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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나."
"왜?"
"저 박 선생님 진짜 싫어요."
"박 선생 그거 들으면 울걸."
"아니이! 진짜 왜 저러는 거래요."
머리를 쥐어뜯는 세훈의 얼굴이 피로로 가득했다. 그 얼굴을 무심히 바라본 경수는 젓가락을 놀려 아삭한 김치를 입에 넣었다.
"네가 좋다잖아."
"누가 후배를 그렇게 부담스럽게 예뻐해요. 좀 기분 나쁠 정도야."
"왜?"
"들어봐요, 선배. 원서 들고 갈 땐 무거우니까 들어주는 거 고맙다 이거에요. 근데 차트는...! 그거 하나가 뭐가 무겁다고 그것까지 들어준다는 건지 난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단 말이에요?"
"하하-"
"어제는 나한테 문도 열어줬어요."
"문은 너도 열어주잖아."
"그거는! 그거는 그냥 가는 길에 열어주는 거고. 그 선배는 휴게실에서 밥 먹다 말고 문을 열어주는 거에요. 난 그 선배가 어디 가려는 건 줄 알았어. 근데 문 열어주고 나 나가니까 잘 갔다 오라고 문 닫더라고요? 나는 처음에 나 놀리는 줄 알았잖아."
"박 선생 여자 형제밖에 없다더라. 집에서도 막내고. 처음 생긴 동생이라 그런 거 아니야?"
"동생을 예뻐한다기엔 정도를 지나치니까 그러죠. 나 도련님 대접 받을 때도 이 정도로 챙김받진 않았어요. 내가 뭐 병약해보이기라도 하나? 나 아파보여요? 이래 봬도 나 그 악명높은 CS 레진데?"
"야, 왜 슬픈 얘기 하고 그래."
"진짜로. 어제 그 선배가 나한테 수저랑 젓가락 챙겨주는 거 선배가 봤어야 돼."
"물은 안 챙겨주디?"
"안 챙겨줬겠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세훈은 귀여웠다. 경수는 어쩌면 저 귀여운 반응 때문에 찬열이 더 오버해서 그러는 걸지도 모른다는 걸 굳이 알리지 않은 채 웃음을 삼켰다. 큰 맘 먹고 샀다는 오렌지색 니트를 입은 세훈은 멀리서도 눈에 띌 정도로 귀여웠다. 경수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재잘거리는 세훈을 참새같다 생각하며 수저를 놀렸다.
"세훈아!"
"아이 씨."
"야야, 그래도 선밴데 표정 관리 해야지."
"선배가 제일 나빠."
"그래, 그래. 그럼 난 오붓한 선후배 사이 방해하지 않게 먼저 가볼게."
"아, 선배!"
"어차피 지금 들어가봐야 돼. 나 곧 수술 있어."
인상을 찌푸린 세훈이 아랫입술을 툭 내미는 것을 모른 척 자리에서 일어난 경수가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저만 해도 세훈의 심통난 표정이 귀여워 짓궃게 굴곤 했다. 준면은 악취미라며 혀를 내둘렀지만 저런 표정을 보면 괜히 장난을 치고 싶은 게 형 마음 아니던가? 경수는 뻔뻔한 생각을 하며 터지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경수가 자리를 비우자 기다렸다는 듯 그 빈 자리를 찬열이 차지했다. 세훈은 주인을 만난 개처럼 꼬리를 흔들며 저를 바라보는 찬열에게 인사를 건넸다.
"점심 드시러 오셨어요?"
"응. 세훈이 밥 먹고 있는 줄 았았으면 같이 먹을 걸."
"아, 뭐. 저는 거의 다 먹어서요."
"벌써? 반도 남았는데?"
"원래 입이 짧아요."
"그래도 먹어야지. 한국인은 밥심이라잖아."
미국에서 이십년 넘게 살아왔다던 찬열이 할 말은 아니다. 세훈은 말을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저를 챙겨주려 애쓰는 마음이야 고맙고 감사하지만, 솔직히 좀 부담스럽기도 했다. 자신은 오메가고, 듣기로 찬열은 오메가는 아니라고 했다. 제 입으로 자신이 알파라고 밝힌 적은 없었지만 CS(흉부외과) 휴게실에 들어왔던 찬열이 연신 주변을 둘러보며 안절부절 못하다 나가는 것을 보며 이미 그가 알파라는 것을 눈치챈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찬열이 이렇게 대놓고 자신을 챙기니, 그게 얼마나 부담스럽겠나. 찬열이야 세훈이 오메가라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해서 그냥 후배 챙기는 거라 할 지라도 세훈의 입장에선 오메가에게 알파가 지독하게 플러팅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그러니 찬열의 행동이 썩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도 않았고 작은 행동 하나도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더 안 먹어? 그럼 매점에서 뭐 사다줄까?"
물론 저 얼굴을 보면 제게 플러팅을 거는 확률은 0에 수렴하지만.
세훈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먹어요."
-
불편한 자리였다. 세훈은 한숨을 삼키며 버릇처럼 셔츠깃을 만지작거렸다. 목끝까지 채운 셔츠가 답답했다. 아닌 걸 알면서도 이게 내 목을 죄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확인하듯 목깃을 건드리자 와인잔을 들던 그의 형이 슬쩍 눈짓을 했다.
"세훈이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떼기 무섭게 제게 화제가 돌아온다. 세훈은 눈썹을 치켜뜨며 저를 돌아보는 아버지의 시선을 마주했다. 나이프를 놀리던 손을 멈춘 세훈의 형들이 덩달아 세훈에게 시선을 모았다.
"계속 그 병원에 있을 생각이야?"
"네."
"거기서 일해서 무슨 비전이 있다고. 너 나이도 있는데 이제 회사 들어와서 슬슬 일 배워야지."
"아버지, 저 회사 일 할 생각 없어요."
"회사 일도 결국 너 다니는 병원 일이랑 비슷해. 병원 재단 일이 뭐 다르겠어. 네 형들은 전부 경영 공부해서 그런 의료 지식들은 없으니까 네가 와서 형들도 도와주고 해야지."
"저 의사 되고 싶어서 의대 갔고, 병원 취직했어요. 회사 일 돕고 싶어서 간 게 아니라요."
"하루에 몇시간 자지도 못하면서 몸 고생하는 일이 뭐가 좋다고? 의사 아니더라도 사람 살리는 일은 충분히 많다. 나나 네 형들이 하는 일도 결국엔 병원 일이야. 게다가 네가 있는 병원, 그거 김 가네 병원이잖아. 올 거면 우리 병원에서 일 다닐 것이지 굳이 그 병원에 들어가야 됐어?"
"우리 병원 아니니까 들어간 거에요. 아버지 소유 병원으로 들어갔으면 거기서 제 뜻대로 의사 생활 못 할 것 같아서."
"세훈아."
"의사 되겠다는 거 반대하셔서 그럼 제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잖아요. 그 말대로, 저 제 힘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그럼 제가 하는 일도 아버지께서 함부로 하실 수 없다고 생각해요."
"함부로 한다고?"
"아버지, 오랜만에 모인 건데 이 정도만 하죠."
"막내라고 언제까지 네 어리광을 받아줘야 돼? 네 고집 하나 이루겠다고 막무가내로 집 나가면 다야? 걱정하는 가족들 생각은 안 하고 뭐하자는 거야?"
"저는 집 못 들어가요, 아버지."
"들어와! 잔 말 말고! 당장 들어오라고!"
평소 언성이라곤 높인 적이 없는 아버지였기에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세훈은 어쩔 줄 몰라하는 형들 사이로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훈아, 앉아."
"저는 할 얘기 다 했어요."
"오세훈!"
"가볼게요."
재차 저를 부르는 형들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도망치는 것에 가까웠다. 세훈은 신경질적인 손길로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원체 다정하고 묵묵한 성격의 아버지는 화가 나도 언성을 높이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제게 언성을 높인 것이 꽤 심란했다. 솔직히, 내심 오늘의 식사 자리를 기대했기에 더 그랬다. 고3 시절 오메가로 발현한 세훈은 상당히 필사적으로 제 형질을 숨겼다. 의대에 가겠다는 것은 제 꿈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도망이기도 했다. 대대로 알파 집안이었던 세훈의 집은 아버지부터 시작해서 세명의 형들이 모두 알파로 발현한 알파 집단이었다. 그런데 그 집안의 막내 오세훈이 오메가로 발현하다니. 아니라 해도 은연중에 깔린 오메가에 대한 편견이 만연한 사회였다. 알파 집안의 유일한 오메가는 세훈 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흠이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세훈은 필사적으로 의대에 진학하겠다고 주장했다. 별 말 없이 들어주리라 여겼던 아버지의 반대는 뜻밖의 일이었다. 세훈은 그 때 처음으로 아버지와 싸웠다. 언제나 저를 어린 아이 대하듯 귀여워하던 아버지의 굳은 얼굴을 그 때 처음 보았다. 복잡한 마음에 기껏 왁스로 정리한 머리를 헝크러트리고 잡아당긴 세훈이 호텔 로비를 벗어나자마자 한숨을 쉬며 울상을 지었다.
저라고 아버지의 뜻에 반기를 들며 고집을 부리고 싶은 건 아니었다. 집에 안 들어가겠다는 게 아니라 못 들어가겠다고 말한 순간부터, 제 마음은 한결같았다. 자신의 존재는 집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너무 사랑하는 가족들이지만 그래서 더 거리를 두고 싶은 거였다. 알파 집안에 오메가가 들어가봤자 서로 피해만 줄 뿐이다. 세훈은 결코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세훈아?"
복잡한 마음을 어디에 토해내야 할까.
짜증스러운 마음에 한숨만 푹푹 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반질거리는 구두코를 노려보기 무섭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세훈은 여기서 보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얼굴로 절로 눈을 키웠다.
"박, 선생님?"
하마터면 박찬열? 하고 말할 걸 겨우 삼키고 선생이라 부르자 커다란 눈이 반짝 빛난다.
"맞네? 세훈이 여기 어쩐 일이야?"
"약속이 좀 있어서요."
"아, 진짜? 나도. 이제 약속 끝나서 가려고 했는데. 같이 갈까?"
"...아뇨, 괜찮아요."
"차 가지고 온 거 아니면 타. 나 바로 병원 들어갈 건데."
세훈은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갈 곳이라곤 병원 밖에 없었다. 비번인 날에도 CS 휴게실에 틀어박혀 하루를 보내는 제가 찬열을 거절하고 갈 데가 있을 리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제안을 수긍하자 금세 얼굴을 밝힌 찬열이 허겁지겁 조수석 문을 열었다.
"...."
그런데 왜, 그게 왜 그렇게 짜증이 날까.
세훈은 커다란 눈을 빛내며 저를 바라보는 찬열을 보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대체 왜. 지난 번부터 유난스레 저를 챙기는 찬열의 행동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지나가고, 좀 전의 아버지와 했던 언쟁이 머릿속을 광광 울린다. 세훈은 주먹을 꼭 쥐었다.
아직도 제가 어린 아이인 줄 아는 것 같은 아버지나, 제가 병약한 오메가라도 되는 것마냥 챙기려 드는 찬열이나.
두 모습이 겹쳐 보였다. 세훈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찬열을 노려봤다.
"대체 왜, 그러시는 거에요?"
"응?"
부글부글 끓는 속과 달리 머리는 차가웠다. 빌어먹을 입 같으니.
내뱉는 말이 화풀이에 불과할 걸 알면서도 터진 입은 다물 생각을 않았다. 세훈은 후회할 걸 알면서도 입을 놀렸다.
"저를 무슨 어디 하나 아픈 오메가 대하듯 하시잖아요. 저 어디 안 아파요. 연약하지도 않고요. 왜 매번 저를 못 챙겨서 안달이에요? 제가 무슨 선배 오메가도 아니고, 임신을 했거나 어디가 아픈 사람도 아닌데 왜 그렇게 안달이냐고요. 그리고 설사 제가 어디가 아프든, 임신을 했든 본인이 원하지도 않는 이런 친절은 친절이 아니라 부담인 거 모르세요?"
줄줄 쏟아지는 말은 말이라기보단 칼에 가까웠다. 날이 선 말들에 당황한 찬열의 눈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올랐다. 세훈은 속으로 연신 욕을 짓씹으며 그 시선을 피했다.
화풀이다. 이건 명백한 화풀이야. 제 스스로가 너무 최악이었다. 짜증나. 하필 이런 순간에 나타나서 제게 친절을 베푼 찬열도 짜증나고, 이런 찬열에게 화풀이를 한 자신도 짜증난다. 아니, 아니. 그냥 내가 짜증난다. 오메가로 발현한 자신이. 그냥 내가.
입을 벌리면 기다렸다는 듯 또다른 칼을 쏟아낼까 입술을 꼭 다물고 잘근거리자 잠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찬열이 제 머리칼을 헝크러트렸다.
"...음, 그래서 안 탈래?"
-
진짜 짜증나.
세훈은 그 날 찬열의 차를 타고 오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 듯한 제 기분을 느낀 듯 찬열은 라디오만 틀어놓고 세훈에게 한 마디도 걸지 않았다. 세훈은 그게 고맙기도 하고 평소대로 행동하지 않는 찬열이 짜증나기도 했다. 세상에,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온갖 것에 날이 섰다. 차에서 내릴 때 고맙다는 말도 안 했다. 텅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저를 찬열은 한번 붙잡지도 않았다.
세훈은 악 소리를 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날의 자신은 최악이었다. 아니, 왜 화를 안 내냐고. 물론 화냈으면 내가 얌전히 그 화를 받아줬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그렇지! 저보다 어린 후배가 그렇게 건방을 떠는데 그걸 그냥 두고보기만 한 찬열이 답답했다. 속도 없지, 속도 없어. 괜히 사람 미안하게 말이야. 그 뒤로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제게 못 되게 군 적이 없다는 듯, 그런 일 따위 겪은 적도 없다는 듯 또 아무렇지 않게 세훈을 챙기는 거다. 세훈은 그게 불편하고 미안했다. 다음날이 되자 괜히 마음이 불편해져 찬열을 불러 사과를 하려고 했는데 세훈을 발견한 찬열은 평소와 전혀 다를 것 없는 얼굴로 제게 초코우유를 내밀었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라며, 라고 말하면서.
