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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xS

[찬세/백도] Lucky one

 

 

 





Lucky one

너를 발견한 순간



w.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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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란 원래 알파에게 약하다. 알파가 내뿜는 페로몬에 다리를 후들거리고 스스로 복종하며 다리를 벌린다.

이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각인된 관념이자 사실이었다. 물론 우성이라고 불리는 오메가가 되려 알파들을 내리누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결국 우성 알파에게는 힘을 쓰지 못했다. 대부분의 오메가들은 좋은 시선을 받지 못했고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힘들었다. '우성' 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들은 그것을 이용하여 가수, 배우 등 화려한 직업을 제 것으로 삼기도 하였지만 양면의 날처럼 비난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세훈은 처음에는 우성 오메가들을 부러워했지만, 결국에는 스스로가 열성이라는 것에 감사했다. 오메가라는 것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주 약한 향을 가진 세훈은 알파들조차 체향으로 착각할 정도로 옅은 향을 지니고 있는 덕에 알파들이 가득한 현장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걸어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세계 인구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베타인데도 연예계에서는 오히려 찾아보기가 더 어려웠다. 대부분은 알파였지만 어쩌다가 눈에 띄는 오메가들은 호시탐탐 알파들의 사냥감처럼 여겨졌다. 특히 신인 배우일수록, 향이 좋을수록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베타 부모의 밑에서 뜻하지 않게 오메가로 태어난 세훈은 제 할머니가 열성 오메가였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감을 느꼈었다. 이왕 오메가일 거 우성으로 태어날 것이지. 아니면 그냥 차라리 베타가 되게 할 것이지. 어중간하게 태어난 열성 오메가의 이름표는 그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다.





"촬영 미뤄졌어요. 다음 일정 문자로 드릴게요."





8시간을 기다린 촬영이 미뤄졌다는 것에도 사과 한마디 듣지 못하는 것은 이제 당연한 일이었다. 제법 그럴 듯한 겉가죽을 가졌다고 평가받긴 했지만 알파도 오메가도 아닌 베타 오세훈으로써 받을 수 있는 대우는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으니까.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조연출을 멀뚱히 바라보던 세훈은 차갑게 언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세훈이 스스로를 오메가라고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껏 해봐야 열성인데다, 향도 강하지 않으니 어줍잖은 알파들이 세훈을 깔아뭉개려 할 것이 분명했다. 드라마에서는 편집이 될지, 안 될지도 알 수 없는. 짧막한 장면 하나를 위해 8시간을 대기하던 처지는 비참했지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신인 오메가의 처지보다는 나았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린 세훈이 버릇처럼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나마 방송국에서 촬영을 한 것이 다행이었다. 비록 옥탑방이긴 했지만 방송국 근처에 집이 있어 오늘은 교통비가 나가지 않을테니. 군데군데 녹이 슬어 쇳소리가 나는 자전거는 겉보기와 달리 좋은 교통수단이 되주곤 했다. 자전거를 타고 10분이면 도착할 제 집을 떠올린 세훈이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어-!"







그러나 열쇠를 꺼내기 무섭게 달려든 인영에 열쇠를 놓친 세훈이 제게 부딪혀 넘어진 남자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떨어진 열쇠를 주으며 건네는 사과에, 남자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답이 없었다. 뭐지.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린 세훈이 손에 쥔 열쇠를 만지작거리다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저기, 혹시 다치기라도 한거면 일이 복잡해질 것 같아 조심스레 그를 부르자 남자의 몸이 더 움츠러든다. 세훈은 순간적으로 코 끝을 찌르는 향에 절로 얼굴을 굳혔다.

오메가구나.

손이 떨려왔다. 이 정도로 강한 향이면 보통 오메가는 아니었다. 히트싸이클이 온 걸까. 우성이라면 싸이클 조절을 철저히 했을텐데 어쩌다가? 머릿속이 복잡했다. 세훈은 옷깃을 꾹 잡아쥔 채 덜덜 떠는 남자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방송국은 그 어디보다 알파가 많은 곳이었다. 게다가 오메가가 싸이클을 조절하지 못해서 생기는 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오메가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만약 여기서 누군가가 이 우성 오메가를 덮친다하여도 그건 알파의 잘못이 아니었다.

잠시 망설이던 세훈은 입고있던 점퍼를 벗어 그의 몸 위로 덮었다. 지금 세훈과 남자가 있는 곳은 방송국 뒷편에 자리한 자전거 보관소였다. 대체로 사람이 드문 곳이긴 했지만 페로몬을 느낀 알파들이 몰려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혹시 연락할 분이 계세요?"







끄덕, 겨우 움직인 고개가 덜덜 떨려왔지만 대답으론 충분했다. 세훈은 연신 주변을 살피며 남자를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서둘러야 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빈 회의실을 둘러본 세훈이 몇개의 방을 지나친 뒤에야 겨우 찾아낸 방 안으로 남자를 끌고왔다. 방송국을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 주로 묵는 이 휴게실은 이 때쯤이면 다들 청소를 나가 텅 비어있었다. 대부분이 베타로 이루어진 아주머니들은 페로몬을 느끼지 못했고 세제가 묻은 청소용품이나 걸레를 군데군데 널어놓은 이 곳에서는 남자의 향이 조금 가려질 확률이 컸다. 자리에 앉히기 무섭게 품 속을 더듬거린 남자가 목에 건 목걸이에서 알약 하나를 꺼내들자 세훈은 속으로 혀를 찼다. 우성이라면 언제나 저렇게 철저해야 하는 걸까. 덜덜 떨리는 그의 손이 갑작스레 찾아온 히트 싸이클에 대한 고통을 보여주는 기분이었다. 대체로 히트 싸이클을 크게 겪은 기억이 드문 세훈은 조금 낯선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여 마음이 쓰였다. 물도 없이 약을 털어넣는 남자의 행동에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건네자 남자가 물을 받아 마셨다. 약효가 돌기까진 적어도 30분. 혹시 몰라 걸어잠근 문에 등을 기대고 선 세훈이 조금씩 진정되어가는 남자를 바라봤다. 이미 히트 싸이클이 발현되어 완전히 누를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진정은 될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남자의 목소리가 좋다. 제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진정이 된 남자에 조금 놀란 눈을 한 세훈이 머쓱한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뒷목을 쓸었다.





