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랑을 하였나이다
백현은 선악과를 따라고 유혹하는 뱀과 같았다. 속살거리는 목소리는 시야를 어지럽혔고 생각을 통제했다. 매끈한 몸은 살갗을 스칠 때마다 온몸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고 똬리를 튼 것처럼 저를 끌어안은 팔은 숨통을 틀어막기도, 틔우기도 했다.
가구점에서 그의 목을 끌어안았던 이후로 어렵게 그의 품에 안긴 경수는 잠시의 행복에 젖어 주문과 같은 백현의 손길에 취했다. 이렇게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품에 고개를 묻으면 영원히 행복하기만 할 것이라는 덜떨어진 생각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빠져들었다. 그 끝은 나락이 분명한데도.
완전한 착각에 빠져 살았다. 금기를 어긴 인간이 행복할 리 없는데. 무슨 생각으로 행복을 확신했을까. 돌아보는 스스로가 말로 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어리석어 보였다.
터지는 한숨을 막지 못한 경수는 우울이라도 막아보고자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아버지가 통보하듯 내던진 약속시간이 가까워지자 기계처럼 몸을 움직여 김 장관의 둘째를 만나러 나온 경수는 차마 백현에게 이 일을 말하지 못했다. 사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가늠도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 어떤 방식으로든 정의된 적이 없었다. 예비 매형, 예비 처형. 입에 올리기도 시큰할 정도의 단어가 타인이 바라본 두 사람의 관계였지만 입을 맞추고 아래를 부비는 관계가 어떻게 그렇게 불릴 수 있으랴.
경수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누구든 나타나서 제게 말해줬으면 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이 옳은 건지.
그러나 제 마음을 알 리 없는 시간은 쉬지 않고 달려갔고 저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 또한 막을 새 없이 저를 찾아왔다. 어색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경수는 몸에 밴 행동으로 그녀를 반겼다. 마주 앉은 그녀는 제 생각보다 다정하고 좋은 사람 같아 보였다.
경수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되려 숨이 막혔다. 웃는 게 예쁜 그녀가 저와의 결혼 후에도 웃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불편해서 고개를 숙인 경수는 손에 쥔 찻잔만 노려봤다. 이런저런 주제를 꺼내며 말을 거는 그녀의 노력을 알면서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백현의 생각이, 불행할 미래가 머릿속을 괴롭혔다. 경수는 겁에 질린 사람처럼 추위를 느꼈다.
“파리 가보셨어요?”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를 계속 외면할 수가 없을 때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을 할까. 자신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설득이라도 해볼까. 엉킨 말들이 목구멍에 걸려 구역질이 나올 때, 경수는 억지로 입을 벌려 그것을 토해내려 애썼다. 그러나 입을 벌려도 그게 나올 일은 없었다. 벌어진 입안 가득 비명이 처박혔으니까.
마주친 눈은 차가웠다. 경주로 보이는 상대와 마주 앉은 채 찻잔을 드는 행동은 일견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지만 표정까지 그러진 않았다. 얼어붙은 얼굴은 잔재주를 부리는 광대를 눈앞에 둔 듯 보이기도 했다. 경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시선을 고정했다. 저와 마찬가지로 시선을 거두지 않은 백현이 입술만 적실 정도로 차를 들이키고는 턱을 치켜들었다. 흡사 눈인사를 하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이게 눈인사가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았다. 경수는 뭐에 데인 사람처럼 파득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잘못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시선을 피하긴 했지만 억울한 마음도 있었다. 두 사람의 사이를 확실히 하지 않은 건 백현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경주와의 결혼까지 진행되고 있는 마당에 자신이 어떻게 하겠는가.
비죽비죽 새어 나온 퉁명스러운 가시에 몸을 감싸자 그제야 다시 그를 볼 용기가 생겼다. 경수는 마음을 굳게 먹으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뻔뻔하게 굴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본 곳에 백현은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경주와 시선을 맞추며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백현은 아주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조차 백현이 기억을 잃은 뒤엔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은 한 번 닿은 시선이 떨어지기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경수는 넋을 놓은 채 백현의 얼굴을 바라봤다. 덕분에 앞에 앉은 그녀가 저를 부르는 것을 세 번이나 놓쳤다.
“죄송합니다.”