"사람이 그렇게 착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쵸?"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네가 잘못했어."
"아 선배애-"
차트를 들여다보는 준면이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볼펜을 끼적이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훈이 풀죽은 얼굴로 등에 뺨을 부볐다.
"선배는 내 편 들어줘야죠."
"경수가 네 1순위라는 말을 들은 뒤로 나는 변심했단다."
"앗, 어떻게 알았지?"
"스읍."
장난스레 저를 흘겨보는 준면에 밉지 않게 미소를 지은 세훈이 얼마 가지 않아 한숨을 쉬자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준면이 손에 쥔 볼펜을 가볍게 돌렸다.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해. 솔직한 오세훈 어디갔어. 다 죽었어?"
"다 죽어가요."
"그럼 살려서 미안하다고 해. 사과라는 게, 전하지 않으면 절대 모르는 거야."
"...그거 선배 얘기?"
"사과 안 하면 그 일은 잘못한 일로 남아. 사과해서 용서받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사과 안 해서 그 사람이 나한테 상처주고 잘못한 일."
"...뭐야, 선배 무슨 일 있어요?"
"아냐, 임마. 그냥 그렇다고. 그러니까 사과할 거면 빨리 해. 확실히 하고."
"알겠어요."
다시 차트를 넘기는 준면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핀 세훈은 복잡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세훈이라고 사과를 안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려 해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구는 찬열의 얼굴을 마주하면 말문이 턱 하고 막히는 것이다. 복잡한 마음에 연신 한숨을 쉰 세훈이 턱에 호두를 만들며 끙 소리를 내다 이내 걸음을 돌렸다.
"선배! 저 사과하러 갑니다!"
"화이팅-"
열없는 준면의 응원이 괜히 무겁게 느껴졌다.
-
"선배님."
"어? 어, 세훈아."
평소와 달리 안경을 쓴 찬열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세훈은 사무실에 들어서다 말고 보이는 모습에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노크를 했다.
"왜? 무슨 일 있어?"
"죄송해요."
"응?"
"지난 번에 호텔 앞에서요. 선배한테 그러려던 게 아닌데, 제가 그 날 좀 심란한 일이 있었어요. 아니, 이건 좀 핑계고. 솔직히 말해서 선배한테 좀 불만 있었어요. 저 그렇게 챙겨주시는 거 감사한데 부담스럽기도 해서 불편했어요.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말하는 거 진짜 잘못된 행동이었고 화풀이나 마찬가지였어요. 화풀이였어요. 선배가 어떤 욕을 하시든 저를 때리시든 저 진짜 다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어요. 죄송해요. 그 날 일 화내주세요."
"...어어, 그래. 세훈아. 일단 사과 고맙다."
"...."
"근데 사실, 나 화 안 났어. 네 말 듣고나서 나도 내 행동 돌아보니까 내가 너무 들떠서 오바한 것 같더라. 경수한테 물어봤더니 경수도 내가 좀 과하다고 했고. 네 말 듣고 나도 좀 반성했어. 안 그래도 주변에서 내 행동 때문에 괜히 말 나왔다고 해서 너한테 미안하기도 했고. 너가 그렇게 말 안 했으면 난 끝까지 너 그런 식으로 챙겼을지도 몰라. 그건 네가 잘 한 거야. 나한테 화풀이한 건, 지금 사과로 충분해. 나도 미안해."
진짜 이 형 뭐야.
세훈은 저를 보며 웃어보이는 찬열을 보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이건 착한 건지, 속이 없는 건지.
"그러니까 퉁치자. 난 그냥 퉁쳤다고 생각하고 아무 말 안했는데 맘에 담아두고 있는 줄 몰랐어."
"죄송해요. 그리고 감사해요."
"아냐. 나도."
이제부터 이 형 내 2순위야.
세훈은 농담처럼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보니 새삼 얼굴이 좀 잘생겨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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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바쁜 하루였다. 사실 안 바쁜 하루가 얼마나 되겠냐만은 오늘은 유독 정신이 없었다. 세훈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이리저리 오갔다. ICU(중환자실)에 올라가게 된 환자가 둘이나 있어 한시간마다 둘을 살펴야 했다. 혹시 이상이 생기면 곧바로 준면이나 예흥을 콜해야 했기에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중간중간 ER(응급실)에 CS 트랜스퍼transfer(전과)가 들어오면 달려가서 그걸 처리하고 환자 정보에 대해 확인해 경수에게 전달했다. 그 뒤엔 차트에 기록된 오더를 기입하고 흉부외과 병동에 들어오는 콜을 확인해 환자들을 살피거나 ER 콜을 확인해 내려가야 했다. 한시간에 두세번을 1층에서 13층까지, 19층에서 지하 2층까지 내려가는 형식으로 오갔다. 그러고나니 걸음걸이마저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드디어 콜 없이 잠잠해진 핸드폰에 겨우 주저앉은 세훈은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주저앉은 것도 아랑곳않고 고개를 젖혔다. 하루종일 베드를 내려다보느라 허리가 뻐근했다. 쭉 뻗은 팔을 이리저리 꺾고 돌리자 근육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세훈은 끙 소리를 내며 깍지 낀 손을 힘껏 뻗었다. 그러나 여유 좀 느끼려는 세훈을 못 보겠다는 듯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둔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세훈은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아, 진짜...."
요란하게 울리는 콜은 ER이었다. 세훈은 죽겠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걸음을 서둘렀다. 병원 스태프나 보호자들이 정신없이 오가는 ER은 그냥 주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혼이 빠졌다. 데스크에 콜 내용을 확인하고 베드로 다가간 세훈은 아무 생각없이 환자를 확인하다가 몸을 굳혔다.
아이. 어린 아이였다.
가운을 입은 세훈을 발견한 보호자가 어서 와서 아이를 확인해달라 손짓하자 절로 긴장이 됐다. 세훈은 떨리는 손을 몇번 쥐었다 편 뒤 차근차근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여기 베타딘Betadine(소독약) 준비해주세요."
"네."
"보호자분 잠시 나와주시겠어요?"
"네."
"혈관에 주사기로 관을 삽입해서 라인을 잡아야 해요. 일단 라인 잡고 약물 주입해야 되니까 베드에서 좀 물러나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불안한 얼굴을 한 부부가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세훈이 장갑을 끼는 동안 환자에게 다가간 간호사가 베타딘에 적신 솜을 손목에 문질렀다. 소독방포로 손목 주변을 덮기까지 마치자 절로 입술을 깨문 세훈이 주사기를 손에 쥔 채 머뭇거렸다. 할 수 있어. 몇번이고 되뇌었던 말을 다시 곱씹으며 조심스레 주사 바늘을 밀어넣었다.
"...."
피가 제대로 차지 않는다. 아니야. 잘못 찔렀다. 세훈은 땀이 나는 손을 다시 한번 쥐었다 편 뒤 주사 바늘을 빼냈다. 다시. 할 수 있어. 촉지로 동맥을 파악하고 주사기를 고쳐들었다. 하자. 할 수 있어. 피부 위로 다가가는 주사 바늘 끝이 덜덜 떨려왔다. 숨이 크게 쉬어지고, 시야가 어지러웠다. 제발. 세훈은 필사적으로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할게."
핏줄까지 불거진 손등을 원망스레 쏘아보며 있는데 불쑥 나타난 목소리가 손등을 감싸쥐었다. 세훈은 고개를 돌려 주사기를 가져가는 찬열을 바라봤다.
"오늘 십분도 못 쉬었지? 가서 좀 쉬어."
다정한 말은 저를 배려해주는 것이 분명했는데도 기쁘지 않았다. 세훈은 말없이 베드에서 물러섰다. 저와 달리 능숙하고 깔끔한 손놀림으로 혈관을 찾는 찬열의 손이 보였다. 카테터까지 밀어넣는 것을 확인하자 맥이 풀린 세훈이 도망치듯 ER을 벗어났다.
레지던트가 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던 날, 멋모르고 행했던 A-line은 여전히 세훈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어린 아이는 혈관이 얇고 약해 주사 바늘을 쉽게 피했는데 찔러넣으면 피해가고, 다시 찔러넣으면 숨어버리니 자신만만했던 처음과 달리 식은 땀이 날 정도로 애를 먹었다. 그래도 겨우 연결을 했다 싶으면 손목에 연결된 카테터의 느낌이 이상한듯 아이가 자꾸 바르작거렸다. 안 그래도 주사 바늘이 무섭다며 몸부림치는 아이 덕에 네번이나 바늘을 찔러넣어야 했는데 아이가 자꾸 불편하다고 몸을 뒤채니 손목에 연결된 라인이 온전히 자리할 리가 없었다.
아이도, 저도 완전히 지친 상태로 겨우 다시 라인을 연결하자 그제야 온 몸에 힘이 탁 풀렸다. 제가 부족해서 아이를 아프게 한 건 아닐지, 제가 너무 서툴러서 다른 사람이면 한번에 할 수 있는 것을 헤맨 것은 아닐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죄책감과 무력감에 마음이 불편해진 세훈은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급한 일이 있으면 콜이 올테니 그 때까지라도 잠시 생각을 비우고 싶은 마음에서 벌인 일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 일이 벌어졌다. 뒤늦게 아이의 손목에 남은 자국을 발견한 보호자가 데스크를 찾아와 처치를 한 의사에 대해 물었다. 아이의 상태에 대해 확인하려 하는 것으로 판단한 데스크에서는 아이의 주치의로 배정된 경수를 불러줬고 그 때까지 아무런 내색없이 그가 오길 기다리던 보호자는 경수를 보자마자 손을 날렸다. 뒤늦게 주위에 있던 이들이 달려와 보호자를 막긴 했지만 흥분한 그는 몸부림을 치며 난동을 부렸다. 안전 요원이 달려오고, 끝내는 경찰이 달려올 때까지 난동을 멈추지 않은 그는 경찰에게 끌려가면서도 경수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들은 세훈은 하얗게 질려 경수를 찾았는데, 경수는 되려 덤덤한 얼굴로 베드에 누워 세훈을 반기더라.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한 세훈이 연신 죄송하다 사과하자 경수는 되려 웃음을 터트렸다. 경수라고 이런 일을 겪지 않았던 것이 아니기에, 경수는 차라리 그 보호자를 세훈이 직접 만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그러나 세훈은 아니었다. 저 때문에 벌어진 일에 애꿎은 경수가 피해를 입었으니 그로 인한 자책감이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세훈은 콧등에 아이스팩을 올려놓은 채 저를 보던 경수의 얼굴을 잊지 못했다. 경수뿐만이 아니었다. 그 날 보호자를 말리다 그의 팔꿈치에 눈을 다친 준면도, 카트에 부딪혀 손목을 삔 김 간호사도 모두 마음의 빚이 되었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며 모두가 웃어넘겨도 그랬다. 제법 유복한 집안의 막내 아들로 자라면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적 없이 살아왔다 자부했던 삶에 남은 첫 발자국인데 그리 쉽게 지워질 리 없었다. 이제 고쳐야지, 극복해야지 하면서도 어린 환자들을 보면 몸이 굳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 때의 어려움이 떠올라서, 그 때의 자신이 떠올라서.
다른 일들은 모두 손에 익어 제법 능숙해졌는데도 이랬다. 한심하고, 화가 나고 답답하고. 참을 수 없는 마음에 제 머리칼을 쥐어뜯듯 쓸어넘긴 세훈이 한숨을 쉬며 그 상태로 눈을 질끈 감았다.
대체 언제가 되야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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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훈아."
머쓱한 얼굴을 한 찬열이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었다. 세훈은 어색한 마음을 숨기려 테이블 밑으로 손을 내렸다. 마음이 불편하면 손부터 괴롭히는 버릇 때문이었다. 그러나 채 추스르지 못한 표정 덕분에 세훈의 속내를 눈치챈 찬열이 커다란 눈을 굴리며 조심스레 그 곁으로 다가섰다.
"아까 내가 끼어들어서 미안해."
"제가 사과 드려야죠. 아깐 죄송해요."
"아이들한테만 그래?"
"...네."
한박자 늦게 대답이 나왔다. 세훈의 곁에 앉은 찬열이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을 꺼냈다.
나도 사실 그런 거 있어.
"예전에 CPR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 사람이 오메가였어."
"...."
"CPR을 하다보면 힘드니까 내가 페로몬 조절이 안 됐었고. 다음 날 바로 경찰이 찾아왔더라."
알파인 의사들에게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CPR심폐소생술은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환자의 심장에 압박을 주어야 하는 일이고 이를 행하다 보면 몇시간 동안 러닝을 한 것처럼 상당한 체력 소모가 벌어진다. 그러다보면 땀이 나고, 땀에서는 페로몬이 새어나온다. 오메가들은 여러가지 억제제를 통해 이런 것을 차단할 수 있지만 알파는 아니었다. 의도한 게 아니더라도 페로몬이 새어나오기 때문에 그로 인한 문제가 종종 벌어졌다. 때로는 알파인 의사가, 때로는 알파인 환자가. 억울한 누명을 썼고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 악의적으로 의사의 직책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누명을 벗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다. 세훈도 종종 겪는 일이었다. CPR을 하고 있으면 다가와서 알파냐고 묻는 무례한 사람들이나, 예쁜 오메가가 진찰해주면 좋겠다며 말하는 사람들.
때때로 의사라는 직위를 이용해 누군가를 압박하고 페로몬을 사용했다는 의사들을 보면 더 화가 났다. 누군가를 살려야 하는 의사의 의무를 상실한 채 페로몬에 자신을 저버리는 이들을 보면 자신의 가운마저 바닥에 처박힌 기분이었다. 세훈은 복잡한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찬열을 바라봤다.