"아뇨. 좀 진정되셨으면 연락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오래는 못 있을 거라."





문 밖을 턱짓하자 모자 속에 반쯤 얼굴을 가리고 있던 남자가 손을 들어 모자를 벗었다.







"그렇군요. 그럼 핸드폰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아?

세훈은 멍청하게 몸을 굳혔다.

세상에. 도경수잖아.















-













찬열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백현은 유쾌하고 센스도 좋은데다 일처리까지 깔끔한, 아주 좋은 사업 파트너였지만 때때로 반쯤 미친 사람처럼 굴 때가 있었다. 대체로 그 이유는 백현의 연인 도경수라던가, 백현의 피앙새 도경수라던가, 도경수라던가 했지만 일처리가 빠른 수하들 덕에 백현의 흥분이 이렇게 오래가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거의 문을 부술 기세로 연 백현의 행태에 우아한 태도로 걸음을 옮긴 찬열은 그의 행동을 비난하듯 눈살을 찌푸렸다.







"경수야!"







아까만 해도 경수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며 수행원들의 목을 틀어쥐고 금방이라도 물어뜯을듯 으르렁대던 놈이 금세 꼬리를 흔든다. 제게 간단하게 눈인사를 건넨 경수가 백현의 품에 얌전히 안긴 채 손을 꼬물거리자 그 사랑스러운 작태에 입꼬리가 올라간 백현이 보고싶었다며 잔뜩 애교를 부렸다. 꼴값을 떠네, 진짜. 방금 전까지 일 제대로 하셔야죠, 하며 경호원들의 뺨을 툭툭 두드리던 그 날선 얼굴을 기억하는 찬열은 백현의 저런 내숭이 못마땅하다. 팔짱을 낀 채 닭털을 마음껏 흩날리는 커플을 멀뚱히 바라보던 찬열은 저 구석에서 주춤주춤 움직이는 인영에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백현이나, 제 수행원도 아닌 낯선 얼굴은 이곳에 있어선 안 되었다. 아무리 경수나 백현이 스스럼없는 애정 표현을 하는 편이라곤 하나 우성 오메가이자 배우인 경수와 재벌 3세 우성 알파로 유명한 백현의 만남은 꽤 화젯거리가 될만한 이야기였고 뒷이야기가 나올 구실이 충분한 소재였다. 미우나 고우나 제 친구라고 경계심을 한껏 끌어올린 찬열은 제 시선에 옴짝달싹 못하고 굳어진 남자를 노려봤다.







"어디 소속이죠?"

"네...?"

"아. 그런 거 아니야."







백현의 허리를 끌어안고 백현의 내숭을 모른 척 받아주던 경수가 다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레 제 품을 빠져나간 경수에 기분이 상한 백현의 날카로운 시선이 제게 향하자 모른 척 고개를 돌린 찬열이 뻘쭘한 얼굴로 서있는 남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럼?"







누군데. 라고 묻는 찬열의 말에 온통 경수에게 향했던 백현의 시선마저 세훈에게 향했다. 졸지에 티비로만 보던 세 사람의 시선을 모두 받아낸 세훈이 얼굴을 잔뜩 붉힌 채 눈을 굴렸다. 다행히 경수는 그런 세훈을 곤경에서 금세 구해주었다.







"나 구해주신 분."







짧막하게 정의내린 말에 다시 쏟아진 시선의 무게가 많이 줄어들었다. 세훈은 숨 막힐듯한 이들의 페로몬에 기가 죽는 것을 티내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숙였다. 사촌이 알파라 나름 알파 페로몬에 대해선 면역이 있다 여겼는데 이건 정말 장난이 아니다. 아무리 제가 열성이라 한들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알파의 페로몬을 계속해서 무시하긴 힘들었다. 결국 방을 나서기 위해 슬쩍 발을 구른 세훈이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겠다며 자연스레 걸음을 옮겼는데 그와 동시에 우아한 손짓으로 백현이 그를 멈춰세웠다.







"우리 경수를 도와주셨다는데 이렇게 그냥 보낼 순 없지.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난감하다. 세훈은 버릇처럼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제 형질을 속이고 있는 세훈으로써는 아무리 이게 좋은 기회라 해도 반갑지가 않았다. 여차하면 제 형질이 까발려질 수도 있는데다, 비밀 연애를 하는 것이 분명한 두 사람을 목격한 지금 입막음을 위해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특히나 번뜩이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백현의 눈빛은 아까 경수를 보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것이었다.

세훈은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버틴다고 해서 이들이 보내줄 리도 없으니 차라리 얌전하게 구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 여긴 것이었다.







"오세훈입니다."

"오세훈씨. 나는 얼굴이 명함이라 굳이 설명 안 해도 내가 누군지 알테죠?"

"예에...."

"나가시면서 한비서한테 연락처 알려주세요. 연락 드리겠습니다."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지 않은 눈빛인데도 중압감이 느껴진다. 생각보다 쉽게 저를 보내주는 것에 안도감을 느낀 세훈은 혹여 백현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서둘러 걸음을 옮겨 방을 나섰다.







"후우-"







다른 오메가들과 비교하면 비정상적으로 키가 큰 탓에 아무리 알파라고 한들, 저보다 키가 큰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는데. 당연하게 저보다 위에 위치한 눈높이가 생각보다 낯설었다. 세훈은 뒷목을 쓸어내리며 제게 다가오는 비서에게 고개를 숙였다. 혼자 멀뚱히 서서 저를 노려보던 커다란 남자. 이름이 뭐더라, 저 알파.













-













영리한 걸까. 도망치듯 방을 나갔던 오세훈이란 남자는 경수와 백현에 대한 이야기를 떠벌리지 않았다. 게다가 경수가 세훈이란 남자를 맘에 들어한 덕에, 백현은 대충 계좌로 사례금만 보내려던 생각을 수정했다. 우성 오메가라는 타이틀덕에 아무리 좋은 연기력을 보여도 나오는 뒷말이나 은근한 편견에 질렸던 경수로써는 제 얼굴을 보고도 딱히 태도 변화가 없는 세훈이 맘에 꼭 들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세훈이 경수와 같은 배우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 호감이 배가 된듯 싶었다. 처음에는 경수가 호감을 가진다는 것을 영 탐탁치않아 하던 백현도 세훈이 알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비죽 튀어나온 입술이 좀 들어갔다.