집중하지 못하는 게 여실한 태도에 그녀도 힘이 빠진 듯했다. 대놓고 쉬는 한숨에 민망한 얼굴을 숨기지 못한 경수가 재차 고개를 숙였다.
“이 자리가 맘에 들지 않으시는 건가요? 아니면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건가요?”
“죄송해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아직까지 잊지 못한 사람이 있어서.
목구멍에서 덜컥 걸린 말은 겨우 삼켰다.
“아직 결혼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죄인과 같은 모습으로 어깨를 움츠린 저를 그녀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경수는 차마 그녀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럼 일어날까요?”
“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는다면 일어나야죠. 결혼을 원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논할 수도 없고, 마음이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알아갈 필요도 없잖아요.”
가방을 챙기는 여자는 생각보다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난 경수는 재차 사과를 건넸다.
“됐어요. 정 미안하면 이 자리는 제가 파토낸 걸로 하죠.”
“죄송합니다.”
“그래도 저 배웅까지는 해주실 거죠?”
가벼운 미소를 띤 채 농담을 던지듯 타박하는 그녀의 말에 경수는 바삐 고개를 끄덕였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녀는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인 걸 알면서도 제게는 여유가 없으니 그녀에게 내어줄 무언가도 없었다.
그녀를 태운 차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허망한 얼굴로 서있던 경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이 번쩍 든 듯 몸을 돌렸다. 백현 또한 일행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마주칠까 걱정이 됐다. 쫓기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걸음을 서두르자 바닥에 부딪힌 구두굽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직원에게 차를 불러달라 말할 생각도 못했다. 경수는 직접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늦게 오네.”
그러나 요란을 떤 보람은 없었다. 경수의 차 보닛에 앉아 팔짱을 끼고 앉은 백현은 쓰리피스 수트의 단추를 모두 채워 잠그고도 위태로운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손톱만 한 단추 몇 개가 자신을 막을 수 없다는 듯이.
경수는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섰다. 차가 있어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망설이던 경수는 느린 걸음으로 백현에게 다가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백현이 경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기라도 할 듯 살폈다. 꼼꼼하다 못해 끈질긴 시선이었다. 눈으로 옷을 벗기는 것만 같았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귓가에 불이 붙은 듯 달아오른 경수는 백현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경주 씨가 그러던데, 오늘 선 본다고.”
“···.”
“근데 여기서 하는 줄은 몰랐네. 내 호텔에서.”
겨우 벌렸던 입술이 꾹 다물렸다. 경수도 약속 장소가 이곳인 줄은 몰랐다. 듣기는 들었으나 선을 봐야 한다는 것에 정신이 팔려 흘려들은 탓이었다. 호텔에 도착하고 나서야 선을 보기로 한 장소가 백현의 호텔인 줄 알았으나 그렇다고 이제 와서 장소를 옮길 수도 없는 노릇이니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경수는 입안에 맴도는 수많은 변명을 삼켰다. 자신이 변명을 하는 모습이 이상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아무 사이도 아닌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왜 변명을 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불퉁해졌다. 경수는 조금 전까지 마주하지 못하던 백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태도 전환에 눈썹을 치켜뜬 백현이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 것도 아랑곳 않고 주먹까지 꾹 쥐자 제법 용기가 생겼다.
“그게 뭐 어때서요.”
“뭐?”
“그게, 뭐··· 어떠냐고요.”
물론 그것은 1분을 가지 못했지만.
되묻는 백현의 목소리가 차가워서 기껏 말아쥔 주먹에 힘이 풀렸다. 경수는 저를 빤히 바라보는 백현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시선을 피했다. 이러면 지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견딜 수가 없었다. 경수가 시선을 피하자 말없이 그를 지켜보던 백현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가?”
“···.”
“그러네. 따지고 보면 예비 매형, 처남 사이에.”
“···.”
“처남 선 보는 것까지 간섭하는 건 너무 유난인 거지?”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데 속상했다. 경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한 생각이고, 자신이 내뱉은 말을 받은 것 뿐인데 왜 상처 받는 것도 자신인 건지 억울했다. 경수가 침묵하자 답을 기다리듯 경수를 바라보던 백현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가요, 처남. 나도 갈게.”