"그래서 CPR을 못 했어. 웃기지? 정말 기본적인 거잖아. 누군가를 살리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호흡을, 심장을 돌리기 위한 일."
"...."
"응급 환자가 들어오면 처치부터 신경써야 하는데 환자의 시크릿 젠더부터 확인했어. 오메가일까, 베타일까, 알파일까."
"...."
"그러니까 내가 더 이상 의사같지 않더라."
턱을 괸 채 저를 보던 찬열은 어느새 반듯한 자세로 앉아 저를 보고 있었다. 세훈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할 지 몰라 침묵했다. 그 침묵이 되려 기꺼웠는지 찬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눈 앞에 환자를 두고 망설이고 있는 게 세상에서 제일 끔찍했어. 숨을 쉬지 못하는 환자를 두고 이 환자의 시크릿 젠더를 확인해야 하는 거, 망설이는 거."
"...."
"세훈아."
"네."
"근데 결국, 다 환자더라."
"...."
"어린 아이든, 오메가든, 알파든. 결국 모두 환자라고."
"...."
"조금 다를 뿐이야. 좀 더 까다로운 환자, 좀 더 페로몬에 신경써야 하는 환자, 좀 더 조심해야 하는 환자."
"...."
"물론 내 말로 네가 단번에 그 일을 극복해내거나 할 수는 없겠지만. 이건 좀 도움이 되겠지."
찬열은 이를 드러내 웃으며 한켠에 숨겨놨던 지퍼백을 들어올렸다.
"이거...."
"A-line. 백번 해서 백이십번 성공하면 돼. 그럼 누구 앞에 서든 할 수 있어. 원래 모든 일은 다 그렇잖아?"
"...하지만 동맥 잡는 걸 어떻게 연습해요."
"왜 못 해?"
"네?"
"여기. 보이지? 나 운동 열심히 해서 핏줄 완전 잘 보여! 예전에 연습할 때도 다들 내 팔에 하고 싶다고 난리였다니까?"
"...지금 저보고 선생님 팔뚝에다가 연습을 하라고요?"
미친 거 아니야?
세훈은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찬열을 바라봤다. 가운을 걷은 찬열은 핏줄이 불거진 팔을 내밀고 해맑게 웃었다.
"빨리."
"...아니."
"세훈아."
세훈은 저를 부르는 찬열의 목소리에 손에 쥔 지퍼백을 구겼다. 아주 웃기는 사람이다. 선이 뭔지 모르는 사람처럼 이렇게 쉽게 다가온다. 그래놓고 선을 넘어온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또 쉽게 물러난다. 바스락거리는 지퍼백을 내려다본 세훈이 제게 내밀어진 찬열의 손까지 바라봤다. 진짜 웃기는 사람이야.
-
세훈은 그 날 찬열의 손목에 다섯번이나 바늘을 찔러넣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며 손을 물리는 세훈의 손을 끌어다 제 쪽으로 당긴 것은 찬열이었다. 결국 양쪽 손목에 나란히 남은 주사 바늘 자국 위로 거즈를 붙이고도 찬열은 웃었다. 세훈은 뻐근할 게 뻔한 손을 가지고도 웃어보이는 찬열이 미안하면서도 좋아서 입술만 꾹꾹 괴롭혔다. 핏줄이 터져 멍이 든 팔을 보고도 찬열은 아픈 내색 하나 없이 콜을 받아 나갔고 혼자 남은 세훈은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다. 워낙에 살인적인 업무로 유명한 흉부외과였으니, 당연하게도 찬열은 새벽 내내 돌아오지 않았다.
"잘 잤니?"
그래서 세훈은 눈을 뜨자마자 저를 보고 있는 찬열의 눈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온 몸을 퍼덕거릴 정도로 움찔하며 몸을 일으키자 덩달아 놀란 찬열이 양손으로 휘저으며 왜, 왜! 언성을 높혔다.
"왜 여기 있어요?"
"밥 줄려고?"
밥을...!
세훈은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른 세수를 몇번 하자 잠이 싹 달아났다. 한켠에 걸어놨던 가운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세훈은 아직 회진까지 시간이 남은 것을 보고 쌓인 카톡을 확인했다.
"세훈아, 어서 와서 먹어."
"저는 괜찮아요."
"이거 내 추억이 담긴 건데?"
"네?"
"매일 편의점에서 사먹는 김밥 질렸잖아.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분식집 김밥이야. 나 초등학교 때 가서 떡볶이 사먹던 덴데 아직도 있더라. 보고 바로 사왔어. 얼른 먹어."
바스락거리는 봉지 안에서 김밥을 꺼낸 찬열이 짠, 소리를 내며 단무지를 꺼냈다. 젓가락 하나 꺼내는 것도 효과음을 내며 박수를 치는 꼴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 세훈이 순순히 테이블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은박지에 싸인 김밥은 고소한 깨소금 향을 솔솔 풍겼다. 아침이라 입맛은 없었지만 먹는 시늉이라도 하자 싶은 마음에 불룩한 은박지를 만지작거리자 기대감 어린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찬열이 눈을 빛냈다.
"까줄까?"
"....."
"아하, 미안. 먹어, 먹어."
괜히 퉁을 놓으면 사람 좋게 웃어보인다. 세훈은 찬열이 내려놓은 나무젓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찬열을 흘깃거렸다. 핸드폰을 확인하는 얼굴이 피로해보였다. 김밥 사올 시간에 좀 더 자지. 기분이 좋으면서도 괜히 모가 났다. 세훈은 입을 열면 튀어나올까 심술이 나는 마음을 꼭꼭 씹어 삼켰다.
"안 드세요?"
"응? 아니. 너 많이 먹어."
안 그래도 부족한 인원 덕에 모두가 바빴다. 민석이 새로 부임하면서 스태프로 찬열과 예흥을 데려왔지만 쏟아지는 업무에 비해 사람이 너무 적은 탓이었다. 수술이라도 들어가면 기본 2, 3시간씩 발이 묶이니 일단 CS 콜이 들어오는 건 무조건 세훈이 달려가야 했다. 경수는 더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건 물론이거니와 외래 진료를 보거나 주치의를 맡은 환자 케어까지 해야 했다. 그나마 세훈이 CS로 들어오는 콜을 전담하다시피 소화하고 차트 오더를 제가 정리하겠다 나선 탓에 겨우 눈은 뜨고 다니는 것 같았지만 꽤 아슬아슬했다. 누구 하나 걸리기만 하면 당장에 찢어죽일 기세로 눈을 뜨고 다니는 경수의 얼굴을 떠올린 세훈이 절로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준면도 근래에 꽤 날이 선 듯 해보여서 최근에는 거의 찬열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으아."
"제가 갈까요?"
"아냐. 교수님 콜이야. 먹어. 나 갔다 올게."
들어온지 얼마나 지났다고 울리는 콜에 앓는 소리를 낸 찬열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 안타까운 모습에 손을 뻗은 세훈이 핸드폰을 달라 종용했지만 됐다며 세훈의 말을 거절한 찬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꼭꼭 씹어먹어."
진짜 동생 대하는 것도 아니고. 어린 막내를 대하듯 달래는 말투로 인사말을 대신한 찬열이 휴게실을 나서자 그제서야 김밥 하나를 입 안으로 우겨넣었다. 저한테 이렇다 할 성애적 감정은 하나도 없이 정말 말그대로 동생이란 생각에 아낀다는 게 괜히 분했다.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
아작아작 씹히는 단무지 소리가 살벌하게 느껴졌다. 세훈은 애꿎은 단무지를 찌르며 괴롭혔다.
"...짜증나."
때마침 울리는 콜이 왜 반가웠는지. 세훈은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의식적으로 생각을 접었다.
-
단순한 트랜스퍼Transfer(환자의 담당 과 이전) 콜이라고만 생각해서 나온 게 화근이었다. 차트 작성이 끝나고 경수에게 전달하기 무섭게 울린 콜에 17층에 있는 ICU중환자실에서 환자를 체크하다가 응급 환자 콜을 받고 1층으로 내려왔다. 세훈은 고르지 못한 숨을 어거지로 삼키며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하나, 둘, 셋, 넷-"
갑자기 의식을 잃은 환자라고 했다. 머지 않아 구급차가 도착할테니 바로 가서 환자를 맞으라는 말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는 것도 무시하고 달려왔는데 그 새 저보다 먼저 도착한 찬열이 이미 베드 위에 올라가 CPR을 하고 있었다. 세훈은 거친 숨을 고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제 앞을 지나가는 베드를 움켜쥐고 밀었다. 눈만 굴려 마주친 시선에 슬쩍 눈인사를 하자 커다란 눈이 부드럽게 휘어진다. 그 모습을 마주하자 왠지 뒷통수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어 시선을 피한 세훈이 손에 쥔 베드를 좀 더 세게 밀었다.
"인투베이션intubation(기관내삽관) 먼저 준비해주세요. 세훈아, purse펄스(맥박) 어때?"
"확인 안 됩니다."
EKG패드를 붙이기 무섭게 AED(제세동기)를 확인한 세훈이 고개를 젓자 여직 CPR을 하고있던 찬열이 고개를 돌렸다.
"베타딘 준비해주세요."
"네!"
"세훈아, CPR 좀."
"네."
인투베이션을 위해 베드에서 내려온 찬열이 핸들에 끼운 러링거스코프laryngoscope blade(후두경)를 넣어 성대 등을 확인한 뒤 E-tube를 단번에 삽입했다. 인투베이션을 위해 잠시 CPR을 멈췄던 세훈은 능숙하게 이를 진행하는 찬열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양 손목에 거즈를 붙이고 있는 모습이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시계라도 차던가. 안 그래도 길쭉한 팔다리 덕에 의사 가운이 짧아 드문드문 손목이 드러났었다. 그런데 처치를 위해 장갑을 끼고 소매를 걷으니 안 그래도 눈에 띄던 손목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말은 안 해도 놀란 눈을 한 간호사가 찬열의 손목을 흘깃거리는 걸 발견한 세훈이 절로 입술을 꾹꾹 거렸다.
"18게이지 주세요. 에피Epinephrine(심근력 강화제) 원 앰플도요."
간호사에게 손을 뻗는 찬열을 못 본 척 고개를 숙여 다시 CPR을 시작하자 빠른 손놀림으로 에피를 건네받은 찬열이 18게이지를 통해 환자에게 주사를 놨다.
"펄스. 세훈아, 손 떼봐."
"...60에 40. 돌아왔어요."
"...후아."
팔이 후들거렸다. 세훈은 어느새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베드에서 내려오자 자연스레 그를 부축한 찬열이 세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좀 쉬어."
"선생님이야말로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못내 마음쓰여 걱정을 건네자 불퉁한듯 다정한 대답이 돌아온다. 찬열은 아닌 척 저를 신경쓰는 듯한 세훈의 태도가 기분 좋아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으하하-"
그러나 오고가는 훈훈한 걱정들과 달리 냉정한 핸드폰은 요란하게 울려댔다. 찬열은 콜이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들며 얼굴을 구겼다.
"둘 다 못 쉬겠다."
웃기다는 듯 잔뜩 구긴 얼굴에 세훈도 입술을 꾹 감쳐물었다.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을 가운 주머니에서 꺼내들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찬열이 먼저 손을 흔들었다. 이따 보자.
-
겨우 끝이 났다. 세훈은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올렸다. 물론 완전히 끝났다고 단언할 순 없겠지만 갑자기 오는 ER 콜만 아니라면 오늘 밤은 휴식이었다. 세훈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휴게실로 가는 발걸음도 덩달아 무거워졌다. 크록스를 직직 소리가 나도록 끌며 휴게실 문을 연 세훈이 참았던 하품을 길게 내뱉었다.
"선생님?"
"어, 세훈아."
"거기서 뭐 하세요? 안 쉬세요?"
"응, 나 교수님이랑 할 얘기가 좀 있어서."
"이제 겨우 쉬는 사람 붙잡아서 무슨 말을 하려고."
"쉬어. 금방 올게."
표정이 좋지 않은 찬열에 괜히 마음이 안 좋아진 세훈이 입술을 내밀자 그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찬열이 옷걸이에 걸어놨던 가운을 다시 들었다. 몸이 안 좋은 건지, 아니면 기분이 안 좋은 건지. 아닌 척 해도 평소와 다른 표정을 몰라볼 리 없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나가는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머뭇거리던 세훈이 끝내 문이 닫힐 때까지 찬열을 불러세우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달칵- 문이 닫히고 휴게실이 조용해지자 슬쩍 뻗었던 손가락이 안으로 굽어졌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제 마음이 어떤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는지 알면서도 모른 척 고개를 돌린 세훈이 괜히 뒷목을 쓸었다.
"어?"
빈 테이블을 보자마자 불현듯 떠올랐다. 김밥. 찬열이 사다준 김밥.
세훈은 침착하게 책상 옆에 자리한 선반을 확인했다. 갖가지 인스턴트 식품이 쌓인 선반은 변함이 없었다. 설마. 조금 빠른 걸음으로 냉장고를 향해 걸어가 문을 열자 찬기가 확 끼쳤다. 세훈은 날짜가 아슬아슬한 우유나 경수가 갖다놓은 큼지막한 김치통을 이리저리 밀어내며 은박지를 찾으려 애썼다. 온기가 느껴질 정도로 따뜻했던 김밥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제발. 세훈은 마른 세수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발 아니어라. 입을 가린 세훈이 좀 전까지 찬열이 서있던 쓰레기통 앞에 섰다.
"...."
볼품없이 버려진 은박지와 그 안의 김밥.
세훈은 절로 입을 막았다. 겨우 하나 먹은 터라 먹은 티도 나지 않았다. 갑자기 울린 콜이 짧게 끝날 거라 예상한 제가 김밥을 그대로 두고 나간 게 화근이었다. 아마 휴게실에 들른 누군가가 쉰 김밥을 발견하곤 버린 거겠지.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찬열이 기껏 사준 김밥을 하나밖에 먹지 못하고 버린 건 아까웠지만 갑자기 울린 콜 때문에 그런 거니까.