그리고나선, 찬열은 관심을 끊었다. 도경수의 히트 싸이클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도와준 남자는 오세훈이고, 그는 배우이며 알파가 아니므로 도경수와 변백현이 그럭저럭 맘에 들어한다. 거기까지가 찬열이 파고들기에 적당한 선이었고 그 이상은 알고 싶지도, 알 권리도 없었다. 애초에 둘 사이의 문제이기에 해결도 둘이 알아서 잘 할거라 여긴 탓이다. 간간히 두 사람이 오세훈이라는 남자를 만나러 간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냥 좀 친해졌나 생각만 했지, 이렇게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우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두 사람이 뭣도 아닌 베타를 친구 삼다니. 석달이 훌쩍 지나 제 앞에 앉은 두 사람을 보니 더 기가 막혔다. 찬열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뺨을 긁적였다.







"안 돼."

"야."

"거기 그냥 알파들도 함부로 못 들어가는 곳이야. 우성, 특권 계층, 지 잘난 맛에 사는 콧대 높고 머리 빈 사람들 끌어모아서 벌이는 재벌들 돈 자랑 자리인데, 거기에 베타가 와서 뭘 하겠다고?"

"꼭 보고싶은 필름이 있대. 미연파 감독 마지막 작품 있잖아."

"가까이서 보는 건 바라지도 않아. 그런 사람도 아니고. 그냥 경매 자리에서 선보일 때, 그 때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하더라."







백현과 경수, 두 사람이 합심하여 저를 설득하려는 꼴을 보니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찬열은 짜증스레 머리를 쓸어올렸다. 대체 그 베타는 어떻게 애들을 홀렸길래 저한테 이런 부탁을 할까. 특히나 경수 주위를 경계한답시고 털 바짝 세운 고양이마냥 앙칼지게 굴던 백현까지 그 베타에게 넘어가다니. 찬열은 흐릿해진 베타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다. 주로 문화계나 정재계에 분포된 알파와 오메가들은 자연스레 권력을 손에 쥐고 휘둘렀다. 아무리 수가 적다 하더라도 상위 계층을 씹어먹다시피하니 베타들은 자연스레 그들을 선망하고 쫓기 시작했다. 출세를 위해 알파나 오메가에게 들러붙는 경우도 허다했고, 여기 있는 세 사람은 그러한 일을 지겹도록 겪어온 당사자이기도 했다. 특히 눈치가 빠르고 사람 파악을 잘하는 백현은 베타들과는 말도 잘 섞지 않을 정도로 벽을 세우는 이여서 찬열은 이 상황이 더 당황스러웠다. 결국 이마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린 찬열이 두 사람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내가 직접 데려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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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미연파 감독은 천재 감독으로 이름 높았다.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제작한 그의 첫번째 작품은 유명 시상식을 휩쓸며 그의 이름을 알렸고 뒤이어 개봉한 영화들조차 올해 최고의 영화라는 극찬을 연신 들으며 성공했다. 세훈이 배우라는 꿈을 키우게 된 것도 바로 이 감독의 영화를 본 뒤였다. 데뷔작부터 독립 영화, 장편, 단편 가릴 것 없이 그가 제작에 참여했다는 영화는 모조리 섭렵하며 봤다. 비록 그는 30살의 나이에 스스로 삶을 정리했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청천(?天)이라는 작품은 세훈이 감히 손꼽는 최고의 영화였다. 그 영화가 사실은 쌍둥이 작품이라는 것과, 쌍둥이 격인 벽해(碧海) 라는 작품이 개봉되지 않은 채 필름만 남았다는 것은 백현과 경수가 나누던 이야기로 뒤늦게 알게 됐다. 경수는 그의 작품으로 데뷔를 했었고, 마지막 작품인 청천에 출연 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의 마지막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이었다. 찬열이 주최하는 경매에 나오는 필름을 경수에게 선물로 주고 싶어 하던 백현이 먼저 필름에 대해 말을 꺼내자 저도 모르게 그 사이에 끼어든 세훈이 미연파 감독이요, 하고 되물었다. 평소 수줍어하던 태도조차 잊고 눈을 크게 뜨자 동시에 세훈을 돌아본 백현과 경수는 어린 막냇동생을 보듯 미소를 지었었다. 사례를 하겠다 해도 극구 사양하며 불편한 티를 내던 아이가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것이었다.
애초에 경수가 아니라면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백현도 경수의 고집에 못 이겨 몇번 세훈을 만나고서는 답지 않게 순수한 모습에 동생이 생긴 것마냥 굴었었다. 정재계 뺨치도록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연예계에서 저런 얼굴을 하고 아무것도 몰라요, 하고 있으니 괜히 마음이 쓰인 것이다. 매번 저희를 깎아내리거나 이용하려는 사람들만 마주하던 두사람으로써는, 세훈의 태도가 새롭고 신기했다. 경매에 데려가줄까, 묻는 말에 귀까지 새빨개진 채 그래주실 수 있냐 묻는 얼굴은 가져본 적 없는 동생에 대한 환상을 불러 일으키기까지 했다. 결국 서로를 마주보며 눈빛을 교환한 백현과 경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세훈을 데려가자 결심했다. 찬열에게는 일언반구의 허락도 구하지 않았지만 백현이나 경수나, 일단 한번 하자고 정한 건 해버리는 성격이었으니까.
그러나 설마 찬열이 세훈을 직접 데리고 간다 할 줄은 몰랐던 터라 두 사람은 평소보다 서둘러 경매가 이루어질 P호텔로 차를 움직였다.





