기가 나는 아이의 머리통에 연신 입을 맞추며 달래듯 속삭였다. 내가 잘못했어, 경수야. 나 안 가. 절대 안 가.
"가지마."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몇번이고 사과했다. 아이가 처음으로 제게 해준 포옹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
한번 아이의 온기를 느끼고 나니 떨어지기만 하면 아이의 온기가 그리웠다. 이른 아침, 오랜만에 알람없이 눈을 뜬 백현은 여직 피곤이 가시지 않은 눈가를 꾹꾹 누르다가 제 품에 안겨 잠들어있는 경수를 발견했다. 지난 번의 일 때문인지 경수는 저를 혼자 두려 하지 않았다. 커다랗게 뜬 눈을 반쯤 치켜뜬 채 잠들기 전까지 제 시야 안에 백현을 두려 하는 게 기분 좋으면서도 걱정 돼 몇번이나 괜찮다고 말해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고민하던 백현은 제 방에 침대 하나를 더 들였다. 제 침대에 함께 잠드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백현은 혹시라도 경수를 오해할 시선들이 싫었다. 그러나 그런 백현의 마음을 알 리 없는 경수는 새 침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뚱한 얼굴로 푹신한 매트리스를 꾹꾹 눌러댔다. 그러더니 밤이 되기 무섭게 백현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백현은 제게 안기는 경수가 반갑기도 했지만 걱정도 되어 적당히 밀어냈다. 그러나 설익은 잠에 들 때쯤이 되면 슬그머니 다가와 백현의 가슴팍에 머리를 콕 박는 것까지는 밀어낼 수 없었다. 커다란 눈을 꾹 감은 채 잠에 빠진 아이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백현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사장님."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오늘은 오후 출근하기로 했잖아."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아이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급한 일이 좀 마무리되기 무섭게 반차를 썼던 백현은 민석에게도 휴가를 주었다. 가능하면 며칠동안 쉬라고 권하고 싶은데 아직 밀린 일들이 많다는 걸 두 사람 다 알아서 민석은 그저 보너스나 두둑히 달라는 말로 괜찮다는 말을 대신했다. 오늘은 경수와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 출근할 생각이라 점심까지 집에서 먹고 갈 작정이던 백현은 부르지도 않은 민석이 제 집 거실에 앉아있는 것이 의아했다. 게다가 뜬금없이 내밀어지는 태블릿이라니. 백현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채고 표정을 굳혔다. 받아든 태블릿이 반갑지 않았다.
"...이게 뭐야?"
"어젯밤부터 갑자기 올라온 글입니다. 조금씩 퍼진 게 아니고 한번에 여기저기서 확산되기 시작한 걸로 봐선, 누군가 일부러 퍼트린 내용 같습니다."
백현은 소파에 앉아 팔걸이를 두드렸다. 툭툭,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손가락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민석은 백현의 얼굴을 살폈다.
"최근 형을 몰아내고 회사를 차지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는 B군의 행보가 도를 지나치고 있다. T기업 자제가 키우던 수인을 억지로 빼앗아 제 것으로 삼더니 그를 말리기 위해 찾아온 형을 무안주고 내쫓았다고."
"사장님."
"재밌네."
"...."
"아주 적당하게 섞었어. 나서서 잘라버리자니 내가 이 B군이라고 인정하는 꼴이고 그냥 두자니 이 내용을 묵인하는 꼴이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백현은 들고있던 태블릿을 내려놨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그 자를 잡아다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쉽게 죽일 자가 아니었다. 생명줄을 하나씩 잘라내 절벽에 몰아넣고 위태롭게 그러쥔 손가락을 하나하나 부러트려 절망을 주어야 했다. 아직도 아이의 목에 남아있는 그 깊은 상흔보다 더 지독한 고통을 주어야 했다. 백현은 잠시 고민했다.
"그냥 둬."
"그냥요?"
"갖잖은 수작질 부릴 여유가 많은 것 같은데, 바쁘게 만들어주면 되겠지. 거래처부터 잘라."
"네."