그렇게 부르지 마. 당장이라도 옷자락을 부여잡고 매달려 울고 싶은 걸 참았다. 왜 그렇게 불러. 왜 그렇게 차갑게 말해.
이게 맞는 거리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울상이 지어졌다. 한 달은커녕 보름도 남지 않은 결혼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왜 자꾸만. 왜 자꾸만 모든 걸 망쳐버리길 바라는 사람처럼 굴어.
대체 뭘 원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무슨 생각인지, 혹시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닌지.
하지만 그걸 물어본다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자신은 오래전에 백현을 한 번 버렸다. 오로지 스스로를 위해, 오로지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기억을 잃은 백현을 거기에 남겨두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 백현이 제게 복수를 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 언젠가 끔찍한 일이라고 칭했던 것을 제 스스로 해버렸으니까. 그러니까.
경수에게는 자격이 없었다. 찬바람을 일으키며 제 곁을 스쳐지나는 백현을 느끼면서도 잡을 수 없었다.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경수의 마음은 단 한 번도 경수에게 돌아온 적이 없었다. 경수는 도망치던 그 순간조차 자신의 마음을 백현에게 두고 왔다. 애초부터 경수의 마음에 적힌 주인의 이름은 경수가 아니었다.
백현이 걸터앉았던 보닛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경수는 구두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자 굳은 몸을 억지로 움직여 차에 올랐다. 손에 핸들을 쥐고도 시동을 켤 수 없었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비집고 나온 눈물이 소리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경수는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손에 얼굴을 묻었다.
평생을 달려본 적 없는 아이에게 지금 당장 달려보라고 한다면, 그 누가 제대로 달릴 수 있을까. 겨우 두어 걸음만에 힘이 풀려 넘어지고 말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뛸 수 있을까. 달리는 것은 다리를 움직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대로 달리면 넘어질 것을 아는 아이는 넘어질 용기가 필요했다. 아파도 괜찮다는 각오가 필요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간단할지 몰라도 제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평생을 걷기만 강요당했던 자신은 달리는 일이 너무 벅찼다. 익숙치 않은 움직임에 힘이 풀릴 다리가 두려웠고 넘어져 깨지고 다칠 무릎이 겁이 났다. 일부러 달리지 않는 게 아니었다. 못 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없던 것이었다.
경수는 이 모든 상황이 답답해 숨을 헐떡거렸다. 제 스스로도 한심하고 저를 이렇게 만든 주변도, 모든 것들도 싫었다. 목이 졸린 사람처럼 급하게 숨을 들이쉬며 젖은 눈가를 문지르자 그 거친 몸짓을 혼내기라도 하듯 벌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누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차 안에 앉아 우는 자신의 모습을 들켰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덜컹거리며 내려앉았다. 경수는 물기가 잔뜩 묻은 눈을 크게 뜨며 열린 조수석 문을 바라봤다. 그러나 문을 열고 차에 탄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기도 전에 양 뺨이 붙잡혔다. 말리거나 밀어낼 새도 없었다. 단단히 붙잡은 얼굴을 제게 당긴 백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과 같은 말을 토해냈으니까.
“한 번만이야.”
무엇이, 라고 물어볼 시간은 또한 없었다. 벌어진 입술을 욕심껏 베어 문 백현은 축축하게 젖은 경수의 뺨을 몇 번이고 손가락으로 쓸어냈다. 위로가 분명한 움직임이었다. 경수는 좀 전까지의 생각을 모두 잊은 채 백현에게 매달렸다. 목을 끌어안자 맞닿은 입술도 좀 더 짙어졌다.
제발. 느린 걸음에도 제가 도착한 피니시 라인에는 백현이 서있었으면 했다.
*
결혼식이 2주도 남지 않자 경주는 본격적으로 관리를 받기 시작했다. 원래도 꾸준히 받는 것이긴 했지만 피로연에 참석할 인물 중 중요한 인물이 있다며 평소보다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경수는 스케줄을 확인하며 투덜거리는 경주의 말을 흘려들었다. 흘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더 필사적이었다.
백현은 경수가 선을 본 것만으로 불쾌감을 드러냈지만 경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백현과 자신은 처지가 달랐다. 경수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경수의 갤러리로 찾아온 백현은 무언가를 종용하듯 하루 종일 경수의 얼굴만 바라보다 가버리곤 했지만 그래도 경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2주도 남지 않은 결혼인데, 자신이 무슨 말을 하랴. 그 어떤 말로도 되돌릴 수 없을 것이었다. 경수는 여전히 체념에 익숙했다.