문제는, 찬열이 저보다 먼저 버려진 김밥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찬열이 휴게실을 나설 때까지 세훈은 은박지조차 까지 않은 채 나무젓가락만 만지작거렸고 찬열이 나선 뒤에야 겨우 하나를 집어먹었다. 찬열의 입장에서는, 일부러 사다 준 김밥을 한 입도 먹지 않고 몰래 버린 사람인 거다. 내가. 오세훈이.
세훈은 잠시동안 숨도 쉬지 못하고 멈춰섰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모든 행동을 멎고. 몇초를 그러고 있다가 마법에서 풀린 사람처럼 번뜩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찬열이 오해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찬열이 이걸 봤고 그것 때문에 마음이 상해 자신을 피한 거라면.
얇은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괴롭히며 핸드폰을 꺼내든 세훈이 곧장 찬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응, 세훈아.
"어디에요?"
-응?
"어디시냐구요, 선생님."
-지금 잠깐 교수님이랑 대화 중이야. 무슨 일 있어?
"저랑 얘기 좀 해요."
-지금?
"어느 교수님이랑 얘기 중인데요? 제가 거기로 갈게요. 앞에서 기다릴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세훈은 수화기 너머의 찬열이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훤히 보였다.
"...어디에요?"
-응?
"교수님 뵈러 간 거 아니잖아요. 선생님 지금 어디시냐고요."
-세훈아. 일단 내일 얘기하면 안 될까? 나 지금 정말 일이 있어서 그래.
"내가 갈까요, 선생님이 오실래요?"
-....
"기다릴게요."
세훈은 과감하게 전화를 끊었다. 대답은 없었지만 찰나의 망설임으로 찬열이 저를 피하지 못한다는 걸 느낀 덕이었다.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얼마나 기다렸을까. 십분이 채 되기도 전에 휴게실 문이 열렸다. 문 사이로 드러난 곤욕스러운 얼굴이 머뭇거리며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자 세훈은 묵묵히 기다렸다. 한참동안 세훈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던 찬열이 커다란 손으로 이마를 쓸어내리며 결국 휴게실 안으로 완전히 들어왔다. 달칵, 소리와 함께 닫히는 문 소리를 잠시 듣고 있던 세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훈아."
성큼성큼 다가오는 세훈의 기세에 놀란 것인지 찬열이 곤란한 얼굴로 다급하게 세훈을 불렀다. 그러나 걸음을 멈추지 않은 세훈은 찬열의 한걸음 앞까지 다가왔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단단해서 찬열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무슨 말을 할까. 어쩌면 말이 아닌 행동을 보일지도 모르겠다. 제가 싫다고 하려나. 아, 이렇게 미움받은 적은 없었는데.
"때려요."
"...어?"
"한 대 치라구요."
"내가? 누굴, 너를?"
찬열은 안 그래도 큰 눈이 쏟아질 듯 크게 뜨며 저를 가리켰다. 단단하게 굳은 세훈의 입술이 못마땅하다는 듯 양쪽으로 늘어났다. 찬열은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저를 가리키는 손가락을 내리지 못했다.
"지금 저한테 화나셨잖아요. 치세요. 한 대 맞고, 제가 딱 설명 드릴게요."
"아니, 내가 왜 너를 때려."
"화나셨잖아요."
"화났다고 다 때려?"
"선생님 입장에서는 맞을 만하다고 느껴지니까?"
"세훈아."
"어서요."
"안 그래도 돼, 세훈아. 나 화 안 났어. 이 정도는 별 거 아니야. 나 괜찮아."
"이게 어떻게 별 거가 아니에요?"
"...."
"성의를 완전 무시한 거잖아요. 나 생각해서 사온 거, 내가 먹지도 않고 버린 꼴이잖아요 지금. 근데 뭐가 괜찮아요? 뭐가 화가 안 나? 그게 말이 돼요?"
"많이 겪어서 괜찮아. 내 애인이, 아-"
아차하는 얼굴로 찬열이 제 입을 막았다. 세훈은 경악어린 얼굴로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혔다.
"애인 있어요?!"
"어? 어."
어떤 놈이야?
세훈은 순간 필터링없이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삼킨 채 찬열을 노려봤다.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로 세훈의 눈치를 보던 찬열이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애인이 밝히는 거 안 좋아해서 비밀로 하고 있어."
"...왜 안 좋아하는데요?"
"음. 우리, 언페로몬 커플이거든."
언페로몬 커플.
알파와 베타, 오메가와 베타처럼 시크릿 젠더가 전혀 맞지 않는 커플.
"근데 그 분이 왜요?"
세훈은 죄없는 아랫입술을 말아물며 질문했다.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찬열의 멱살을 잡고 고백을 해버릴 것 같았다. 세훈은 순간적으로 치민 생각에 앙 다문 입술을 더 세게 깨물었다. 고백이라니. 이리저리 굴러가던 구슬이 기어코 제 갈 곳을 찾은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이미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는 구멍인데, 그걸 노리는 제가 괜히 미웠다. 세훈은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돌렸다.
어두워진 세훈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찬열은 잠시 망설이다가 머리를 쓸어올렸다.
"세훈아, 나는 알파고 그 애는 베타야. 그동안 주변에서 벌어진 페로몬 사고와 그로 인한 결과들을 오로지 제 3자로서만 봐왔던 그 애한테 알파인 나는 얼마나 끔찍한 존재겠어."
"...뭐라고요?"
"내가 알파라서 그 애는 항상 불안해해. 그 마음 모르는 거 아니고, 또 나는 정말로 그 애를 사랑해서 그 애 마음에 확신을 주고 싶었어."
"...."
"그 아이는, 내 애정을 일종의 가학적인 성향으로 확인해."
"...선생님을 때린다는 말이에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폭력을 쓰진 않아. 그냥, 일종의 상황을 만들지. 내가 그 애에게 잘못하고 어떻게든 용서받기 위해 애쓰는 그런 상황."
"...그건 정신병이에요."
"근래 들어선 모든 인간의 본성에 가학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그런 얘길 하는 게 아니잖아요!"
"...."
"이게 왜 아무렇지 않아요. 왜 별거가 아니에요. 대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했길래 화를 내야 할 때도 화를 안 내는 거냐고요! 지금 그 사람이 선생님한테 하는 건-!"
"세훈아."
"...."
"그러지마."
그러지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처럼 찬열의 고개가 작게 흔들렸다. 난감한 얼굴로 제 뺨을 가리키는 손길에 그제야 제가 눈물을 흘렸다는 걸 알았다. 세훈은 신경질적으로 뺨을 훔쳤다.
"나 그 애 정말 좋아해."
"놓지 못하는 게 아니라요?"
"그 애도 날 좋아해."
"그게 정말 사랑이라고 생각하세요?"
날카로운 말에 틀림이 없는 것 같아 말을 잊었다. 찬열은 심장이 찌릿한 기분에 입술만 벙긋거린 채 머뭇거렸다. 좀 전에 뺨을 쓸어냈음에도 세훈의 예쁜 눈동자 밑으로 작은 눈물이 길을 냈다.
"선생님 진짜 최악이에요."
왈칵 터진 울음을 참지 못한 세훈이 끝내 소매에 눈을 묻은 채 입술을 떨었다. 찬열은 더 이상 그 어깨를 두드려주지도 못하고 세훈의 이름을 불러주지도 못한 채 무력하게 그 모습을 지켜봤다.
닿지 못할 사과가 입술 새를 맴돌다가 흩어졌다.
-
"어, 세훈-"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저를 부르는 찬열의 목소리를 대놓고 무시했다. 세훈은 마치 런웨이를 하는 사람처럼 휙, 등을 돌렸다. 뻘쭘한 얼굴로 손을 내릴 찬열을 알았지만 괜히 마음쓰고 싶지 않았다. 그 날 이후로, 세훈은 찬열을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이미 연인이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준 것이 죄스러워서 더 그랬다. 물론 그것만이 온전한 이유는 아니었다. 최악의 방식으로 사랑을 하는 찬열이 걱정됐고, 다음 날이 되기 무섭게 아무렇지 않은 체 하는 찬열에게 화가 났다. 조금 유치하고 무례한 방법일지 몰라도 세훈은 일부러 찬열을 무시하면서 그 날 일을 계속해서 상기시켰다.
잊지 말라고. 그 날 일은 없었던 일이 아니라고.
우습게도 찬열은 제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자신을 무시하는 세훈을 붙잡지 않았다. 기분 나쁠만도 하건만, 인사나 부름을 대놓고 무시하는 세훈을 보면서도 그저 웃는 거다. 세훈은 그 날 일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모른 척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맞았다.
찬열은 굳이 그 날의 일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가장 연약한 속살같은 것이었고 가장 아픈 상처였다. 그 날 한참을 울던 세훈이 뭔가를 더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알았음에도 부러 무시한 채 휴게실을 나선 건 솔직히 말하면 도망이었다. 왠지 모르게 세훈은 그랬다. 유려한 선의 눈으로 자신을 보면 제 속내가 죄다 까발려지는 기분이었다. 가끔씩 반듯한 미간을 구기고 자신을 노려보기라도 하면. 아, 뭐랄까. 그냥 제 속에 있는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찬열은 더더욱 세훈의 앞에서 입을 닫았다. 더 과하게 행동하고 더 밝게 반응했다. 부르기 무섭게 등을 돌려 사라지는 세훈의 뒷모습을 보자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미소를 지었다. 찬열은 괜찮았고, 괜찮았어야 했고, 괜찮아야 했다. 그러니까 자꾸만 자신이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세훈의 목소리는 조금 피하고 싶었다. 그게 자신을 좀먹는다는 걸 알면서도.
물론 그 마음을 알 리 없는 세훈은 감정이 잔뜩 실린 발걸음으로 바닥을 괴롭히며 걸음을 옮겼다. 멍청한 박찬열, 짜증나는 박찬열. 괜시리 욕까지 해가며 입술을 삐죽거리자 이내 분노가 뒤섞여 우울의 색을 냈다. 세훈은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그 아이는, 내 애정을 일종의 가학적인 성향으로 확인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저렇게 맑은 눈으로, 저렇게 숨김없이 제 감정을 모두 보여주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짓을 해.
찬열은 폭력이 아니라고 했지만 세훈은 분명히 알았다. 그의 연인이 찬열에게 하고 있는 것은 엄연한 폭력이었다. 끔찍한 짓이었다. 애정을 빌미로 누군가를 상처줄 자격은 없다. 그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게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애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약점이 되었다. 가장 연약하고, 가장 아픈 약점. 그것을 모를 리 없으면서도 칼로 찌르는 그 사람이 세훈은 너무 미웠다. 이름도, 얼굴도, 나이도 모르지만 세훈은 그 사람이 최악일 거라고 확신했다. 누군가의 애정을 제 먹이로 삼는 사람은 그 어떤 모습이든 추할 수 밖에 없으니까.
오늘따라 콜이 없어 한가로운 게 더 우울했다. 이러면 자꾸 찬열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괜한 생각으로 저 자신조차 힘들어질 것 같아 털어내려 해도 그 날 찬열의 얼굴이 잊히지가 않았다. 자신이 상처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보이던 그 얼굴은 너무 상처가 많아서 몸에 생기는 자잘한 생채기는 눈치채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저기요."
그게 더 사람 신경쓰이게 만드는 것도 모르고.
속상한 마음에 절로 표정이 굳어졌다. 세훈은 저를 재차 부르는 목소리도 듣지 못하다가 한박자 늦게 반응했다. 갈색 머리의 남자는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여기 흉부외과에 박찬열 선생님 좀 보러 왔는데 어디로 가면 되죠?"
"진료 예약하신 건가요?"
"아니요."
"진료 예약 안 하셨으면 못 보는데요."
그런데 남자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이름에 세훈은 저도 모르게 날이 섰다. 감이 좋지 않은 탓이었다. 세훈이 딱딱하게 대꾸하자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친 남자가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설마. 세훈은 미간을 잔뜩 구긴 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남자를 바라봤다. 얼마가지 않아 핸드폰을 귀에 댄 남자가 도발이라도 하듯 세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야, 박찬열. 너 어디야."
"...."
"당장 내려와. 나 네 병원 1층 왔으니까."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것은 분명히 찬열의 목소리였다. 세훈은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마주봤다. 이 사람이구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세훈은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쓰레기같이 구는 찬열의 연인이 이 남자임을 깨달았다. 전화가 끊긴지 얼마 되지 않아 찬열이 허겁지겁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찬열의 모습에 괜히 속이 상한 세훈이 대충 목례를 하며 남자를 지나쳤다.
"어, 세훈아."
그리고 아직 남자를 발견하지 못한 찬열이 그를 찾는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가 걸어오던 세훈과 눈이 마주쳤다. 반갑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원래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괜히 속이 들끓는 지금은 달랐다. 세훈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보인 뒤 걸음을 떼려는 찬열을 불러세웠다.
"어디 가요?"
"응?"
"안 가면 안 돼요?"
"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세훈의 말에 놀란듯 눈을 키웠던 찬열이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세훈을 바라봤다. 속상해. 아주 잠깐 마주했을 뿐인데도 안하무인인 남자의 태도가 느껴졌다. 얼마나 제멋대로 굴어왔는지, 얼마나 찬열을 제 입맛대로 주물러왔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는 태도였다. 세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가지 마요."
"미안해, 세훈아."
"찬열이형!"
"...."
"형이라고 부를게요. 듣고 싶다고 했었잖아요. 찬열이형이라고 할게요."
"...."
"가지 마요."
제발 더 상처받지 마요.
세훈은 간절한 눈으로 찬열을 바라봤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한참이나 세훈을 바라보는 찬열의 얼굴은 그 뜻을 읽기가 힘들었다. 결국 참다 못한 세훈이 재차 찬열을 부르려고 하자 그보다 앞서 찬열이 세훈을 불렀다.
"세훈아."
"박찬열!"
그러나 머뭇거리다 열린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남자가 찬열을 발견했다. 찬열은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세훈을 바라봤다. 흔들리는 눈동자는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갈등하고 있어서 견디다 못한 세훈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가세요."