"C은행에 전화해서 약속 잡고."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든 민석이 전화를 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자 백현은 그대로 소파에 몸을 기댔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경수의 목에 있는 상처는 가려지지 않아 본다지만 몸에 있는 상처는 본 적이 없다. 경수의 허락 없이 함부로 그의 몸을 확인하고 싶지 않기도 했고 그 몸에 남았을 흉터를 보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쉰 백현은 이마를 짚었다. 얼마나 많은 흉터가 남았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그 새끼가 너한테,
"...."
대체 무슨 짓을 했을까.
소리없이 벌어진 문 사이로 동그란 눈을 잔뜩 치켜뜬 경수가 얼굴을 드러냈다. 백현은 멍하니 저를 노려보는 경수를 바라봤다. 어쩐지 조금 화가 난 것 같은데. 화날 일이 있던가.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예민하게 날이 섰던 탓인지 정신이 멍했다. 백현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제보니 입술도 조금 나왔는데.
"거짓말 했어."
"...응?"
"안 간다고 해놓고."
미워, 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에 벌어진 입이 닫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백현은 천천히 허리를 세워 바로 앉았다. 경수야 하고 부르자 양 뺨이 부풀어오른 경수가 고개를 돌렸다. 평소와 달리 제게서 떨어져 앉는 것이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웃으면 안 되는데,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백현은 허겁지겁 제 얼굴을 가렸다. 귀여워.
"일어났을 때 없어서 놀랐어?"
겨우 마음을 추스리고 말을 걸자 아이의 눈이 제게 향했다. 백현은 달래듯 미소를 띠었다. 경수야. 재차 부르자 매섭게 올라갔던 아이의 눈이 조금 누그러졌다. 백현은 때를 놓치지 않고 경수의 손을 잡았다.
"자는데 깰까봐. 곤히 자는 거 깨우기 싫어서 그랬어."
"...."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말이 적은 아이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제 마음을 표현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 버릇한 탓인지, 소리를 내는 게 낯선 것인지 아이는 언제나 그랬다. 백현은 그런 아이가 어렵기도 했고 더 가깝기도 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아이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지만 슬금슬금 다가와 어깨를 부딪히는 것을 보면 아이의 마음이 더 선명히 느껴졌다. 백현은 제게 기댄 아이의 어깨 위로 고개를 기울였다.
"졸려?"
기울인 것이 고개였는지 마음이었는지. 제게로 쏟아지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가 다정히 묻는 것이 너무 좋았다. 백현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경수야. 나는 그냥. 나는 그냥 네게 기울어진 거야. 어쩔 수 없이, 어떻게 할 수도 없이. 그냥.... 그냥 쏟아진 거야.
구구절절 늘어놓고 싶은 마음은 눌러삼켰다. 백현은 서툰 손길로 제 손을 토닥이기 시작한 아이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네게 기울어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하루였다.
-
"어떻게 됐어?"
"일이 바빠 볼 수 없겠답니다."
굳은 얼굴로 다가온 민석을 봤을 때부터 직감한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씁쓸했다. 백현은 힘빠진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냉철한 사업가에서 순식간에 나이 어린 동생으로 돌아온 백현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민석은 연하게 탄 커피를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놨다.
"정 이사가 언제 날 도와줄지 모르겠네."
"그래도 박 비서 말 들어보니 심경에 변화가 조금 생기신 것 같긴 하던데."
"그래?"
"아무래도 얼마 전 일 때문인지 회장님에 대한 신뢰도가 많이 떨어진 것 같더라고. 나한테 경수에 대한 걸 묻는 거 보니 관심이 생기신 건 확실해."
"...경수를 내세우고 싶진 않은데."
저도 모르게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 백현이 상체를 뒤로 젖히자 못말린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민석이 고개를 저었다.
"수인이랑 결혼까지 하신 분이 설마 해코지라도 할까봐."
"누가 그렇대?"
"아끼는 거 좋지만 적당히 해. 알지? 지켜보는 시선 많다는 거."
민석이 가리키는 게 누구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절로 떠오르는 얼굴에 표정을 굳힌 백현은 잘 고정된 머리를 헝크러트렸다.
"T기업 건은 어떻게 됐어?"
"일단 대부분의 거래처가 거래를 끊었고 C은행에선 어제부터 원금 회수 압박에 들어갔어."
"아직 거래중인 곳이 있어?"
"다음주 안으로 정리될 거야."
"이번주 안으로 끝내라고 해."