"나 조금 신기해."
"뭐가?"
"백현이 너. 다른 사람들한테는 무섭게 굴면서 세훈이는 신경도 많이 쓰고 걱정하잖아."
"그래서. 질투 좀 나?"
"질투는 무슨."
"세훈이 보면 너 닮아서 그래."
"세훈이가?"
"겉보기엔 강한 척, 다 아는 척 해도 당황하면 귀부터 빨개지고 눈도 계속 굴리고."
"야."
"예의차린답시고 딱딱하게 구는데 그러면서도 단어 하나하나 조심하려고 애쓰는 것 보면 왠지 우리 아들이 크면 저러지 않을까 싶어."
"우리 아들치곤 키가 크다."
"유전자는 언제나 진화 가능해. 경수 너 네 무덤 자꾸 팔래?"
"내 무덤만 판 것 같아?"
"뭣보다 네가 좋아하니까."
"...."
"다른 놈들이었으면 조용히 치워버렸을 건데. 네가 딱 동생 아끼듯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하는 거야. 동생 가져본 적 없는 네가 동생 생긴 것 같다고 좋아하니까. 걔도 너 형처럼 잘 따르기도 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조곤조곤 내려앉자 잠시 백현을 바라보던 경수가 핸들을 잡지 않은 손을 끌어다 깍지를 꼈다.





"뭐야, 뭐야. 오늘 내 생일이야?"
"생일이면 이게 다겠어?"
"아, 경수야아...."





핸들을 꾹 쥔 채로 앓는 소리를 낸 백현이 귀엽다는듯 예쁜 입술을 호선 그려 웃어보인 경수가 백현의 손등을 끌어 입을 맞추었다. 목덜미까지 잔뜩 붉어진 백현의 모습이 언제나처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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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난감하다는 듯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백현에게 듣기야 했다. 세훈은 소매가 조금 짧은 자켓의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내로라하는 최상위층 알파와 오메가들만 참석하는 경매인만큼 격식도 중요했고 참가하는 사람들도 중요하다고. 조심스럽게 제게 수트를 사주겠다는 백현의 말은 너무나도 고마운 말이었지만 세훈은 두 사람에게 더 이상의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서있다 금방 나오고 말 것을. 경매품에 정신 팔린 사람들이 제게 시선을 줄 리 없었다. 게다가 먼발치에서 필름을 볼 수 있는 걸로도 족한데 경매 전 해당 필름을 30분 가량 보여주기까지 한다니, 세상에 그런 호강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제 평생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제게 은혜를 갚는 것이라 말하는 핑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만족한 세훈은 백현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백현이나 경수가 아닌 알파와 동행해야 한다는 것은 조금 껄끄러웠지만 그가 이 경매의 책임자라는 말을 듣고는 이내 수긍했다. 보통 규모의 경매가 아닌데 뭐든 신중을 가하는 것이 그에게는 좋을 것이었다. 게다가 미연파 감독의 미봉작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인데, 알파와 동행하는 것이 뭐가 문제랴.




"오세훈씨?"




세훈은 저보다 위에 위치한 알파의 눈을 마주했다. 제가 건넨 인사에 가볍게 목례를 해보인 그는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세훈의 옷차림을 살핀 뒤 걸음을 옮겼다.




"옷부터 맞추죠."
"네?"
"오늘 있을 경매는 내가 1년을 준비한 경매에요. 참석하는 사람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신문 1면에 실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1면을 결정하는 사람들이죠."
"...."
"오늘 입는 옷, 시계, 구두. 그 사람들한텐 그게 당신의 가치고 명함이에요. 신세지고 싶지 않은 건지, 더 큰 걸 바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만큼은 완벽히 내 사람이 되야 합니다."




우아한 동작으로 손가락을 튕기자 기다렸다는 듯 달려온 수행원들이 가지각색의 수트와 구두, 시계와 같은 악세사리를 내보였다. 세훈은 조금은 비참한 마음으로, 조금은 체념한 마음으로 남자의 앞에 섰다. 조심스레 수트를 선물해주겠다는 백현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긴 했다. 다만 최대한 구석진 곳에서 필름만 살짝 보고 나갈 생각이었기에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세훈은 눈만 치켜뜬 채 남자를 올려다봤다. 망설임없이 곧장 몇가지를 가리킨 남자가 턱짓을 하자 수행원들이 다가와 수트를 내밀었다. 세훈은 순순히 그들을 따라 안내해준 방으로 들어갔다.




'신세지고 싶지 않은 건지, 더 큰 걸 바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변명이라도 할 걸 그랬나.
댓가를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고 처음에 확실히 선을 그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뭐, 지금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선을 그어봐야 별 효과도 없었겠지만. 새 옷인 티를 내기라도 하듯 주름 하나 없는 자켓을 걸친 세훈이 버릇처럼 소매 끝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제 몸에 딱 맞는 수트는 기성복에서 찾기 어려웠다. 어깨가 맞으면 통이 너무 크고, 허리가 맞으면 기장이 너무 짧았다. 프로필 촬영을 위해 처음으로 정장을 사러갔던 날, 세훈을 본 직원이 난감한 얼굴로 차라리 맞춤 정장을 하라고 했을 정도로 뭐 하나 맞는 옷이 없었는데. 이렇게나 딱 맞는 옷이 신기하고 낯설어 서있기 어색할 정도였다. 옷에 주름이 가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걸음걸이조차 잔뜩 신경쓰며 걷자 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던 찬열이 슬쩍 눈썹을 치켜떴다.




"어디 불편해요?"
"옷이 저한테 딱 맞네요."
"아. 백현이한테 물어봤어요. 뭐가 됐든, 일단 오늘 오세훈씨는 내 손님이니까."




별 거 아니네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찬열이 손짓으로 직원을 불렀다. 세훈은 눈 앞에 펼쳐지는 고급스러운 시계와 커프스버튼, 타이 핀 등을 보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고급스런 케이스 사이에 진열된 악세사리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럽게 느껴졌지만 찬열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이아몬드가 박힌 시계를 들어 세훈의 손목에 직접 차주었다.




"저기,"
"좀 궁금했어요."
"...."
"백현이나, 경수나. 답지 않게 오세훈씨에 대해서 좋은 얘기만 해대서."




퉁명스레, 차갑게 내뱉는 말과 전혀 다른 온도로 다정한 손길이 제 손목에 시계를 채워주었다. 세훈은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알파의 페로몬에 귀가 달아올랐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를 따라 깔리는 향이 생각보다 은은했다.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있자 불쑥 허리를 숙인 남자가 세훈의 발목을 덥석 잡았다. 세훈은 갑작스런 남자의 행동에 놀라 저도 모르게 그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동안 표정 하나 없이 남자의 지시를 따르던 사람들도 그의 행동에 눈이 커다래진 상태였다.