"...미안해."
가장 듣기 싫은 말은 잘도 내뱉지. 세훈은 등을 돌려 남자에게 걸어가는 찬열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
사랑하는 연인이 저를 만나기 위해 미국에서 여기까지 찾아왔다. 평소라면 너무 기쁘고 행복했을 일이 오늘만큼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찬열은 어색하게 굳어진 입꼬리를 숨기지 못한 채 그를 바라봤다. 만나자마자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한 그가 얼마 가지 않아 로비에서 마주쳤던 세훈의 흉을 봤기 때문이다.
"걘 뭔데 그렇게 싸가지가 없어? 뭐 물어봐도 대답도 제대로 안 하고 네 이름 꺼냈더니 예약은 하셨냐고 하더라. 너 다른 사람들한테 내 얘기 안 해?"
"연인 사이인 거 알리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그건 그 때고! 지금은 다르지. 걔한테 내 얘기 똑바로 해. 아니, 걔 데려와서 나한테 사과하라고 해."
"보통 나 찾는 건 다 환자나 보호자들이니까 그런 줄 안 거야. 내가 미리 얘기했어야 하는데 안 해서 몰라서 그래. 미안해. 나중에 꼭 얘기할게."
"왜 네가 사과해? 걔가 사과하라고 해. 뭔데 걔 대신 사과하는데. 걔랑 뭐 있어?"
"그런 거 아니야. 나중에 꼭 얘기할게."
숨이 막혔다. 왜지. 지금까진 이런 적 단 한번도 없었는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저를 노려보던 세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게 정말 사랑이라고 생각하냐 묻던 단단한 목소리까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그의 손에 따뜻한 커피를 쥐여주며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가세요, 라고 말하던 그 말이나 눈빛이 자꾸 저를 괴롭혔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와 함께 있을 때는 온전히 그에게만 집중했는데 오늘만은 그게 쉽지 않았다. 찬열은 때마침 울리는 콜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들어보였다.
"나 콜 와서 가봐야겠다. 끝나고 연락할게."
"오늘 일찍 나와. 네 오피스텔에 있을테니까."
"응."
왜 그럴까. 여전히 너무 사랑하는데. 여전히 제 사랑인데.
한창 바쁠 때는 석달을 못 보고도 보고싶어 안달했던 마음이 이렇게나 서늘한 게 낯설고 어색했다. 찬열은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굳어진 제 얼굴이 스스로도 난감했다.
"찬열아! 여기 라인 좀 잡아!"
그러나 저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에 복잡한 생각은 잠시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찬열은 CPR을 하고 있는 민석에게 달려갔다. 누군가를 살리는 일에 있어서 다른 생각은 사치였다. 때로는 민석을 도우며, 때로는 세훈의 도움을 받으며 바쁘게 몸을 움직이다보니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수고했다며 어깨를 두드리는 준면에게 미소를 지어보인 찬열은 시간을 확인하곤 놀란 눈을 했다.
"선생님, 저 먼저 가볼게요."
"어딜 가?"
"네?"
"오늘 너 당직이잖아."
"네?"
"지난 주에 경수 일 있어서 네가 바꿔줬다며. 네가 나한테 얘기 해놓고 기억 안 나?"
"아."
아차 싶었다. 찬열은 그제서야 지난 주 경수와 스케줄을 바꾼 것을 떠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찬열을 살피던 준면이 슬쩍 어깨를 쳤다.
"왜? 무슨 일 있어? 대신 서줄까?"
왼 뺨에 튄 핏자국도 지우지 못한 준면의 말을 덥석 물고 싶진 않았다. 사정을 얘기하고 어떻게든 용서를 구해야지. 찬열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설게요."
"세훈아."
"...."
"금요일이 저니까, 그 날 해주세요. 안 그래도 금요일에 일이 생겨서 바꾸려고 했어요."
환자를 처치하느라 바빠 옆에서 저를 돕는 세훈을 보면서도 아무런 말을 꺼내지 못했었다. 찬열은 제게 다가온 세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러나 어떤 말을 꺼내도 적절하진 못하겠지. 찬열은 그냥 침묵하는 것을 택했다. 잠시 찬열을 바라보던 세훈이 이내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얼른 가. 내일 보자."
"네. 먼저 가볼게요."
저를 보지 않는 등이 신경쓰였다. 찬열은 세훈의 하얀 가운을 한번 더 돌아본 뒤 걸음을 서둘렀다. 중요한 걸 놓고 가는 것처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휴게실에 들려서 가운을 놓고 가방을 챙겨 나오면서도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괜히 얘기를 했나. 제 연인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은 탓에 세훈이 저를 신경쓰는 것 같았다. 물론 가끔 힘들고 지지치만 그래도 견딜만 한대. 코트 깃을 정리하며 거울을 살핀 찬열이 잠시 제 얼굴을 살피다가 고개를 저었다. 견딜만 하다니. 무슨 소리 하냐, 박찬열. 사랑이 어떻게 견디는 거야. 요새 자꾸 이상한 생각하지. 애꿎은 뺨을 두드렸다. 짝짝 소리가 나도록 매섭게 치며 눈을 치뜨자 겨우 정신이 들었다. 찬열은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한 뒤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박 선생님!"
"...어, 세훈아."
"이거요."
그러나 겨우 다 잡은 마음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제게 핸드폰을 내미는 세훈을 보자마자 무너졌다. 찬열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을 떠올리며 입을 벌렸다.
"고마워."
"그 분 만나러 가는 거죠?"
"응."
"박 선생님."
"박찬열!"
핸드폰을 건네받은 뒤에도 먼저 걸음을 떼기가 어려웠다. 뭔가 말을 꺼낼 듯 입술을 벙긋거리는 세훈 덕분이기도 했다. 찬열은 망설이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절로 한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세훈이 뭔가를 말하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찬열은 한박자 늦게 세훈에게서 눈을 뗐다. 오피스텔에서 기다린다던 찬열의 연인이었다. 찬열은 제게 다가오는 연인을 보며 처음으로 미소짓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가 반갑지 않은 탓이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는 찬열이 아닌 세훈을 노려봤다. 찬열은 불길한 기분에 세훈에게 가보라며 재촉했다. 그러나 세훈이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다가온 그가 세훈의 팔을 덥석 잡아 제쪽으로 당겼다.
"맞네, 걔."
"정아."
"얘기 들었으면 사과해야지."
"네?"
"얘기 못 들었어? 나 찬열이 애인인 거."
찬열은 절로 입을 가렸다. 환자를 돌보느라 정신없는 사이에 그런 걸 얘기할 시간이 있었을 리 없다. 아니, 시간이 있었다 해도 말하기 어려웠다. 그런 거, 말하고 싶지 않았다. 찬열은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제게 어떤 행동을 하든 괜찮았지만 세훈은 안 됐다. 제가 아닌 제 주변 사람들마저 힘들게 만드는 건 싫었다. 그러나 찬열이 다가오기도 전에 세훈의 목소리가 그의 행동을 잘라냈다.
"알고 있습니다. 애인이신 거."
"그럼 사과해야지. 아까 나한테 싸가지 없게 굴었잖아."
"정아."
"아까 무례했던 거 사과드려요. 다짜고짜 찾아와서 해코지 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제가 좀 날카롭게 반응했습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이해해주세요."
"찬열이도 있고, 처음이니까 그냥 넘어가주는데 앞으로 조심해. 한번만 더 그딴 식으로 굴면 진짜 죽여버릴 거니까."
"네. 죄송합니다."
"정아. 춥다. 차에 먼저 가 있어. 금방 갈게."
속이 상했다. 화가 났다. 찬열은 연인의 손에 억지로 차키를 쥐어준 채 등을 떠밀었다. 입김이 절로 나오는 날씨에 별 말 없이 키를 받아든 그가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찬열은 뜨거운 숨을 뱉어냈다. 속이 들끓었다. 앞머리를 쓸어올리는 손길이 예민하게 날이 섰다. 찬열은 참담한 얼굴로 세훈을 돌아봤다.
"미안하다."
"아니에요."
"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화나셨어요?"
"화났다기보단, 그냥. 나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재차 넘기며 찬열은 입술만 벙긋거렸다. 솔직히 말하면 화가 난 게 맞았다. 그러나 순순히 사과를 한 세훈에게 화가 난 건지, 무례한 제 연인에게 화가 난 건지 그도 아니면 그걸 그저 바라만 본 제 스스로에게 화가 난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아 화가 났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찬열이 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이자 잠시 그 얼굴을 살피던 세훈이 뜻 모를 미소를 지어보였다.
"화나셨구나."
"...."
"왜 화났어요?"
"...그냥. 다, 미안해서. 미안해."
"뭐가요?"
"사과할 일 아닌데, 네가 사과하게 만들었잖아. 내가 먼저 너한테 정이 얘기했으면 이런 일 없었을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
"저도, 사과할 일 아닌데 박 선생님이 계속 사과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세훈아, 그건."
"그래서 화가 나요."
"...."
"네가 뭔데 화가 나냐고 하면 솔직히 할 말 없지만 저는 지금 박 선생님이 느끼신 그 기분을 매순간 느껴요."
"...."
"저는 선생님을 볼 때마다 화가 나요. 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울화가 치밀어요."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해. 네가 신경쓰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내 일이라고만 생각해서. 네가 마음 쓸 줄 알았다면 그 때 얘기 안 했을거야. 네가 신경쓸수록 너만 더 힘드니까, 차라리 그 때 내가 했던 말. 다 잊어줬으면 좋겠다."
"...최악이라고 했더니 진짜 최악으로 구네. 그런 걸 말해놓고, 다 잊어달라고요?"
"네가 괜히 마음쓰는 것 같아서 그래. 신경 쓰이지 않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잘 할테니까,"
"좋아해요."
"...."
"...."
"...뭐?"
"다 들었으면서. 뭘 또 물어요? 또 듣고 싶어요? 다시 말해줄까요?"
"세훈아."
"나 좋아해달란 말 안 할 거고, 그런 거 바라지도 않을테니까 내 걱정만 좀 받아요. 마음 받아달란 소린 안 할게요."
"...너무, 이건. 내가 그동안 너무 오버해서 그래. 너무 오버해서, 그래서 그냥 선후배 사이의 좋은 감정이 다르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어."
"그냥 선후배 사이에 키스하고 싶진 않잖아요."
"...."
"난 박 선생님이랑 키스하고 싶거든요. 자고도 싶고."
"...."
"그러니까 내 걱정만 받아달라고요. 내가 원하는대로 해달라는 말 아니잖아요. 저 분이랑 헤어지라는 것도 아니고요. 나는 그냥, 그냥.... 너무 억울해서 그래."
"...."
"겨우 좋아하게 된 사람이 누군가를 만나고 있다는 것도 억울하고 그게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는 것도 억울해요.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순 없었는지, 더 좋은 사랑을 할 수는 없었는지 몇번이고 물어보고 싶어요.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은 진짜 좋은 사람인데, 진짜 괜찮은 사람인데. 왜 저 사람은 선생님을 아껴주지 않아요?"
"오세훈."
"...."
"거기까지 해. 선 넘지마."
"...."
"그 이상 하면, 안 돼."
"뭐가 안 되는데요?"
"너랑 나랑 내일도 병원에서 얼굴 맞대고 살 부대끼면서 지내야 하는 처지야. 나 좋아해주는 거 고맙고, 좋게 봐준 거 너무 기쁜데. 네 말대로 나 애인 있잖아."
"...."
"너한테 좋은 선배이고 싶어. 좋은 동료이고 싶고, 좋은 친구이고 싶어. 초반에 내가 많이 오버해서 너 헷갈리게 한 거 미안해. 사과할게. 근데 이제 안 그래. 나 정말로,"
"사과하지 마요."
"...."
"나한테도, 저 사람한테도. 사과하지 마세요."
"...."
"박 선생님이 잘못한 거 아니에요. 제 마음이잖아요. 제 마음으로 제가 선생님 좋아한 거고 제가 고백한 거에요. 그걸 왜 선생님이 사과하세요."
"나는,"
"박 선생님이 어떤 행동을 하셨든 그거에 마음 준 건 저에요. 그거 박 선생님 마음 아니고, 제 마음이에요. 애인 있는 거 알았을 때도 못 접고 지금까지 끌고 온 것도 저고요. 그러니까 사과하지 마세요."
"...."
"그리고 가능하면, 지금 차에서 선생님 기다릴 그 사람한테도 사과하지 마요. 미안하다고 하지 마요."
가슴이 무언가에 쿡쿡 찔리는 것처럼 아팠다. 눈물 한방울 보이지 않는 맨 얼굴로 세훈은 서럽게 울고 있었다. 찬열은 그 얼굴에서 시선 한번 떼지 못한 채 호흡을 멈췄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무겁고, 또 아팠다. 잘생긴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찬열을 노려보던 세훈은 한참만에야 입을 열어 한 마디 내뱉고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제 마음까지 불쌍하게 만들진 마세요."
찬열은 흰 가운을 펄럭이며 멀어지는 세훈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그 어느 때보다 부끄럽고, 그 누구보다 부러웠다. 보잘 것 없이 낡은 제 사랑의 빛바램이 부끄러웠고 이제 막 싹이 터 찬란한 세훈의 사랑이 부러웠다. 언제는 저 또한 저만큼 빛이 났었는데. 언제는 저 또한, 저렇게 아름다웠는데.
빛이 바래다 못해 악취가 나기 시작한 제 사랑은 이미 오래 전부터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지독한 페인트를 칠하고 또 칠해서 겨우 가렸지만 숨길 수는 없었다. 아무리 화사한 노란색을 칠해도, 아무리 예쁜 분홍색을 칠해도. 이미 제 사랑은 거멓게 죽어 모든 색을 집어삼켰다. 멍하니 내려앉은 시선 안으로 제 신발코를 바라본 찬열이 둥근 앞코를 바라보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사과가 아니면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 탓이었다.