"최대한 해볼게."
저 때문에 안 해도 될 일을 하느라 더 바빠진 민석을 알지만 그래도 그만 둘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백현은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서류를 확인했다. 민석에게 떠넘긴 일이 미안해 비서실에서 거쳐야 하는 확인을 생략하고 직접 서류를 체크하고 있다보니 저 또한 정신이 없었다. 얼핏 확인한 시계가 저녁 7시에 가까워진 것을 본 백현은 작게 혀를 찬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 비서님?"
"예."
"저 퇴근해야겠어요."
"아."
"서류는 내일까지 확인해서 가져올게요. 김 비서님도 퇴근하세요."
시간을 확인한 민석이 이걸 기뻐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백현을 바라봤다. 그럴 만도 했다. 경수가 집에 온 뒤 백현은 7시가 되면 칼퇴근을 하고 있었다. 일이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었다. 백현은 무조건 퇴근해 경수와 저녁을 먹었고 함께 시간을 보낸 뒤 경수를 재웠다.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잔뜩 파묻은 경수는 뻗은 손으로 백현의 옷자락을 꾹 쥐고 잠에 들었는데 그가 선잠이 들 때쯤이 되면 스탠드 불을 조절한 백현이 태블릿을 고쳐들었다. 새벽이 창문을 두드릴 때까지 쉬지도 않았다. 깊은 어둠이 내려 별조차 잠이 든 새벽이 되면 당연한 수순처럼 몸을 뒤척이는 경수의 등을 토닥여준 백현이 그의 이불을 제대로 덮어주고 저 또한 몸을 뉘였다. 그때까지 부여잡은 옷깃을 놓지 않은 경수의 손을 끌어다 제손에 잡으면 동그란 손끝이 굽어들며 제 손등을 간지럽혔다. 백현은 그 손끝에 닿는 것이 꼭 제 마음 같아서 몇번이고 가슴께를 긁적거렸다. 그러다보면 아침이 됐다. 선잠에 든 것처럼 몸이 찌뿌둥했지만 눈을 뜨자마자 아이의 얼굴을 본다는 게 좋았다.
예민한 아이가 혹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침대를 빠져나와 씻고 옷을 갈아입으면 아이가 몸을 뒤척였다. 여전히 잠에 취해 잔뜩 구긴 얼굴을 하고도 실눈을 떠 자신을 바라보는 걸 괜찮다고 달래는 일은 지겹지도 않았다. 서투른 제 손길에도 다행히 경수는 순순히 잠들었고 백현은 그런 경수에게 소리없는 인사를 건넨 뒤 출근하는 것이 요즘의 일상이었다. 백현은 태블릿을 챙겨주는 민석의 인사를 등으로 받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잠에 들기 전 제 옷깃을 확인하여 손에 쥐는 경수의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 보고 싶다. 보러 가고 있는데도 보고 싶다니. 정말 중증이었다.
-
얼추 바쁜 일이 마무리 됐음에도 쉴 수 없었다. 백현은 날이 선 얼굴로 민석이 건넨 핸드폰을 확인했다. 치미는 분노에 순간 눈앞이 점멸할 정도였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기사를 확인하자 침통한 표정을 지은 민석이 백현의 얼굴을 살폈다.
"죄송합니다. T기업 산하 언론사에서 나온 기사라 미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다른데는 어때?"
"...아무래도 이미 보도가 났으니, 그냥 무시할 순 없겠답니다. 일단 홍보팀에서 대응중이긴 한데 아이에 대해 파고드는 기자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누굴 파고든다고?"
고개를 돌리는 백현의 행동에서 날이 선 칼의 공명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민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감히, 라고 말하는 듯한 백현의 분노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태생이 남의 이야기를 재료 삼아 밥을 짓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좋은 재료를 발견했으니 그것을 쉬이 놓칠 리 없었다. 게다가 T기업의 자제는 거기에 기름을 붓고 있었다. 대놓고 아이의 정보를 흘리며 자극적인 이야기를 쏟아내니 기자들은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어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을 사방에 옮겼다. 백현은 태블릿 안에 자리한 아이의 이름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포털 메인에 있던 기사는 내렸습니다만 계속해서 기사를 내리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희도 어떻게든 대응책을 마련해야,"
"그 새끼가 경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다들 잊었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나왔으니, 그건 이미 무죄라는 거겠죠."