이제 와서 뭘 어쩔 건데. 모두가 알고 있는 두 사람의 결혼을 이제와서 엎으면, 그러면 뭘 어떻게 할 건데. 수많은 뒷이야기만 남기고, 회사에는 체면만 구기고 끝날 위험을 백현이 부담할 필요는 없었다. 겨우 저 하나 때문에.
경수는 고개를 저었다. 식이 가까워질수록 혼란은 더 커졌다. 경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슬퍼하다가 두려워하다가를 반복했다. 기분은 좋다가도 나빴고 슬프다가도 기뻤다. 예고도 없이 터지는 울음은 그 이유가 분명해 변명을 할 수도 없었다. 경수는 서류 위로 동그란 자국을 남기며 떨어진 눈물을 보고서야 제가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근래의 경수는 이처럼 고장이 난 것 같았다. 불쑥불쑥 백현의 얼굴이 떠올랐고 얼마 남지 않은 그의 결혼이 떠올랐다. 애써 지우려 해도 숨이 덜컥 막히는 기분이 들면 자각하기도 전에 이미 눈물이 나고 있었다. 새하얀 종이 위에 남은 눈물을 성의 없는 손길로 닦아낸 경수는 제 뺨 또한 그처럼 쓸어냈다.
어제는 경주의 부케가 결정됐다. 경주는 메시지를 통해 부케 후보를 줄줄이 보내왔고 뭐가 나은 것 같냐며 경수를 귀찮게 했다. 경수는 제게 오는 메시지들을 보고 싶지 않아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휴대폰을 들었다. 상처 받을 게 뻔했지만 궁금했다. 경주의 부케가 결정되면 그에 맞춰 백현의 수트에 꽂힐 부토니에도 결정이 됐다. 경수는 백현이 입을 예복과 그에 어우러진 부토니에를 몇 번이고 상상했다. 경주가 보내준 사진들 속 꽃들은 무엇이든 백현에게 잘 어울렸다. 붉은 장미도, 청초한 백합도 모두. 결국 그 무엇도 선택하지 못한 채 예쁘다는 말만 반복하자 경주는 묻는 것을 포기했다. 오랜 고심 끝에 새빨간 장미를 부케로 골랐다는 연락이 오자 내심 하얀 작약을 눈여겨보고 있던 경수는 예쁘다는 짧은 답장만 남겼다. 제 생각대로 부케가 결정된다면 그것도 썩 기쁘진 않을 것 같아서. 백현에게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에 저장했던 꽃 사진은 삭제했다.
근래에는 백현의 연락도 뜸했다. 결혼식이 다가오니까. 이제 진짜 경주의 곁에 설 테니까. 이런저런 말들로 이유를 대봐도 입안이 썼다. 한 번 만이라던 백현의 말이 한 번만 자신에게 양보해주겠다는 말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마지막이라는 경고였던 걸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경수는 결국 보고 있던 파일철을 닫았다.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일을 하기엔 무리였다. 이마를 문지르며 한참이나 책상을 내려다보던 경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라이브라도 하고 싶었다. 갤러리에서의 일거수일투족은 아버지에게 들어가기 십상이라 제 감정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았다. 저를 잘 따르는 비서조차 믿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 온전히 저만의 공간이라 자부할 수 있는 차가 유일한 은신처였다. 경수는 차키를 챙겨 든 채 이사실을 나섰다. 서류를 확인하던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손짓으로 만류하고 커피를 사 오겠다며 변명했다. 이조차 아버지에게 들어갈 것을 염려한 말이었다.
도망치듯 갤러리를 나선 경수는 차가 주차된 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평일 오후, 점심시간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애매한 시간이라 갤러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텅 빈 갤러리 주차장에는 익숙한 직원들의 차 몇 대와 오늘 아침 끌고 온 자신의 검은색 벤츠만 자리해 있어야 했다.
“···.”
그래야만 했는데.