-
모든 사랑의 시작은 눈부시다.
그것을 처음처럼 눈부시게 만드냐는 그 마음을 짊어지고 가는 자의 몫이지만 찬열은 단 한번도 그 마음이 개화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모든 사랑은 시들었다. 저마다의 욕심과 저마다의 틀을 주장하다, 끝내 빛을 잃고 가라앉은 사랑은 제 색을 잃고 탁하게 변하곤 했었다. 제 것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찬열은 짓밟힌 제 사랑이 잡초와 같다 여겼다. 비록 꽃은 피울 수 없어도 밟는다 하여 시들진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형편없이 망가진 제 사랑을 그렇게 위로했다.
그래서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모든 사랑은 시드는 법이고 퇴색하는 법이라고. 눈부시게 시작된 사랑도 끝내는 제 색을 잃고 흐려지다 변해버리니 어차피 사랑이란 것은 모두 그렇다고만 여겼다.
그런데 세훈이 자꾸 그런 제 생각을 흔들었다. 처음이라는 것 때문에 눈부시다 여겼던 세훈의 마음은 자꾸만 눈길을 끌었다. 제가 기억하는 제 사랑보다 더 찬란하고 더 아름다웠다. 나보다 더 예쁜 사랑을 했다. 나보다 더, 빛나는 마음을 보였다. 찬열은 그게 부럽고 신기하고 질투가 났다. 그 마음을 받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지난 주에 립프랙쳐rib fracture(늑골 골절)로 이머전시 오피Emergency OP(응급 수술) 했던 환자 오늘 CT 결과 나왔어요."
"어, 고마워."
"다행히 뉴모쏘락스pneumothorax(기흉) 증상은 없다고 하셨어요."
건네주는 차트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팔짱을 낀 채 데스크에 몸을 기댄 세훈이 불쑥 입을 열었다.
"잘생겼네."
"...뭐?"
"알파들이 원래 겉모습은 죄다 반질거리는 편이라지만 박 선생님은 그 중에서도 유별난 것 같아서요."
"뭐가?"
"잘생김이."
말문이 턱 막혔다. 예전부터 준비해왔던 논문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벌써 닷새째 밤을 샜다던 준면마저 퀭한 눈으로 저를 돌아볼 정도였다. 찬열은 뒤늦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 위해 입가를 가렸다.
"야, 너네 그러고 노냐?"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라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준면이 둘을 번갈아 바라보자 세훈은 어깨를 으쓱였다. 키보드를 부서져라 두드리던 손마저 멈춘 준면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뭐 있는데? 너네 뭐 있는데?"
"있긴 뭐가 있어요, 형. 쓰던 거 써요."
"야, 나 촉 되게 좋다?"
찬열에게 애인이 있는 것을 모르는 준면이 장난기가 가득 담긴 얼굴로 찬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훈이 뜻 모를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에요, 형."
"응?"
"우리가 뭐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뭐가 있어요."
내가 박 선생님 좋아하거든요.
영문이 가시지 않은 표정을 한 준면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폭탄 발언을 한 세훈이 준면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냉큼 몸을 돌려 사라졌다.
"...뭐야."
당장 뭐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눈과 입을 크게 벌린 준면이 뒤늦게 입을 가렸다.
"뭐야!"
나도 몰라요.
찬열은 터져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이마를 짚었다. 한번 제 마음을 드러낸 세훈은 더 이상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마음은 부담을 느낄 쯤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듯 칼같이 선 밖으로 물러났고 그 마음을 잊을 때쯤이 되면 다시 다가와 존재를 드러냈다.
찬열은 제가 잊을 수도 없게 몰아치는 세훈의 마음에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조금이라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으면 언제 그랬냐는듯 바로 물러나면서, 적당히 모른 체 하려고 하면 제 마음을 잊지 말라고 저를 흔들었다. 분명히 좋아하는 건 세훈인데, 목줄을 쥐여준 건 되려 제가 된 기분이었다. 차라리 그런 세훈의 행동이 싫거나 불쾌했다면 딱 잘라 거절하기라도 할텐데 이상하게도 세훈의 마음이, 그 행동이 싫지 않았다. 찬열은 쥐어뜯듯 제 머리칼을 잡아 당겼다. 모든 것이 복잡했다.
마냥 눈 부시고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던 세훈의 마음을 받는 사람이 저라는 것은 참 기쁜 일이고 행복한 일이었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것이 저의 처지였다. 자신은 연인이 있고 세훈은 그걸 알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세훈이 더 이상 제게 이런 행동이나 말을 하지 못하도록 냉정하게 잘라내야 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저 찬란한 사랑을 보면, 이제 겨우 꽃망울이 통통해져 피워낼 준비를 하는 것만 같은 저 마음을 보면 차마 그것을 잘라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게다가 마음 속 한구석에서는 저보다 예쁘게 꽃망울이 맺힌 세훈의 사랑을 질투하기까지 하니 이보다 저열한 사람이 또 있을까.
찬열은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최선인지 몰랐다. 알 수가 없었다. 찬열은 이런 마음을 받아본 것이 처음이었다.
-
"오 선생님."
"어?"
세훈의 집안은 대대로 유명한 알파 집안이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아무리 위로 올라가도 오메가는 없었다. 혈육들은 물론이고 그들이 맞는 배우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에 몇 없는 순수 알파 혈통 집안. 고지식한 노인네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명칭이었으나 사실이기도 했다. 오 가家는 지금까지 단 한명의 오메가도 집안에 들인 적이 없다. 대한민국은 물론이거니와 외국에서도 오 가는 알아주는 집안이었다. 전통이라느니 순혈이라느니 하는 것들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세훈은 발현 전의 자신 역시 당연하게 알파가 될 것이라 여겼다. 따로 생각하거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세훈이 알파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당연한 일이 무너진 순간.
세훈은 더 이상 그 커다란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저를 부정하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진짜 오 가 사람이 맞기는 할까. 사실은 어디서 주워온 것은 아닌가. 우습지만 그런 생각도 했다. 한눈에 봐도 어머니와 꼭 닮은 외모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차라리 그러기라도 하면 자신이 오메가로 발현한 것에 대해 변명이 될 것 같았다. 세훈은 자신이 오메가로 발현한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모든 이가 알파로 발현했다. 셋이나 있던 형도, 양손으로 세는 것도 버거울 사촌들도 모두. 모두 다 알파가 되었다. 그러나 세훈은 아니었다. 세훈은 제 몸에 흐르는 페로몬을 느끼는 순간 구역질을 했다. 자신이 오메가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의 페로몬이 역겨웠다. 세훈은 그 날 부로 바로 집을 나왔다. 안 그래도 의대 진학을 놓고 아버지와 논쟁이 있었던 터라 적당한 핑계가 되긴 했지만 그게 온전한 이유가 되진 못했다. 가족들은 세훈이 집을 나간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럴 만도 했다. 막내인 세훈을 유달리 아끼던 아버지는 세훈과 의견 충돌을 겪으면서도 언성 한번 높이지 않았었다. 두 사람은 조근하고 낮은 목소리로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고 논쟁을 벌였다. 감정적으로 서로를 대한 적 없이 대화를 나누었는데 갑작스레 집을 나가다니. 형들은 몇번이고 세훈을 찾아왔다. 그러나 그런 형들에게 사실을 얘기할 수는 없었다. 순수 혈통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그닥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게 오 가의 가장 큰 무기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세훈의 존재는 아버지에게, 형들에게. 더 나아가서는 오씨 가문의 흠이 될 것이 뻔했다. 사람들은 순수 혈통의 대명사라 불리던 오 가의 오메가에 대해 집중 조명할 것이고 세훈의 출생에 대해 의심할 것이었다. 세훈은 떳떳했지만 그게 면죄부가 되진 못했다. 칼은 세훈에게만 날아드는 것이 아니었다. 세훈이 지키기에 오 가는 너무 거대했다. 그의 아버지도, 형들도. 세훈이 지키기엔 너무 벅찼다. 지켜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았다.
"여긴 웬일이야?"
"종대랑 얘기 좀 하려고 왔다가 너보고 가려고 들렀지. 밥은, 먹었어?"
"먹었지. 형은 먹었어?"
"먹었어. 종대랑 밥 먹으면서 얘기 나누다 오는 길이야. 커피 사줄까? 마실래?"
"됐어. 바빠서 어차피 다 먹지도 못 하고 버릴 걸."
"많이 바빠?"
"레지가 안 바쁘면 그게 병원인가. 내가 바빠야 좋은 거야."
"세훈아."
아, 시작이다.
세훈은 걱정이 담긴 눈으로 저를 부르는 형을 보며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 마음을 모를 리 없는 형이 잠시 머뭇거리며 말을 고르다 세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린 다 너 믿어."
"...."
"네가 어디서 뭘 하든, 얼마나 잘 해낼지 다 알아."
가운 주머니에 대충 우겨넣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훈은 눈 한번 깜빡이지 못한 채 형을 바라봤다. 언제나 다정한 제 형은 오늘도 역시나 온기가 담긴 눈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버지 말씀 너무 서운하게 듣지 말라고. 아버지나 어머니 생신 때야 겨우 네 얼굴 보니까 아버지가 얼마나 속이 타겠냐. 아직도 네 방 정리는 아버지가 하셔. 며칠 전엔 네 방에서 깜빡 잠도 드셨더라."
그 애틋한 마음에 더 집에 가지 못하는 것을 형은 모르겠지.
나를 향한 애정이 얼마나 큰지 아니까, 내가 오메가라는 걸 알아도 모두 감싸줄 가족들을 아니까 더 가지 못하는 것을.
세훈은 잠시 입술을 까딱거리다가 아무런 말없이 감쳐물었다. 무언가를 말할 듯 보이는 세훈을 기다리던 형은 끝내 침묵하는 세훈을 보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다음에 밥 먹자. 나도 바빠서 이제 가야겠다."
"연락할게."
가볍게 어깨를 두드린 형이 멀어지자 겨우 끌어올렸던 입꼬리가 내려왔다. 세훈은 복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차라리 정없는 성정이었더라면. 설익은 우애를 가진 형제였다면. 미련없이 서로의 손을 놓을 수 있는 무심한 가족이기라도 했다면 좋았을 걸 그랬다. 그럼 이렇게 미련하게 부여잡고 있지도 않았을 텐데.
"세훈아."
"아. 박 선생님."
"누구야?"
"그냥, 아는 사람이요."
세훈은 멀어진 형의 모습을 다시 확인했다. 타 병원의 경영진인데다 워낙에 유명한 알파 집안의 일원이다보니 밖에서는 서로 조심히 행동했다. 세훈은 제가 그 유명한 알파 집안의 막내라는 걸 숨기고 있었고 형은 그런 세훈의 뜻을 존중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주었으니 두 사람은 종대나 경수를 계기로 알게 된 형 동생처럼 적당한 선을 유지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지만 휴게실을 함께 쓰는 찬열은 세훈이 오메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세훈은 제 집안을 숨겼다. 찬열이 제 성향에 대해 말할 리는 없지만 오 가의 막내인 자신이 오메가라는 것을 누군가 알게 되는 것이 싫었다. 세훈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오 가의 흠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세훈이 어색하게 얼버무리자 멀어진 남자의 등을 흘깃거리던 찬열이 입술을 말아물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지만 자각하진 못했다.
-
병원에서 의사는 알파나 오메가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저 사람을 살리는데 필요한 인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스스로가 자신을 구조를 위해 필요한 인력쯤으로 여긴다 해도 알파의 페로몬을 가졌고 오메가의 페로몬을 가졌기에 때로는 그것이 악용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당신 말고 다른 오메가 없냐고."
베드를 지나다 말고 보이는 익숙한 형체에 뒷걸음질쳤다. 세훈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베드 앞에 서있는 김 간호사를 바라봤다. 없는 일은 아니다. 아무리 페로몬을 배제하고 의료인과 환자로 대하려 해도 환자들이 따라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다. 세훈은 한숨을 삼킨 채 성큼성큼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오메가 아닌 것 같은데?"
"환자분. 저희는 오메가나 알파가 아니라 환자분을 치료해주는 의료인입니다. 치료에 협조 안 해주시면 저희로서는 환자분에게 처치를 해드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아니, 누가 치료를 안 받겠대? 오메가만 데려오라고. 예쁘장한 오메가가 시중 들어주면 알아서 잘 치료 받겠다는데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이곳에는 알파도 오메가도 없습니다. 저희는 오로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존재하는 의료인일 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소란 피우시면 저희도 더 이상 환자분 이곳에 둘 수 없을 것 같네요."
"뭐? 하, 야. 여기 못 두면 어쩔 건데. 어? 네가 뭘 어쩔 건데."
"김 간호사님, 지금 당장 경찰에 신고하세요."
"네?"
"요새 법이 바뀌어서. 응급실에서 소란 피우면 잡혀가거든요. 처벌도 받아요. 하도 별 쓰레기같은 종자들이 많다보니."
"야, 너 말 다 했어!"
"아뇨. 다 못 했죠, 당연히. 들으라고 한 말인데 잘 들으신 것 같아서 기쁘네요. 다 못한 말 계속 해드릴까요?"
"이 새끼가 근데!"
할 줄 아는 건 눈썹 하나 까딱 안 할 페로몬 조금 뿌리는 게 다인 주제에 알파랍시고 위협적으로 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훈은 제 큰 키를 십분 활용해 되려 그에게 다가갔다.
"때리시려고?"
"너 내가 못 때릴 줄 알아?"
"때려, 그럼."
"뭐?"
"한 대 치시라고. 목소리만 높여서 뭐하시려고? 그 시간에 한 대라도 더 때리지 않고."
"너...! 내가 못 칠 줄 알아?"
"아, 정말. 왜 이렇게 말이 많지. 그 꼴 같잖은 페로몬 집어치우고 치라니까."