"그게 말이 돼?"
절로 욕지기가 치미는 상황이었다. 백현은 기가 막혀 몇번이고 한숨을 쉬었다. 현행범으로 체포됐던 놈이 이제와서 증거 불충분이라니. 웃기지도 않았다. 게다가 이 말도 안 되는 기사는 대체. 저에 대한 건 둘째치고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떡밥 던지듯 공개했다는 것에 치가 떨렸다. 내가 분명히, 그때 경고했던 것 같은데.
"사장님, 그때 봤던 박찬열 기자님 기억하십니까?"
"...누구?"
"P그룹 막내 자제분이요."
"그 사람은 왜?"
"지금 로비에 와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잠깐 뵐 수 있겠냐는데, 어떻게 할까요?"
커다란 눈을 가진 남자를 떠올린 백현은 팔짱을 낀 채 고민했다. 모르긴 몰라도 경수나 수인에 대해 딱히 악감정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백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오라고 해."
-
"반갑습니다. 지난 번 인터뷰 때 뵙고 처음이네요."
"지난 번엔 실례가 많았습니다. 매번 뵐 때마다 본의 아니게 실례를 하게 되네요."
"아닙니다. 가신 일은 잘 해결되셨나요?"
"...뭐."
남자와 만날 때면 유독 급한 일이 생겼다. 처음엔 경수를 찾아온 남자 때문이었고 두번째는 백현의 집에 들이닥친 변정현 때문이었다.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떠오르는 정현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힌 백현은 어색하게 뺨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남자는 손에 쥔 수첩을 갈무리하느라 그런 백현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인터뷰는 저번에 다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
"어제 T기업 산하 언론사를 통해 보도된 내용은 이미 확인하셨으리라 봅니다."
"그 얘기는,"
"거기다 내일이면, T기업 재무이사인 태윤구 이사의 인터뷰가 추가 보도될 겁니다."
"...뭐라고요?"
"T기업 산하 언론사를 통해 단독 보도될 예정이고 내용은 B기업 자제에게 수인을 빼앗긴 과정, 그리고 빼앗긴 수인에 대한 프로필입니다."
"빼앗긴 수인에 대한 프로필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건-"
"네. 태윤구 이사는 사장님께서 보호 중인 아이에 대한 모든 걸 공개할 예정입니다. 아이의 이름도, 아이의 특징도."
그리고 아이의 얼굴도.
마치 선고를 하는 것처럼 내려지는 찬열의 목소리에 잠시 말을 잃었다. 백현은 입을 가린 채 한참을 침묵하다 겨우 고개를 들었다.
"이 개새끼가."
치켜뜬 눈이 번득였다. 찬열은 그 기세에 저도 모르게 상체를 뒤로 물렸다. 아이의 정보를 공개하려는 남자의 의도는 명확했다. 설사 그가 경수를 돌려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낙인을 찍으려는 것이었다. 경수가 남자의 것이었다는 듯, 그의 소유였다는 듯. 그 치졸하고 더러운 수작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백현은 손바닥에 손톱 자국이 남을 정도로 힘을 주었다. 만약 그리 되면 경수는 어디를 가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었다. 남자의 소유였다며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할지도 몰랐고, 왜곡된 소문에서 비롯된 꼬리표를 달고 평생을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저를 보던 그 말간 얼굴이 상처로 얼룩져 일그러지는 것을 상상하자 절로 숨이 막힌 백현이 다시 입을 막았다.
"그러니 사장님만 괜찮으시면, 선수를 치는 게 어떻겠습니까?"
"...."
"아이에 대한 기사를 먼저 터트리는 겁니다. 이미 모든 정보가 나온 상황에서 상반된 후속기사는 큰 힘을 가지지 못할 겁니다."
"아이를 앞에 세우자는 겁니까?"
"불쾌하게 느끼실 수 있다는 거 압니다. 다만 아이에게도, 사장님께도 최선의 방법일 것 같아서요."
"경수를 이용하고 싶진 않습니다."
"이용하자는 게 아닙니다. 아이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고, 동의를 얻어 인터뷰를 하면 어떨까 하는 겁니다."
"...."