"기대 많이 하고 있습니다. 오세훈씨가 어떤 베타인지."




그를 만류하기 위해 허리를 숙이던 세훈은 순간 마주한 남자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베타. 생각지 못한 단어였다. 향이 강하지 않은 세훈은 언제나 당연하게 베타 취급을 받았고 굳이 의식하여 베타인 척 하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이 누구나 세훈을 베타로 생각했으니. 하지만 '우성' 이라는 단어가 붙은 이들에게도 자신은 여전히 베타라고 보여질까? 순간적으로 소름이 끼쳤다. 세훈은 무의식중에 그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떼어냈다. 남자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직접 세훈의 구두까지 신겨주었다.




"그러니까 실망시키지 마세요."




마침내 웃어보인 얼굴은 상당한 미형의 모습을 더 환하게 보여줬지만 세훈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다정함 뒤에 숨겨진 칼날이 턱 끝까지 들어온 기분이었다. 세훈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사로잡힌 것처럼,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도 세훈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아서 피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결국 남자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기까지 하자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든 세훈이 고개를 돌려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피하고나서야 너무 대놓고 피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사과를 하기는 더 이상할 것 같아서 부러 입을 다물었다. 잠시동안 아랫입술을 감쳐문 채 우물거리는 세훈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찬열은 이내 등을 돌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빠듯하네요. 서두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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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열은 생각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백현과 경수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를 직접 눈으로 보고 평가하고 싶었다. 정말 좋은 사람인 건지, 아니면 좋은 사람인 척 하고 있는 건지. 마주한 인상이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속내는 알 수 없다 여겼다. 저런 표정도, 눈빛도 모두 연기일 수 있다고. 안 그래도 연기로 먹고사는 사람인데 그까짓 표정 연기가 뭐가 어렵겠는가. 찬열은 세훈에게 홀랑 넘어간 두 사람을 대신해 날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부러 창피를 주듯 수트를 챙겨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퍼스널 쇼퍼들을 두고도 굳이 시계를 직접 채워주고, 그 자신이 허리를 숙여 구두를 신겨줬다.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 한눈에 보이는데도 부득불 제 손으로 그것을 해낸 것은 지난 삼십여년의 세월동안 겪어왔던 베타에 대한 경계심과 약간의 호감 때문이었다. 물론 호감이라고 부를 만한 감정은 찌꺼기만 남아 호감이라 칭하기도 어려웠지만 그 언젠가는 찬열도 베타에 대해 순수한 호기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제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는 베타는 저를 단순히 '우성' 이라는 이름으로 규제하여 판단하지 않을테니까. 물론 그것이 온전한 제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날은 그리 멀지 않았으나 한때는 그랬다. 답지 않게 세훈에게 풀어진 두 사람이 못마땅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부러운 마음도 있었다. 평소보다 더 날카롭게 그를 몰아붙인 것도, 약간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버릇인듯 입술을 가만두지 못하고 잘근거리는 그를 멀뚱히 바라보다 먼저 등을 돌린 찬열은 목이 쉬도록 제게 세훈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던 경수와 그게 걱정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그를 말리지 않던 백현을 떠올렸다.




"벽해라는 작품, 좋아한다고 했었나요?"
"네?"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보여줄 수 있는데."




은근한 시선으로 묻는 목소리는 눈을 번뜩 뜨이게 만들었다. 세훈은 여전한 미소로 저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을 마주했다. 작품을 보여준다는 남자의 말이 단순히 경매에서 선보이게 될 30분짜리 영상일 리는 없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천재 감독 미연파의 마지막 작품. 순수한 욕망과 왠지 모를 불편함 속에 세훈이 망설이는 사이, 찬열은 부러 요란스러운 행동으로 문을 열었다. 어찌보면 심술이었고 어찌보면 시험이었다. 제게 소중한 두 친구의 마음에 이미 쏙 들어버린 남자였다. 어떤 식으로든 부딪힐 거라면 그에 대한 제 태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모 아니면 도. 찬열은 그 어떤 태도도 상관없다는 듯한 얼굴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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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한번만, 키스 한번만 하던 것이 오분이 되고 삼십분이 돼버렸다. 결국 미리 예상했던 시간보다 훨씬 늦게 도착한 백현과 경수는 허겁지겁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편인 덕에 찬열을 발견하는 것은 항상 쉬웠다. 두 사람은 성큼성큼 찬열에게 다가갔다.




"왔냐."
"세훈이는?"
"오자마자 인사도 없이. 난 안 보이냐?"
"세훈이는.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갔어."
"갔다고?"
"걔가 왜. 너 애 괴롭혔냐?"
"이 자식들은 날 뭘로 보는 거야? 내가 뭐 누구 괴롭힐 상이야?"
"세훈이 울린 거 아니지, 너?"
"야, 도경수. 너까지 그러면 나 섭섭하다?"
"경수한테 네가 뭔데 섭섭을 해? 세훈이 왜 갔는데."
"몰라. 일 생겼다고 갔어."
"필름은? 보고 간거야?"
"뭐, 보고는 갔지."




찬열은 부러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돌렸다. 말 그대로, 정말 보고는 갔다. 실험과도 같은 저의 제안에 한참을 머뭇거리던 세훈은 결국 작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저었다.




'말씀만으로 감사해요. 제안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경매를 끝까지 보란 말을 할 새도 없었다. 세훈은 잠시 머뭇거리다 뒷목을 쓸어내리고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사실 고민 많이 했는데 안 되겠어요. 저한테 어울리는 자리가 아닌 것 같아서요. 기껏 초대해주셨는데 죄송합니다.'
'혹시 내가 한 말 때문에 그런 거면,'
'아니요.'
'....'
'그, ...님께서 신경써주신 건 너무 감사한데 아까 살짝 봤거든요. 모인 사람들 전부 뉴스나 티비로만 보던 사람들이더라고요. 솔직히 말하면, 제가 좀 쫄려서요.'
'...네?'




다시 떠올려도 웃음이 나왔다. 찬열은 입술 새로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렸다. 웃는 찬열을 보던 세훈은 하얀 제 뺨을 긁적이다 난감한 얼굴로 눈을 굴렸었다.