"너 이 개새끼가-"
티를 내지 않는다 했지만 워낙에 불쾌한 페로몬이라 곁에 서있던 김 간호사가 뒤로 물러설 정도였다. 세훈은 제게 달려드는 남자를 무감한 눈으로 바라봤다.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온 주제에 의료인들을 존중하지 않는 새끼는 치료를 해줄 생각이 없다. 세훈은 남자를 쫓아내기 위해 부러 더 과장되게 남자를 자극했다. 다행히도 남자는 제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크게 반응해서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내기 적합했다. 좀 재수없긴 해도 차라리 한 대 맞아주고 다시는 이 병원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더 나았기에 세훈은 기꺼이 제 뺨을 남자에게 들이밀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남자의 주먹이 제 뺨에 와닿지 않자 반사적으로 감았던 눈을 뜬 세훈이 제 앞에 선 이를 바라봤다.
"혀,"
하마터면 형이라 부를 뻔한 입술을 꾹 말아 깨물며 그를 바라보자 무표정한 얼굴로 세훈을 흘깃거린 형이 눈만 돌려 남자를 노려봤다.
고급스러운 수트와 단정하게 넘긴 머리. 절로 시선을 끄는 화려한 외양이나 단단해보이기까지 하는 체격이 남자를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누가 봐도 우성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자태였다. 남자는 은은하게 풍기는 페로몬에 다리를 떨며 뒤로 물러섰다.
"제가 소란스러운 걸 참 안 좋아하는데 시끄럽네요. 함부로 손 드는 버릇도 거슬리고."
"그, 내가 뭐 소란을 꼭 일으키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 고요!"
"그럼요. 응급실에 왔으니 치료가 급해서겠죠.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 어디가 어떻게 불편합니까?"
"아니, 뭐. 특별히 뭐 어디가 불편하다기보단-"
"그럼 아픈 곳도 없는데 이만 나가지?"
"에?"
"꺼지라고."
"...."
"좋게 말하면 왜 알아듣지를 못 하는지. 매번 좋게 말해주는 것도 적성에 안 맞아서 문제네. 윤 비서."
"네, 이사님."
"이 분 나가신다는데 배웅 좀 해줘. 택시까지 태워서, 잘 보내드리고."
"네. 가시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남자가 한참이나 그와 곁에 다가선 비서를 번갈아 바라보다 도망치듯 등을 돌렸다. 세훈은 그제야 긴장했던 얼굴을 풀고 제 형에게 다가갔다.
"감사합니다."
말은 정중했지만 눈빛은 아니었다. 여긴 또 무슨 일로 왔느냐 묻는 것만 같은 세훈의 눈빛에 슬쩍 주변의 눈치를 살핀 형이 아무도 모르게 윙크를 해보였다.
"오세훈, 선생님?"
"...네."
"링거를 좀 맞으러 왔는데 도와주시겠습니까?"
링거를 맞을 거면 형 병원가서 맞으면 되지, 왜 굳이 여기 와서 병원비 축내냐.
세훈은 당장이라도 투덜거리고 싶은 것을 꾹 삼킨 채 빈 베드로 그를 안내했다. 제가 직접 챙긴 수액을 가지고 베드에 다가간 세훈이 커튼을 치자 침대 위에 누워있던 형이 기다렸다는 듯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가까이 와봐. 안 다쳤어?"
"안 다쳤어. 다칠 새도 없이 끼어들었잖아."
"그 새끼가 혹시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봐 나 순간 눈 뒤집혔다."
"아무리 그래도 직접 나서면 어떡하냐. 그러다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무슨 소문이 돌든 헛소문밖에 더 돼? 그리고 그런 소문이라도 돌아야 너 건드리는 놈들이 없지."
"어이구, 형님. 그런 소문 안 돌아도 나 건드는 사람 없네요."
괜히 떠오르는 찬열의 얼굴을 지워내며 수액을 링거대에 건 세훈이 형을 억지로 눕혔다.
"이왕 온 김에 수액 다 맞고 푹 쉬다 가."
"그 때까지 옆에 있을 거지?"
"아니. 내가 얼마나 바쁜데. 할 일이 산더미야."
"좀만 더 있으면 안 돼? 우리 오랜만에 얼굴 보잖아."
"아까 낮에 본 건 본 거 아니냐. 형 일도 많잖아."
"그래도 우리 훈이 얼굴은 제대로 보고 가야지. 아까 봤을 때 너 살 빠진 것 같아서 걱정 되더라. 일 많이 힘들어?"
"안 힘든 일이 어디 있어. 뭐든 다 힘든 부분이 있는 거지. 난 좋아. 지금 만족해."
"네가 여기 있는 게 좋고 여기 있길 바란다니까 그냥 두는데. 혹시라도 좀 전 같은 상황 다시 생기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 우리 병원으로 데려올 거야."
"형."
"이건 부탁 아니야. 거절 못 해. 거절 안 돼."
"...."
"그러니까 몸 좀 챙겨가면서 해. 종대도 있고, 경수도 있잖아. 나한테 기대기 싫으면 주변에 있는 걔네들한테라도 기대. 도움 좀 받아. 너 그래도 괜찮아. 너 그러라고 내가 그 놈들한테 비싼 밥 비싼 술 다 사는 거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잔소리 그만하고 누워서 얼른 쉬어."
애정어린 목소리로 제게 잔소리를 하는 형은 언제나 든든한 존재였다. 세훈은 수액이 떨어지는 밸브를 한번 더 체크한 뒤 커튼을 걷고 나왔다.
"...어."
"얘기, 엄청 길게 하네."
"아는 분이라서요."
"아까 그 사람 맞지? 복도에서 대화 나눴던."
"아, 네."
"많이 친한 사이인가봐?"
"그냥, 뭐."
세훈은 껄끄러운 마음에 대답을 피했다. 찬열을 속이는 것도 불편했고 답지 않게 제게 그런 것을 묻는 찬열도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게 더 찬열의 마음을 어지럽힐 줄은 몰랐다. 찬열은 어색하게 저를 피하는 세훈이나 놀랐을 세훈을 대신하기 위해 다가갔다 들은 다정한 대화에 불쾌해진 자신에게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건데.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일 수 있고, 말할 필요가 없다 여길 수도 있는 건데. 내가 왜 신경을 쓰는 거지. 왜 기분이 나쁘고 왜 섭섭하고 왜-
찬열은 저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됐다. 제 것이 아닌 것에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됐다. 찬열은 도망치듯 등을 돌렸다. 그렇게 세훈의 사랑을 부러워하더니 기어코 욕심이 나는구나. 스스로가 너무 형편없이 느껴졌다. 선 긋고 잘라내겠다 말한 게 누군데 세훈의 신경이 제가 아닌 다른 곳에 향하는 게 싫다고 느껴지다니. 어떻게 이렇게 최악으로 굴 수가 있나. 스스로에게 환멸이 났다. 찬열은 허겁지겁 걸음을 옮겼다.
"박 선생님. 박 선생님!"
저를 부르는 세훈의 목소리는 일부러 무시했다. 찬열은 필사적으로 제 연인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쓰며 뛰듯이 걸음을 옮겼다. 뭐하는 거야, 박찬열. 왜 이러냐고. 안 그래도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더 엉망으로 헤집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린 비상계단 안으로 빨려들어가듯 몸을 숨긴 찬열은 차가운 벽에 이마를 기댄 채 숨을 골랐다. 그의 사랑을 질투하다 못해, 그의 사랑을 욕심내기까지 하다니. 최악으로 군다던 세훈의 말이 절로 떠올랐다. 찬열은 앓는 소리를 내며 필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혼란스러웠다. 두려웠다. 찬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연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
내가 사랑하는 연인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심지어 며칠 전에 마주했던 얼굴이다. 예전에는 눈 감고도 눈썹 모양, 콧망울, 분홍빛 입술까지 모두 기억이 났는데 지금은 그의 눈꼬리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웃을 때는 어떤 모양의 입술이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찬열은 제게 실망했고 배신감을 느꼈다. 절대로 변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믿었던 마음이었다. 그런 제 마음이 변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고 그런 제 스스로가 너무 미웠다.
찬열은 복잡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세훈을 피했다. 평소에 워낙 세훈을 챙기고 들었던지라 세훈을 피하는 게 너무 눈에 띄었다. 논문 준비로 정신이 없어 이틀 내내 슬리퍼를 짝짝이로 신었던 준면마저 눈치챌 정도로 제 행동이 티가 났다. 찬열은 옳은 방법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복잡한 것에서 잠시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이를 멈추지 못했다.
"어."
"...."
그러나 회진을 돌거나 이알(ER;응급실)로 내려가는 게 아니면 대체 어떻게 세훈을 피해야 할지 몰랐다. 특히나 의국에서는 더 곤욕이었다. 경수는 잠깐 쉬는 시간이 생겨도 변 교수를 보러 가겠다며 사라졌고 준면은 애초에 의국에 거의 오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찬열은 세훈과 단둘이 의국에 남는 경우가 많았다. 원래라면 바쁘게 오는 콜을 냉큼 잡아 자리를 피했을테지만 오늘따라 손에 쥔 핸드폰은 잠잠하기만 했다. 찬열은 땀이 나는 손바닥을 허벅지에 문지르며 초조함을 감추려 애썼다.
"박 선생님."
"응?"
뭐 마실 거라도 산다고 하고 나갈까. 요새 너무 대놓고 피해서 세훈이가 화가 나진 않았을까. 여기저기서 터지는 생각들이 요란하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찬열은 죄없는 허벅지만 괴롭히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파드득 떨었다.
"제가 나갈게요."
"어?"
"제가 나간다고요. 저랑 같이 있는 거 불편하신 거잖아요."
"어, 아니. 그게-"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세요. 그게 더 상처에요."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찬열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저 저 스스로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제 감정이 두렵고 낯설어서, 그냥 이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게 힘들어서 잠시 도망치려고 했던 건데 그게 세훈에게 상처가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찬열은 제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 입가를 가렸다.
"세훈아, 미안해. 그게 아니라."
"사과는 안 받고 싶은데."
"...."
"진짜 내가 싫어서 피한 거든, 그게 아니라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 거든. 사과는 안 듣고 싶어요."
"...."
"어떤 이유든 나한테는 좋은 게 아닐 것 같아서."
할 말이 없었다. 찬열은 침묵했다. 세훈의 말이 맞았다. 그 어떤 말이든 세훈에게 상처입히지 않을 단어가 없었다. 찬열은 입 안에 칼을 문 기분으로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 티내지 말아줘요. 그렇게 안 해도 내가 약자인 거 다들 아니까."
너는 언제나 솔직하고 언제나 만개하다. 너의 사랑은 어떻게 그렇게 단단하고 흐트러짐이 없을까. 찬열은 의국을 나서는 세훈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부러워. 너의 마음이, 너의 단단함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제 마음과는 달리 곧고 선명한 세훈의 마음이 부러웠다. 나도 가질 수 있을까, 그런 마음.
불현듯 치민 욕심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여전히 흐릿했다.
-
몸이 좋지 않았다. 저를 피하는 찬열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고 사이클 주기에 들어서 몸 또한 예민해졌다. 세훈은 두통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삼켰다. 약을 먹었음에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같은 신세인 준면이나 경수가 오늘은 쉬는 게 어떻겠냐며 몇번이고 권했지만 히트 사이클이 하루만에 끝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3, 4일 앓을 거 하루 쉰다고 별 효과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시간 맞춰 약이나 잘 챙겨먹으면 된다고 두 사람을 안심시킨 세훈은 혹시 밀린 콜은 없나 재차 살피며 핸드폰을 뒤적였다.
"오세훈!"
"...."
이사장이 드디어 김 훈종 교수에게 엿 먹일 준비를 하고 있다며 나팔을 부는 이모티콘을 잔뜩 보낸 경수의 문자를 보고 설핏 미소를 지어보이는데, 누가 덥석 어깨를 잡아당겼다. 예고도 없이 어깨를 잡아 끄는 것에 불쾌해진 세훈은 인상을 잔뜩 구긴 채 고개를 돌렸다가 마주한 얼굴에 몸마저 굳혔다.
"진짜 오랜만이다. 너 여기서 일하는구나?"
"네가 여긴 무슨 일이야?"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세훈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발현하기 전까지는 여기저기 들러붙어 아부를 떨더니 방학 동안 알파로 발현했다며 으스대고 다니는 꼴이 보기 싫어 말을 거는 것도 못 들은 척 철저히 무시했던 이였다. 동창은커녕 이렇게 인사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사이인데 남자는 거리낌이 없었다. 세훈은 뒤로 걸음을 물려 거리를 벌렸다.
"아는 사람이 입원을 해서. 병문안 겸 왔다가 너 보고 혹시나 해서 따라왔지. 내가 잘못 본 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너 여기서 일해? 너희 병원은?"
"알아서 잘 돌아가겠지."
"우와, 너 그럼 그 소문 진짜야?"
"...소문?"
"너 베타라는 거. 알파로 발현 못해서 집에서 내쳐졌다는 소문 도는데 몰랐어?"
"그런 거 아니야. 헛소문 퍼트리지 말라고 해."
"아니, 안 그러면 네가 굳이 네 병원 두고 밖에서 의사 노릇 하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 의사들 되게 빡세다며. 괜히 남의 병원에서 이런 고생 할 이유가 있어?"
"...그래, 그런 사람들이 있더라. 그릇이 작으면 담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뭐 하나 새로 하는 것도 못 하고 배우는 것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어?"
세훈은 저를 비꼬는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남자를 비웃었다. 소문이라고 내뱉는 게 실은 네 머릿속에서 나온 거라는 걸 모를까봐.
"너 안 바빠? 난 바빠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아, 어. 그래? 바쁘면 가야지. 야, 근데 우리 이제 동창회 하는데-"
생산성없는 말을 계속 들어주고 싶진 않다. 자꾸만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남자를 잘라내기 위해 미간을 구긴 세훈이 입을 여는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세훈은 작게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몸을 굳혔다.
"오버 페로몬(OVER PHEROMONE;페로몬 폭주)입니다! 오메가인 분들은 로비를 비워주세요!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오버 페로몬입니다! 오메가분들은 모두 로비에서 자리를 피해주세요!"