"일방적으로 공개를 당하는 것보단, 직접 공개를 하는 게 좀 더 좋은 방법이란 걸 아시잖습니까."
백현은 고민했다. 찬열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그게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었다. 하지만.
"일단 보도를 막아보죠."
"사장님."
"압니다. 그래도 일단은, ...일단은 해보죠."
미처 자리를 피하지 못한 수행인을 마주쳤던 아이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기억한다. 아무리 제 울타리 안에서 경수를 보호한다고 해도 그게 완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변정현이 집에 들어왔던 것만 봐도. 백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보는 찬열에게 고개를 저었다.
아이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사람도, 시선도. 아닌 척 했지만 낯선 존재를 만날 때면 잔뜩 경계하며 굴러가는 눈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아이를 전면에 내세우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백현은 복잡한 속내를 감추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민석에게 눈짓을 했다. 지키겠다고 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했다.
-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고 해도 일곱시 퇴근을 미룰 수는 없었다. 마무리하지 못한 일거리를 잔뜩 짊어진 백현은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하루종일 혼자 시간을 보냈을 아이가 신경쓰여 마음이 급했다. 뒤따라오는 민석을 신경쓰지도 못한 채 뛰듯이 안으로 들어가자 현관 앞에 서있는 아이가 보였다. 백현은 신발을 벗는 것도 잊고 팔을 벌렸다. 기다렸다는 듯 품에 안겨드는 아이의 온기가 차게 식었던 가슴을 순식간에 데워주었다.
"다녀왔어."
결국 견디지 못하고 아이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자 아이의 둥근 손끝이 슬그머니 제 허리께에 닿았다. 이 조심스러운 온기가 제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아이는 알까. 백현은 뒤이어 들어오는 민석에게 떠밀려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아이를 안고, 안긴 채 온기를 나눴다.
매일 이러고 있지 좀 말라며 타박하는 말에 머쓱하게 웃기만 하자 못 말리겠다는 듯 미간을 구긴 민석이 눈짓을 했다. 근래 들어 일이 바쁘다보니 민석도 제 집으로 퇴근하지 못하고 백현과 함께 밤을 새우고 있었다. 아예 살다시피 하다보니 경수도 이제는 민석을 경계하지 않는 눈치였다. 백현은 서둘러 샤워를 한 뒤 거실로 나왔다. 민석이 미리 꺼내놓은 태블릿을 들고 서류를 확인하기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 백현의 옆을 차지하고 앉은 경수가 책을 펼쳐 들었다. 백현은 슬그머니 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경수를 돌아봤다. 센터에서 시간을 떼우기 위해 읽던 필독 도서였는데 어쩌다보니 경수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 돼버렸다. 백현은 익숙하게 제 옆구리께를 더듬는 경수에게 순순히 티셔츠 자락을 늘려 쥐어주곤 일을 시작했다. 마음같아선 아이를 품에 안고 오늘은 뭘 했는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것을 봤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아이와 함께하기 위한 시간을 만들기 위해 지금은 잠시 참아야 했다. 백현은 아쉬운 마음을 위로하듯 경수의 손등을 덮어 쥐고는 다시 집중했다.
"사장님. 정 이사님 전홥니다."
"정 이사? 지금?"
그런데 얼마나 집중했을까, 제법 많은 서류들을 처리한 것 같아 마음이 좀 가벼워진 찰나 민석이 저를 불렀다. 백현은 민석의 입에서 나오는 뜻밖의 이름에 놀라 눈썹을 치켜떴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매사 철두철미하고 칼같은 성격으로 8시만 넘어가면 업무에 관련된 그 어떤 전화도 거절하는 그녀가 이 시간에 제게 전화를 건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백현은 옆에 앉은 경수에게 양해를 구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수야, 금방 올게."
또 백현을 뺏어간다며 민석을 흘겨보면서도 아이는 얌전했다. 백현은 동그란 아이의 머리에 입을 맞춘 뒤 민석에게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네, 이사님. 전화 바꿨습니다."