검은색 벤츠 옆에 나란히 주차된 하얀 차체는 그와 대조되어 더 눈에 띄였다. 경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보닛에 기대고 선 백현이 손가락에 걸린 키링을 돌리다 손에 쥐었다. 달칵 소리를 내며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이 꼭 저 같았다. 경수는 아무런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뚝 끊긴 구두 소리 때문인지 자세를 바로 하고 선 백현이 저를 바라봤다.
“안녕.”
안녕할 수 없다. 대체 왜 찾아왔지.
백현이 찾아온 것이 기쁘면서도 숨이 막혔다. 차라리 그날이 실수로 남을 수 있도록, 그가 착각으로 제게 닿은 것이 되도록 하려면 백현은 저를 찾아와서는 안 됐다. 2주도 남지 않은 작금에 와서 뭘 하겠다고. 경수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참았다. 백현에게 화를 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 모든 어긋남의 시작은 경수였다. 갑작스러운 사고는 두 사람의 탓이 아니었다고 하나 그 사고 후 벌어진 일은 경수의 탓이 맞았다. 기억을 잃은 백현을 모른 척 두고 돌아선 것은 경수였다. 어떻게 백현만을 탓할 수 있을까. 경수는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미 몇 번 깨물려 잇자국이 난 입술은 견디지 못하고 비릿한 핏물을 토해냈다. 꼭 제 마음 같았다.
인사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복잡한 얼굴 표정을 읽기라도 하듯 바라보던 백현이 이내 미소를 지었다.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 믿으려나?”
“변백현 씨.”
부르는 목소리가 볼 품 없이 떨렸다. 경수는 제 목소리가 떨린다는 걸 깨닫자마자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변백현 씨?”
거리를 두려는 의도가 명백한 부름이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린 백현의 표정이 차게 굳었다. 경수는 그 얼굴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스스로가 싫었다. 제게 보이는 냉대 한 번에 마음 졸이는 꼴이라니. 누가 봐도 그에게 마음을 빼앗긴 꼴이었다. 경수는 말아쥔 주먹에 힘을 주며 백현을 노려봤다. 털을 바짝 세운 듯한 모습이 되도 않는 호기를 부리는 소동물 같았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백현은 이를 갈았다. 지난번의 말이 경수에게 닿지 않았던 걸까. 내가 했던 그 마지막 경고가 네게는 너무 당연했나. 깔끔하게 세팅된 머리를 가볍게 쓸어 올린 백현이 이를 드러내 웃었다.
“경수야.”
“···.”
“지금 씨발, 나랑 뭐 하자는 거야?”
“···.”
“봐주는 건 한 번 뿐이라고 얘기했던 것 같은데, 벌써 잊어버렸나? 그날 키스가 너무 강렬했어? 그래서 다른 건 다 잊어버린 거야?”
자리에 선 백현은 한 발자국도 다가오지 않았지만 그 흉흉한 기세가 경수의 목줄기를 잡아챈 기분이었다. 경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겁에 질린 꼴을 보고도 백현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아니, 되려 더 크게 웃어 보였다.
“어디까지 갖고 놀 작정인데.”
“···.”
“응? 경수야.”
갖고 노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경수는 답하지 못한 말을 삼켰다. 짜증을 삼키려는 듯 몇 번이나 호흡을 고르던 백현이 다시 경수를 바라봤다.
“내가 어디까지 너한테 넘어가 줘야 해?”
“변백현 씨.”
“왜. 백현이라고 한 번 불러보지.”
“···.”
“왜 못 불러, 경수야. 전에는 잘만 불러놓고.”
“뭐?”
“왜? 아니야?”
경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백현은 당장이라도 이죽거리고 싶은 것을 참느라 몇 번이나 침을 삼켰다. 반쯤은 알았고 반쯤은 찍은 것이었는데 제가 던진 공이 완벽한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입술을 벙긋거리던 경수가 좀 전보다 더 큰 보폭으로 뒤로 물러섰다. 백현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어떻게.”
“···.”
어떻게 알아? 기억이 났어? 어디까지? 다 기억난 거야?