'제가 스물다섯살 평생을 제 주제 잘 파악하면서 살아온 사람인데, 여기 이렇게 참석해서 미연파 감독님 필름까지 보게 되면 욕심이 생길 것 같아서요.'





저를 보는 반듯한 눈에 그 순간 머릿속에서 합격! 합격! 하고 종이 울렸다. 찬열은 왜 경수가 그를 맘에 들어했는지, 백현이 어째서 그를 경계하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세훈은 욕심이 없었다. 원하기만 하면 자신을 KTX에, 아니 전세기에 태워 목적지까지 데려다줄 사람들을 데리고 세훈은 걷기를 자처하는 사람이었다. 찬열은 그걸 깨닫자마자 세훈이 제가 그동안 꿈꿔왔던 진짜 '친구'가 되어줄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 페로몬과 상관없이 온전히 나를 나로만 봐줄 사람.
목례를 한 뒤 멀어지는 세훈을 굳이 돌려세워 손에 명함을 쥐어준 것은 제 욕심이었다. 잘못 끼운 첫단추 덕에 세훈이 저를 껄끄러워하는 것 같긴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찬열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찬열은 어떻게든, 세훈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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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감해.
세훈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삐죽였다. 그 날, 제 욕심으로 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경매에 참석했던 세훈은 찬열이 쥐어주는 명함을 거절하지 못하고 가져왔다. 먼저 연락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기꺼이 저를 경매에 초대해준 찬열에게 감사 인사를 남기는 것이 맞는 것 같아서 간단하게 감사 인사를 남겼다. 그런데 그 뒤로 하루가 멀다 하고 찬열에게서 문자가 왔다. 내용은 별 거 없었다. 찬열은 소소하게 오늘 날이 춥네, 옷 따뜻하게 입으세요- 같은 의례적인 문자로 하루를 시작하고는 지금 회의중이에요, 지겹다- 같은 일상적인 문자로 하루를 채웠다. 처음에야 그 문자를 모른 척 씹기도 애매해서 어색하게 답장을 주었는데 세훈이 답장을 하면 찬열의 문자가 두배로 늘어났다.
혹시 내가 오메가인 걸 알았나. 우성은 역시 다른 건가. 세훈은 제게 꾸준히 문자를 하는 찬열을 보며 순간적으로 그런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찬열은 정말 순수하게 자신의 일상만을 털어놓았고 그 어떤 섹슈얼한 의도나 플러팅도 내비치지 않았다. 세훈은 그제야 자신이 찬열의 어떤 선 안에 들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의식하기도 전에 찬열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선 거다. 경수나 백현이야 만나면서 그걸 느꼈고 저 또한 경수와 백현을 제 안에 들였다지만 찬열은 달랐다. 세훈은 찬열이 어려웠다. 제게 신발을 신겨주며 했던 말 때문이었다.



기대 많이 하고 있습니다. 오세훈씨가 어떤 베타인지.



알고 한 말인지 모르고 한 말인지 모르겠으니 더 날이 섰다. 세훈은 또다시 점심 먹었느냐 묻는 찬열의 문자가 도착하자 한숨을 내쉬었다. 단 한번도 의식해본 적 없는 페로몬을 그 날 처음으로 신경썼다. 갈무리할 것조차 없는 페로몬인데도 혹시 새어나오지 않을까 몇번이고 확인했다. 보이는 태도로 봐서는 제가 오메가라는 걸 눈치챈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경수와 함께 있는 백현은 항상 페로몬을 철저하게 갈무리했고 혹시 순간적으로 페로몬이 새어나온다고 해도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조절했다. 백현은 우성 알파답게 왠만한 페로몬에는 적응이 된 세훈조차 버겁게 느껴질 정도로 상당히 무거운 향이었는데 되려 그것이 더 경각심을 갖게 해주어서 조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찬열은 우성인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은은하게 깔린 향이라 자꾸 몸에서 긴장이 풀렸다. 온 몸을 노곤하게 만드는 그 향은 그 날 경매에서 돌아온 세훈이 새벽까지 잠을 설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그래서 세훈은 그가 두려웠다. 자신도 모르게 홀리게 되는 그 향에 혹시라도 자신이 페로몬을 흘리기라도 할까봐.
차마 무시할 수 없는 문자에 짧게나마 답장을 보내면서 입술을 내민 세훈이 이내 저를 부르는 조연출의 목소리에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메라 세팅하고 바로 촬영이에요. 대기하세요!"
"네."





그러나 아무리 대단한 알파와 인맥을 쌓게 되었더라도 우선 촬영장에서의 세훈은 여전히 보조 출연자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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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은 인적이 드문 경기도 외곽에서 진행되었다. 드라마 촬영이 으레 그렇듯 빡빡한 스케줄 때문에 새벽에 시작된 촬영은 다시 찾아온 새벽을 맞고서야 끝이 났다. 장비까지 모두 정리된 새벽 1시, 스태프들의 호의에 차를 얻어탄 세훈은 연출팀의 차 한켠을 차지하고 앉아 스태프들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었다.





"여보세요? 네, 감독님!"




그러나 꽤 화기애애하게 이어지던 대화도 갑작스레 걸려온 감독의 전화에 뚝 끊겨버렸다. 예상치 못한 감독의 전화에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연출팀은 모두 조연출의 전화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의아한 얼굴로 전화를 받던 조연출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더니 그는 난감한 얼굴로 한참만에 전화를 끊었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어요?"
"중간에 씬 하나가 날라갔대."
"네? 뭐하다가요?!"
"몰라. 편집하다 잘못 건드린 것 같은데 그거 원본 어디 있을 거거든. 아, 그걸 또 언제 가서 찾냐."
"방송이 오늘 밤 10시인데 그걸 또 언제 찾아서 편집해요?"
"그러니까. 아, 진짜 미치겠네."
"지금 몇시야?"
"지금 1시 40분이요. 가서 그거 촬영본 찾으려면 빠듯하겠는데요."