-
꽤 긴 통화였다. 늦은 밤 걸려온 것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어렴풋이 묻어나는 흥분을 감추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썼다. 백현은 전화를 끊은 뒤 한동안 숨을 골랐다. 아직 가야할 길이 많으니 일단은 지금 걷는 길부터 잘 걸어야 했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백현은 잠시 심호흡을 한 뒤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앉아 책을 끌어안은 아이가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 티비를 보고 있었다. 백현은 의아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경수는 티비를 즐겨보지 않는 편인데. 어느 채널을 틀어도 낯선 이의 얼굴을 봐야 하는 탓인지 경수는 티비를 보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혼자 집에 있을 경수가 무료하지 않을까 싶어 티비를 틀어봤는데 티비가 켜지자마자 백현의 방으로 달려간 경수가 백현의 냄새가 잔뜩 묻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덜덜 떠는 것을 본 뒤부턴 절대 티비를 틀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아예 없애버리고 싶었는데 미처 이 일을 몰랐던 민석이 틀어주었던 만화 채널은 또 넋을 놓고 보는 것에 그 표정이 귀여워 지금껏 두었다. 하지만 티비를 자주 보는 편도 아니었고 시끄러운 것보단 조용한 걸 좋아하는 덕에 경수가 처음 봤던 만화가 하는 시간에만 골라서 틀곤 하던 것이 지금 틀어져 있을 이유는 없었다.
"경수야."
게다가 지금 티비에 나오는 건 뉴스잖아.
백현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티비 화면을 바라봤다. 틀어진 케이블 뉴스 채널에서는 저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경수의 종種이 뭘지 추측하는 패널들의 목소리에 분노로 새하얗게 질린 백현은 당장 티비를 껐다. 마음 같아선 네가 왜 이런 걸 보고 있냐며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데 그러면 경수가 놀라기라도 할까봐 손에 쥔 리모컨을 조용히 내려놓기만 한 백현이 잠시 숨을 고른 뒤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경수야."
"저 사람들이 얘기하는 거 나지?"
"경수야. 별일 아니야. 사람들이 너랑 내가 너무 잘 지내니까 질투해서 그래."
"...그 사람이지."
"경수야."
"네가 나 뺏어온 거 아니야. 네가 나 구해준 거야."
커다란 눈으로 저를 보며 울상을 짓는 아이의 얼굴은 견딜 수 없을만큼 사랑스러웠다. 백현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시선을 맞춘 뒤 아이의 뺨을 달래듯 감싸쥐고 쓰다듬었다.
"아니야, 경수야. 내가 구해준 게 아니라 네가 온 거지. 우리가 서로를 만난 거지."
"이상한 말 듣는 거 싫어."
"미안해. 내가 저런 말 다시는 안 나오게,"
"네가 듣는 거 싫어."
아이의 부드러운 손이 제 귀를 가렸다. 어설픈 손길로 귀를 막는 것에 울컥해진 백현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벙긋거렸다. 아이는 불퉁하게 튀어나온 입술을 안으로 말아물며 텔레비전을 노려봤다.
"너한테 나쁜 말 하는 사람들 싫어."
"경수야."
"내가 아니라고 할래. 내가 사람들한테 네가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할래."
"괜찮아, 경수야. 사람들 시선 불편하잖아. 굳이 나서지 않아도 내가 잘 해결할 수 있어."
"내가 할래."
"경수야."
"이번엔 내가 너 도와줄래."
"...."
"내가 하면 안 돼?"
제 손을 붙잡고 물어보는 아이에게 백현이 어떻게 반대의 말을 꺼낼 수 있을까. 어떻게 아이에게 안 된다는 부정의 말을 해. 백현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돼."
돼, 경수야. 너는 무엇이든, 어느 것이든. 다 해도 돼. 나는 너를 말릴 수 없어. 아니, 너를 막을 수 없어. 백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경수의 허벅지 위에 기댔다. 기다렸다는 듯 제 머리를 쓰다듬는 경수의 손길에 날선 감정이 그대로 무너졌다. 불과 몇분 전만 해도 당장 이를 드러내 물어뜯을 것처럼 굴었는데 저를 보는 올곧은 시선 하나에 배를 까고 드러누운 새끼 강아지처럼 온순해졌다. 아, 우습네. 경수야, 너는 언제 내 목줄을 쥐었지.
소리 내 묻지 않은 질문은 굳이 듣지 않아도 대답을 알 수 있었다. 백현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언제긴, 처음부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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