묻고 싶은 말이 입안에서 일렁였다. 커다랗게 떠진 눈이 몇 번이나 흔들렸다. 백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큼직한 눈 안에서 일어나는 해일을 관조했다. 기억이 완벽히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기억은 날카로운 것으로 머리를 가르고 쑤셔 박는 것처럼 폭력적이었다. 게다가 그 안의 자신은 제 스스로가 봐도 놀랄 정도로 다정하고 낯간지러워 가끔은 그저 꿈을 꾼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무심하게 넘기기에는 그 순간의 모든 것이 생생했다. 손 끝에 닿았던 네 뺨의 온기, 촉감. 그릴 수도 있을 정도로 선명한 감각을 어떻게 상상만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아쉽게도 백현은 그렇게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생각은 언제나 현실로 만들어 왔으니 구태여 상상 따위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그러니까.
백현은 꿈속에서 본 모든 것이 자신이 잃어버린 실마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졸업을 앞둔 마지막 겨울 방학, 빗길에 미끄러진 차량이 전복되면서 일주일 가량 의식을 찾지 못했던 백현이 잃어버린 그 과거의 주인이라고. 우성 알파라는 이름 때문에, 호시탐탐 제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 때문에 부모님과 주치의를 제외하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공백이었다. 찾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찾을 수 있는 방법도 마땅치 않고 시간도 여의치 않아 덮어둬야만 했던 그것들이 온전히 경수와의 기억이었다고 생각하면 속이 뒤집혔다.
너는 그걸 알면서도 삼켰단 말이지. 그걸 알면서도 네 누나랑 결혼하려는 나를 지켜봤다는 거지. 이가 갈렸다. 아무리 그를 이해하려 해도,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 해도 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기름을 붓듯 들려온 경수의 맞선 소식은 그나마의 평정심마저 산산이 부서트렸다. 백현은 당장이라도 경수를 붙잡고 따지고 싶었다. 어째서 말하지 않았는지, 왜 모르는 척했는지, 대체 왜-
왜 날 버렸는지.
필사적으로 저를 밀어내는 경수를 보면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기분이 들었다. 일부러 못되게 굴어도 혼자 울음을 토해내기만 할 뿐 저를 붙잡지는 않는 경수가 돌아버릴 정도로 싫었다. 그리고 좋았다. 저러니까 내가 좋아했겠지. 멍청하리만큼 우직한 저 꼴이 좋아서,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도 내디딘 걸음을 무르지 않는 저 단단함이 좋아서 내가 그렇게 굴었겠지. 이해를 하면서도 답답했다.
이번만큼은 경수가 먼저 제게 와줬으면 하는데, 도저히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솔직히 백현도 애가 탔다. 네가 버렸으니까 네가 다시 주워달라고. 네가 먼저 손을 놨으니까 다시 손을 잡아달라고. 그렇게 요구하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니잖아. 그건 해줄 수 있는 거잖아. 아무리 눈치를 주고 종용해도 손을 뻗지 않는 경수가 이제는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뭐가 궁금해? 어디까지 얘기해줄까?”
“변백현.”
“이제야 편하게 부르네. 근데 경수야. 나는 백현아, 라고 부르는 게 더 좋아. 옛날 생각나고 좋잖아.”
“···.”
“너는 잊어버린 적 없으니까 알 거 아니야. 네가 그렇게 부를 때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만해.”
“뭘 그만해?”
“그만해.”
“뭘 그만해, 경수야. 나보고 어디까지 참으라고.”
“···.”
이러면 안 되지 싶으면서도 저를 노려보는 경수의 시선에 심술이 났다. 왜 네가 그런 눈으로 봐. 지금 그런 표정을 지을 건 네가 아니라 난데. 백현은 뾰족뾰족 솟아오르는 가시를 손에 쥐고 부러트렸다.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는 경수와 그 침묵의 끝을 기다리는 백현 탓에 좀 전의 날카로운 대화가 무색하도록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는 고요했다. 백현은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경수를 바라봤다.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고 벙긋거리던 경수는 뭔가를 말할 듯하면서도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제게 쏟아지는 시선에 담긴 뜻을 알면서도 그랬다. 사실 경수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해줄 수 있는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기적이게도 사과를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미안하다고 말한다면 그저 과거로만 남을 것 같아서 그랬고, 사랑한다고 말하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랬다.
“도경수.”
다정함을 덜어낸 목소리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말할 수가 없었다. 겨우 눈을 들어 얼굴을 바라보니, 한계에 다다른 것 같은 얼굴이 여전히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 만이라고 했었지.”
“···.”
“그 기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줄게.”
“···.”
“지금 내 손 잡아. 그럼 아무것도 안 물어봐.”