연출팀 모두의 얼굴이 시꺼멓게 죽었다. 세훈은 갑작스런 상황에 잠시 눈을 굴렸다. 이 드라마는 주연을 맡은 배우가 워낙 변덕이 심해 평소 10시간은 기본, 심할 때는 일주일 내내 대기를 하다 그냥 돌아간 적도 있을 정도로 딜레이가 심했다. 덕분에 다른 드라마 팀과 달리 이 드라마의 연출팀은 유독 세훈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기회가 되면 나름대로 세훈을 챙겨주려 애썼다. 그 일환으로 오늘도 할증붙은 택시 대신 이렇게 차를 얻어탈 수 있게 된 것이었는데 만약 제 집에 들렸다가 방송국으로 돌아가려면 길게는 20여분까지 길거리에 시간을 버려야 했다. 방송국 근처이긴 하지만 차로 가는 길이 마땅치 않아 빙 돌아가야 하는 위치였기 때문이었다. 세훈은 조심스레 조연출을 불렀다.





"그럼 저는 이쯤에서 내려주세요."
"여기서요?"
"안 돼. 너무 어둡잖아요. 요새 세상 무서운 거 몰라요?"
"이렇게 건장한 남자를 누가 건드리겠어요. 게다가 전 베타인데. 걱정 말고 근처에서 내려주세요. 어차피 거의 다 왔고 저 데려다주시느라 돌아가는 것보단 제가 걸어가는 게 더 빨라요."
"그래도...."
"내려서 바로 택시타고 갈게요. 지금 시간이면 아직 버스 막차도 있어요."
"...그럼 미안한데 여기서 내려줄게요. 진짜 미안해요, 세훈씨."




조연출이 재차 사과하며 세훈의 어깨를 두드리자 연출팀 모두 저마다 사과를 건넸다. 세훈은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가방을 챙겨 차에서 훌쩍 내렸다.





"얼른 가세요. 저도 이만 들어가볼게요. 고생하시고요."
"푹 쉬세요, 세훈씨. 내가 다음에 커피 쏠게요!"





맘이 급하긴 한 건지 세훈을 내려준 뒤 잠시 인사를 하던 연출팀의 차량이 쌩하고 달려갔다. 세훈은 그런 차의 뒷꽁무니를 잠시 바라보다가 푹 한숨을 쉬었다. 택시나 버스를 타면 된다고 하긴 했지만 이 시간에 타는택시는 할증이 붙어 세훈이 감당하기엔 너무 비쌌다. 버스를 타면 좋겠지만 사실 이미 막차는 끊긴지 오래고.
괜히 연출팀이 신경쓸까봐 거짓말을 한 것이었는데 다행히 다들 제 말을 믿은 것 같았다. 세훈은 소매를 들춰 시간을 확인하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새벽의 찬 공기는 생각보다 반가웠다. 날이 좀 춥긴 했지만 입김이 새어나오는 날씨에도 새벽에서 느껴지는 그 특유의 향은 좋았다.
슬쩍 주변을 둘러본 세훈은 겉보기에도 멋들어진 건물을 올려다보고는 입김을 불어 건물을 가렸다. 연출팀이 내려준 곳은 고급 맨션과 오피스텔이 늘어진 동네라 세훈의 집과는 전혀 다른 별세계 같은 곳이었다. 자신도 언젠가 배우로 성공하면 저런 오피스텔에서 살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다가 어쩐지 저런 건물에 자신이 있는 모습이 엄청나게 어색할 것 같다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런 날이 오긴 할까.
혼자 걷는 새벽길이 따분해서인지 괜히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세훈은 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꺼내기 위해 뒤적거렸다. 가방에 넣어놨었나. 패딩은 물론 바지 주머니에도 없는 것에 잠시 멈춰 선 세훈이 뒤로 맨 가방을 앞으로 당겨 뒤적였다.





"...."





좀 전까지 내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어쩐지 뒷 머리칼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세훈은 최대한 자연스런 동작으로 가방을 한쪽 어깨에 맸다. 제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뒤에서도 작은 발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뭐지. 세훈은 불길한 기분에 가방끈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뒤를 돌아보기는 무서웠다. 근처에 불이 켜진 상가가 있나 찾아봤지만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찾기가 어려웠다. 세훈은 저 멀리서 보이는 불빛 하나에 희망을 건 채 걸음을 서둘렀다. 까마득한 거리이긴 했지만 익숙한 초록빛이 제 집 근처에도 있는 편의점 간판과 같았다. 어쩐지 점점 커지는 것만 같은 발소리에 여차하면 어깨에 맨 가방을 휘두를 작정으로 손에 힘을 준 세훈이 걸음을 서둘렀다.조금만, 조금만 더. 아직 한참 남은 불빛을 향해 뛰어갈지 고민하는 사이 덥석 어깨가 붙잡혔다. 세훈은 예상치 못한 손길에 당황하여 그 손길이 이끄는 대로 뒤로 당겨졌다.





"오메가지?"





속삭이는 목소리가 소름끼쳤다. 세훈은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가방을 휘둘렀다. 다행히 평소와 달리 오늘 가방에는 촬영을 위해 준비한 의상과 신발이 들어서 꽤 묵직했다. 가방에 얻어맞은 누군가가 억 소리를 내며 제 어깨에서 손을 떼자 세훈은 앞뒤 가리지 않고 앞으로 달려갔다. 일단 저기 저 편의점까지만 가면 무슨 수가 생길 것 같았다. 밝은 데다 CCTV까지 있는 곳이니 섣부른 짓을 할 리도 없고. 세훈은 필사적으로 달렸다. 아직 편의점까지 거리가 있어 한참을 달려야 했다.





"이 XX!"