“···.”
“다 내가 알아서 해. 네가 걱정하는 거, 네가 무서워하는 거 전부. 내가 다 해결할 거야.”
“백현아.”
내밀어진 손끝이 떨리는 것에 왈칵 울음이 터졌다. 백현은 모른다. 지금 저 손을 보는 마음이 어떤지,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저 손을 잡고 싶은지. 눈을 가려준다고, 귀를 막아준다고 말하는 백현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모르지 않았다. 백현아.
“변백현.”
그건 너를 떠났던 내 마음과 같아.
경수는 악을 쓰며 반항하는 마음을 삼켰다. 목구멍 너머로 넘어간 것이 비명 같은 울음을 토해내며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변백현 씨.”
“···.”
“너무 늦게 말하게 됐네요.”
“도경수.”
“결혼 축하드려요.”
“도경수!!”
“앞으로는 매형이라고 부를게요.”
희게 굳은 얼굴이 악을 쓰듯 제 이름을 부르는 것에 굴하지 않았다. 울지 않는데도 저만큼이나 엉망으로 일그러진 백현의 얼굴이 마음 아팠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웃어 보인 경수가 그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잔뜩 접은 눈꼬리를 핑계로 시선을 돌렸다.
“잘 부탁드려요.”
나는 안돼. 나는 할 수 없어.
어린 시절에는 어렴풋하던 형질의 차이가, 현실의 차가움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하게 제게 각인되었다. 정말 못된 생각이지만 가끔은 이렇게 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너는 그 벽을 만나지 못해 다행이라고. 내 앞에서 걸어 잠긴 문 때문에 네가 문 밖에 남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헤어질 수 있다는 건 축복이었다. 지친 네 얼굴을 보지 않고 이별할 수 있다는 건, 내 손이 버거워질 너를 보지 않을 수 있다는 건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경수는 독한 마음으로 등을 돌렸다. 돌아서자마자 터진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졌지만 걸음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경수야.”
“···.”
“경수야아.”
연약해진 목소리 끝이 눈물로 젖어있었다. 경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는 제가 내딛는 걸음 하나만큼 작고 연약하게 시들었다.
“도경수.”
덜덜 떨리는 손이 유리문을 잡아당기기 무섭게 도로 밀려 닫혔다. 순식간에 저를 쫓아온 백현이 닫은 것이었다. 경수는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몸을 굳혔다. 돌아보지 않는 모습에 애가 탄다는 듯 다시 한번 경수를 부른 백현이 조심스레 그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거절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진짜 마지막이야.”
“···.”
“다시는 기회 안 줄 거야. 이게 진짜 마지막이야.”
“···.”
“제발.”
“···.”
“제발, 경수야.”
하지 마. 백현아. 그러지 마.
필사적인 건 경수도 마찬가지였다. 말하지 마. 상처 받지 마. 차라리 복수하겠다고 이를 갈아. 차라리 보란 듯 잘 살겠다고, 차라리. 차라리.
“경수야.”
“놔줘.”
“경수야.”
“제발.”
어깨에 닿은 온기가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허락을 구하듯 허리께를 맴돌던 손이 고장 난 것처럼 덜걱거리며 멀어지고 뒷목을 간지럽히던 머리칼이 바람결에 사라졌다. 경수는 숨조차 멈춘 채 그 모든 것을 견뎠다.
“경수야.”
유리문에 비친 백현의 얼굴이 엉망이었다. 풋내 나는 어린 시절에도 본 적 없는 눈물에 저라고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당장이라도 흰 뺨을 쓸어 눈물을 닦아주고 싶지만, 그래선 안 됐다. 경수는 손에 쥔 차가운 손잡이만 몇 번이고 고쳐 쥐었다.
“너는 정말 끝까지 나를 믿지 않는구나.”
무성의한 손길로 눈물 젖은 뺨을 훔친 백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좀 전의 매달림이 무색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놀란 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유리문이 작게 요동치자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 평소와 같은 얼굴로 돌아온 백현이 유리문에 비친 경수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때도, 지금도.”
“···.”
“너는 한 번도 나를 믿은 적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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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큥탄일
소중한 백현이'ㅅ'♡
올리기 전 뜬 두번째 앨범 소식에 큥닥큥닥
바로 예판 구매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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