그런데 뒤에서 들려온 욕지기가 생각보다 가까웠다. 세훈은 남자가 자신을 쫓아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섭다. 아주 짧은 순간의 접촉이었지만 남자는 알파가 분명했다. 게다가 제 페로몬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대놓고 내뿜고 있는 것으로 봤을 때, 남자의 목적은 명확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세훈이 오메가인 것을 눈치채고 달려든 것이었다. 세훈은 두려움에 자꾸 비틀거렸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사고' 에서 거의 대부분의 책임은 오메가가 진다. 페로몬을 조절하지 못해 알파를 유혹했다고 보는 것이다. 게다가 우성이라면 모를까, 열성에 불과한 세훈은 변명의 여지도 없이 전적인 책임을 지게 될 게 뻔했다. 일반 알파들은 잘 느끼지도 못할 하찮은 페로몬을 가지고 알파를 발정시켰으니 그건 분명히 오메가인 세훈의 잘못이라고 말이다.
들고있던 가방마저 떨어뜨린 세훈은 눈 앞에 보이는 횡단보도에 머뭇거리다 방향을 돌렸다. 횡단보도만 건너면 바로 편의점이 있었지만 드문드문 차가 지나가는 횡단보도를 무작정 건널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방향을 바꿔야 했던 세훈은 막막한 얼굴로 정신없이 주변을 살폈다. 고급 오피스텔 단지 근처긴 했지만 늦은 시간이라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대놓고 들리는 발소리가 요란하게 제게 가까워지자 세훈은 아예 단지 안으로 달려갔다. 남자는 끈질겼다.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세훈을 보며 희열을 느끼기라도 한 듯 낄낄대고 웃기까지 했다. 어떡하지. 너무 무서웠다. 차마 꺼내지 못했던 핸드폰은 던져진 가방 속에 있었고 세훈은 이 곳의 지리를 전혀 몰랐다. 아직도 뒤에 있을까. 쫓아오고 있나. 차마 뒤돌아볼 생각도 하지 못한 세훈이 두려움에 새어나온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코너를 돌다 누군가와 부딪히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괜찮으세요?"





좀 전의 알파와는 다른 페로몬. 다른 목소리.
세훈은 필사적으로 제 앞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살려주세요!"
"저기요?!"
"살려주세요...! 제발요!"




당황한 남자가 붙잡힌 다리를 빼내려 뒤로 물러서자 세훈은 다시 손을 뻗었다.





"제발 도와주,"
"세훈씨?"
"...."





박찬열.
세훈은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익숙한 얼굴이 당황어린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훈은 반사적으로 잡은 다리를 놓아주고 뒤로 물러났다.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
"세훈씨가 왜...,"




의아한 기색이 역력한 찬열이 미간을 구긴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세훈을 달래기라도 하는 듯 재차 부르는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그래서 더 두려웠다. 세훈은 온 몸을 덜덜 떨며 찬열을 바라봤다.
눈치 챘을까.
내가 오메가라는 거, 알았을까.





"일어날 수 있겠어요?"
"...."
"세훈씨?"




저를 부르는 찬열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등 뒤로 발소리가 들렸다. 세훈은 어깨를 움찔했다. 최대한 소리를 죽였지만 가까이 온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알파가 지금 세훈을 보고 있었다. 여전히 세훈을 노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는 세훈을 제 타겟으로 점찍은 게 틀림없었다. 대체 왜. 세훈이 불안감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찬열을 바라봤다.





"저 좀 도와주세요."














-














오늘은 평소답지 않았다. 늦은 시간까지 업무에 시달린 몸은 피곤함에 지쳐있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침대에 누워 한참이나 몸을 뒤척이다 일어난 찬열은 편의점이라도 들릴 요량으로 겉옷을 챙겨 집을 나섰다. 뭔가 먹고 싶다기보단 그저 바람을 쐴 목적이 더 강했기에 옮기는 걸음은 느긋했다. 평소라면 차라리 집에서 가볍게 운동을 하고 잠을 자는 걸 택했을텐데, 왠지 모르게 오늘은 변덕이 일었다. 그리고 그 변덕이 눈 앞의 세훈을 불러왔다. 찬열은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떠보이며 세훈을 바라봤다. 무엇에 놀란 것인지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세훈은 필사적으로 제 옷깃을 잡아당겼다.



도와주세요.



그에게서 들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말이라 더 놀라웠다. 어려운 일이 생겨도 손을 뻗기보다는 스스로 해결하고자 노력할 것만 같던 세훈이 제게 도움을 청하는 게 믿기지 않아 잠시 머뭇거리자 세훈의 얼굴에 초조함이 짙어졌다. 찬열은 서둘러 제 소매를 쥔 세훈의 손등을 감싸쥐었다.




"뭐든지요."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어떻게든 가까워지고 싶어 욕심이 나는 사람이었다. 찬열은 이게 다시 없이 좋은 기회라는 걸 깨달았다. 까칠하게 굴었던 저 때문인지 저를 불편해하는 세훈을 알았으니까. 그를 도우면 이 관계도 조금은 편해질 것이었다. 찬열은 세훈의 손을 놓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그런데 페로몬이 느껴졌다. 찬열은 잠시 머뭇거렸다. 세훈에게 억지로 쏟아부은 듯한 지독한 페로몬 틈새로 옅은 향이 났다. 상큼하고, 달콤한 향이었다. 찬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그 향을 좀 더 맡으려고 애썼다.






"저기...?"
"...아. 미안해요."





아닌가. 찰나의 향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아쉬움에 괜히 입술이 마른 찬열은 혀를 내어 입술을 축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똑바로 서자, 그제서야 근처에 있는 타인의 존재가 느껴졌다. 찬열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세훈의 몸에 페로몬을 뿌린 장본인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고보니 뉴스에서 종종 본 적이 있다. 늦은 시각 귀가하는 오메가들을 노려 페로몬을 쏟아붓고 억지로 히트를 유도한다는 쓰레기들. 하지만 세훈은 오메가가 아닌데. 이제는 베타들마저 노리는 건가.
불안한 얼굴로 눈을 굴리는 세훈을 보니 그가 얼마나 두려웠을지 감히 짐작도 가지 않았다. 찬열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고있던 가디건을 벗어 세훈의 어깨에 걸쳤다.





"어, 괜찮-"
"입는 게 좋겠어요."





은근히 풀어낸 제 페로몬을 가디건에 듬뿍 묻혔다. 세훈이 제 사람인 양, 그 어깨에 제 가디건을 둘러준 찬열이 페로몬이 느껴지는 곳을 똑바로 노려봤다. 경고성이 다분한 눈빛에 그림자 너머에 숨어있던 발끝이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일단 제 집으로 갈까요?"





남자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던 찬열이 마침내 세훈을 바라보자 세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끄덕였다. 아무래도 베타 남성에게 이런 일은 흔한 일이 아니니 많이 당황했겠지. 찬열은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처럼 붉게 물든 세훈의 귓가를 보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졸지에 제 페로몬을 뒤집어쓴 꼴이 된 세훈이 어떤 마음인지도 모르고, 찬열은 세훈을 제 집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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