간호사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로비에 앉아있던 오메가들은 코와 입을 틀어막고 서둘러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세훈은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했다. 찰나였지만, 아주 잠깐이었지만 폭발하듯 터져나온 알파의 페로몬에 반응한 자신의 페로몬이 새어나왔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너 설마 오메가야...?"
눈앞의 알파가 그것을 느끼기엔 충분한 페로몬이.
푸핫,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한 남자가 허리까지 숙여가며 낄낄댔다. 세훈은 덜덜 떨리는 손을 꾹 쥐었다.
"오메가였어? 푸흐, 야. 그 오가家의 막내가? 오세훈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어떡해. 어떡하지. 왈칵 치미는 두려움이 저를 덮쳤다. 세훈은 제가 떨고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와, 그래서 집을 나왔구나. 나는 그냥 발현을 안 한 줄 알았지. 근데, 와- 네가 오메가야? 야 진짜 안 어울린다. 방금 그 향 네 페로몬 맞지?"
하필이면 왜 이 자식일까 싶다가도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세훈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기 위해 애썼다. 이미 하얗게 질린 얼굴이 담담함을 가장하기엔 너무 늦었지만 그걸 깨달을 새도 없었다. 세훈은 어떻게든 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싶었다.
"안 어울리게 향이 끝내주네. 무슨 향이야? 그러고보니까 너 집에서는 알아? 혹시 오메가라서 쫓겨난 거야?"
앞뒤 구분없이 쏟아지는 질문이 마음을 몇번이고 찌르고 짓밟고 잘라냈다. 말에 맺힌 가시가 가장 날카롭다는 건 예전부터 알았지만 그래도 너무 힘들었다.
"집에서는 알고, 쫓겨난 건 아니야. 그리고 향이 무슨 향이든, 네가 그걸 알 자격이 있을까?"
"...형."
"아, 안녕하세요 형님."
"누가 네 형님이야?"
서늘한 눈빛으로 남자를 쏘아본 세훈의 형이 세훈을 달래듯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세훈은 그 다정한 온도에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형에게 말한 적이 없는데. 그는, 가족들은 제가 오메가라는 걸 모를텐데. 불안을 숨기지 못한 얼굴이 저를 향하자 그는 괜찮다는 듯 세훈의 어깨를 힘주어 쥐었다.
"뭐하는 집에 뭐하는 새낀지는 모르겠지만 그 같잖은 알파 페로몬 하나 믿고 입을 놀리기엔, 우리 세훈이가 너무 아깝지 않니."
"예?"
"세훈이는 착해서 너같은 쓰레기들 그냥 살려 보냈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라는 뜻이야."
"...."
"세훈이가 봐줄 때 감사해야지.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면 뿌리째 뽑히지 않겠어?"
남자의 얼굴이 뒤늦게 가라앉았다. 굳이 페로몬을 풀어내지 않아도 위압적인 분위기에 짓눌린 남자는 한동안 입술만 벙긋거리다 꾸벅 허리를 숙였다. 대놓고 도망을 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를 노려보던 그는 마침내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세훈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훈아?"
"누가 말했어?"
"어?"
"나 오메가인 거. 누가 말했냐고. 종대 형이야? 경수 형?"
"...아니야, 훈아. 나 사실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 예전부터? 예전 언제? 어떻게 알았어? 누구누구 아는데. 혹시 아버지도,"
"...."
"...아버지도 알아?"
저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아버지의 눈빛이 떠올랐다. 세훈은 제발 아니길 바라면서 형을 바라봤다. 그러나 어색하게 표정을 굳힌 그는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세훈은 그 얼굴에서 대답을 읽었다.
"재밌었겠네. 혼자 밖에서 아등바등하는 꼴."
"미안해, 훈아. 네가 비밀로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먼저 말할 때까지 그냥 기다리자고 했어. 섣불리 아는 체 했다가 괜히 틀어질까봐."
화가 났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가족들이 잘못한 게 아니란 걸 아는데도. 지금껏 밖에서 혼자 걱정하고 두려워하던 게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걸 깨닫자 속이 들끓었다. 잠시 허탈한 웃음을 짓던 세훈은 비틀거리며 머리를 짚었다.
"세훈아!"
"건드리지마."
"...."
"...잠깐만. 나 좀 생각 좀 하자."
"훈아."
"다음에 얘기하자, 다음에. 지금은. 지금은 내가 뭘 해도 원망하고 미워할 것 같아."
부득불 자신을 집안에 들이려던 이유가 있었구나. 어떻게든 병원으로 데려오려던 이유가 있었구나. 그냥 그런 생각만 들었다. 그 마음이 결국 저에 대한 애정과 걱정이었음을 알면서도. 저를 속였다는 것에, 저를 바보로 만들었다는 것에 치미는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세훈은 저를 부축하려는 형의 손을 매정하게 쳐내곤 등을 돌렸다. 지금껏 대체 뭘 한 거지. 허탈한 마음에 시야가 어지럽게 일렁였다.
-
바쁜 하루만큼 복잡한 속내였다. 찬열은 여직 정리되지 못한 마음을 겨우 쓸어담으며 걸음을 옮겼다. 계속해서 혼자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보다 차라리 제 연인인 정을 만나 확실하게 이 감정을 매듭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제 손에 쥐어진 바싹 마른 것이 아직 푸른 빛을 띠고 있는지, 잡초라 여겼던 제 마음이 혹시 조금이라도 살아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확인받고 싶었다.
"정아."
떨리는 마음으로 그를 부른 찬열은 조심스레 신발을 벗고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걸음을 옮기자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가 보였다. 찬열은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얼굴로 인상을 쓰고있는 그를 보자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춰섰다. 아, 어쩐지 숨이 막혔다.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갑갑함에 잠시 머뭇거리던 찬열이 무거운 걸음을 옮겨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정아."
"왜 이렇게 늦게 와?"
"미안해."
"나 여기 있는 건 아예 잊어버렸지? 너 보러 기껏 미국에서 여기까지 왔건만 너는 일주일 내내 머리카락 하나 안 보이고 병원 일에만 미쳐가지고 전화도 안 하고."
"정말 미안해. 내가 정신이 없어서 너한테 전화하는 걸 잊어버렸어."
"정신이 없는데 왜 나한테 전화하는 걸 잊냐고. 다른 건 잊어도 나는 잊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미안해."
원래라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다음부터는 꼭 연락하겠다고, 몇번이고 다짐하며 약속했겠지. 그러나 찬열은 더 이상 그 어떤 약속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미래의 끈을 쥔 약속이 두려워졌다. 책임지지 못할 약속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결국 앵무새처럼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자 옆에 있던 쿠션을 집어 던진 정이 언성을 높였다.
"사과에 진심이 안 담겨있잖아!!! 왜, 뭔데. 그 오메가한테 홀리기라도 했어? 잤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발치에 떨어진 쿠션을 줍지 않았다. 정이 말하는 그 오메가가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눈치챈 탓이었다. 찬열은 가라앉은 목소리를 숨기지 않은 채 그를 바라봤다.
"왜 대답 안해. 진짜 잤어?"
"정아."
"말해, 잤냐고!!"
"그럴 리가 없잖아!"
처음이었다. 찬열은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를 따라 언성을 높혔다. 본 적 없는 찬열의 반응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정은 순식간에 표정을 굳히고 찬열을 노려봤다.
"너 지금 나한테 소리 지른 거야?"
"그만 하자."
"야. 어디 가. 거기 서."
"정아. 나 지금 너랑 좋게 말할 수가 없어."
"누가 좋게 말하래? 뭔데. 왜 그 오메가 얘기 나오니까 과민 반응인데? 너 진짜 걔랑 뭐 있구나?"
예전에는 어떻게 아무렇지 않았을까. 그저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하며 그의 눈치를 살피느라 몰랐다. 내 사랑이 나를 좀먹고 있었다는 거, 그게 더이상 사랑이 아니었다는 거. 잡초라고 여겼던 것이 사실은 다 말라비틀어진 건초에 지나지 않았다는 게 우스웠다. 찬열은 텅 빈 제 손을 내려다봤다. 문득, 유려한 눈매를 사정없이 구기며 저를 보던 세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게 정말 사랑이라고 생각하세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한 순간부터 어쩌면 이미 끝은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찬열은 마른 세수를 하며 잠시 숨을 골랐다.
"그래."
"뭐?"
"있다고. 그 애랑 나, 뭐 있다고."
"...너,"
말문이 턱 막힌 듯 정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찬열은 굳힌 마음을 더 단단히 동여맸다. 정이 세훈의 이야기를 꺼낸 순간부터, 뿌옇던 시야가 걷혔다. 한치 앞도 가늠하지 못해 걸음을 떼지 못하던 마음이 길을 찾았다. 찬열은 좀 더 단단한 목소리를 냈다.
"내가 그 애 좋아해."
"박찬열."
"좋아하게 됐어. 좋아해."
"박찬열!!"
"미안해, 정아. 너한테 미안하지 않아서 미안해. 그 애 좋아하는 게 부끄럽지 않아서, 싫지 않아서 미안해."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정아."
손에 땀이 뱄다. 제가 옳은 행동을 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두려웠다. 그러나 찬열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 저를 바라보는 정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내가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거야."
-
마음에 여러개의 방이 있었으면 좋겠다. 필요한 마음만 열어놓을 수 있도록, 견디기 힘든 것은 잠시 문을 닫고 감출 수 있도록. 정리되면 연락달라는 형의 문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훈이 한숨을 쉬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속이 복잡했다. 제 비밀을 알고 있었던 가족들에 대한 것도 심란했고, 저를 피하는 찬열을 보는 것도 심란했다.
대놓고 저와 있는 것을 꺼리는 찬열의 행동은 매순간 세훈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세훈은 찬열이 저와 단둘이 남을 때마다 어쩔 줄 몰라하며 눈을 굴리는 걸 알았다. 어떻게든 자리를 피하기 위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막내인 저보다도 먼저 콜을 받아 이알ER로 뛰어내려갔다. 허겁지겁 달려가는 찬열의 등을 볼 때마다 세훈은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찬열에게 일갈하듯 했지만 상처받는 건 또 세훈이었다. 좋아하는 마음은 언제나 그랬다. 아무리 애를 써도 품에서 가장 여린 속살이 드러났다.
"세훈아."
어색하게 저를 부르는 찬열을 보기 싫었다. 세훈은 자리를 피하기 위해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저와 함께 있는 걸 불편해하니 이알ER이라도 내려가 있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의국을 나서기 위해 몸을 돌리기 무섭게, 세훈은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왜 그래요?"
찬열이 울고 있었다.
세훈은 당황한 얼굴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찬열에게 다가갔다. 눈이 큰 탓인지 떨어지는 눈물의 양도 많았다. 무슨 일이지. 놀란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그에게 다가간 세훈은 뒤늦게 찬열의 입술이 터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설마 맞은 건가. 그 새끼가? 울컥 화가 치밀었다. 안 맞고 다닌다며. 폭력을 쓰진 않는다며.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묻고 싶은 말이 봇물처럼 쏟아질 것 같아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세훈은 끅끅 소리를 내며 우는 찬열의 앞에 멀뚱히 섰다. 위로를 해주고 싶은데 뻗는 손길에 제 사심이 묻어날 것 같아서 함부로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잠시 허공을 머물던 손이 겨우 찬열의 팔뚝을 거머쥐자 입술을 앙다물고 있던 찬열이 왈칵 소리를 냈다. 눈가를 가린 채 흑흑 소리를 내며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한 찬열에 세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허공에 둔 손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박 선생님."
"...."
"박 선,"
저한테는 매번 크게만 느껴지던 그가 상체를 잔뜩 구긴 채 제 어깨에 기댔다. 엉엉 아이처럼 우는 것도, 제 소매를 꽉 잡아 당기는 것도 모두 기분이 이상했다. 세훈은 그에게 부딪히지 않도록 턱을 치켜든 채 조심스레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요?"
"...."
"얼굴은 그 새ㄲ, 아니. 누가 그런 거에요?"
짧은 새 어깨가 축축해질 정도로 우는 걸 보면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세훈은 궁금한 것을 꾹 눌러삼키며 찬열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을 말없이 세훈의 어깨에 기대 울던 찬열은 겨우 울음기가 가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좋아한다구."
"...뭘요?"
"세훈아, 너."
"...."
"내가 너무 늦었어? 이제 나 안 좋아해?"
말문이 막혔다. 커다란 눈으로 제 눈치를 살피는 것에 뭐라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세훈은 멀뚱한 눈으로 제 얼굴을 살피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혹시 이게 꿈은 아닌가 싶었다. 실감이 나지 않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바라보기만 하자 저를 보는 찬열의 얼굴이 점점 울상으로 변해갔다. 세훈은 다급하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그 분은요?"
"헤어졌어."
"헤어졌다고요?"
"세훈아. 사실 나는, 아직도 내가 그 애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어."
"...."
"그런데 자꾸 너를 보게 돼서, 그래서 겁이 났어. 그래서 피하고 싶었어."
세훈은 축축하게 젖은 속눈썹을 내리깐 채 담담히 제 마음을 고하는 찬열을 바라봤다. 당연한 수순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음을 잡고 싶어서. 아직 그 애를 사랑한다고 믿고 싶어서 그 애를 만나러 갔는데 너만 생각나더라."
"...."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네가 나한테 보여주는 사랑이 너무 눈부셔서 그런 건가, 그냥 사랑의 시작이 부러워서 그게 예뻐서 그런 건 아닌가 했는데."
"...."
"아닌 것 같아."
드디어 마주친 눈이 마음을 덜컹이게 만들었다. 세훈은 목이 타는 기분에 절로 침을 삼켰다.
"아니야."
"...."
나는 너한테 주고 싶어."
"...."
"네 예쁜 사랑을 받기보다 주고 싶어. 그만큼 예쁘게, 그만큼 눈부시게 너를 사랑하고 싶어."
숨이 막혔다.
"세훈아."
불현듯 다가온 이 적나라한 마음에.
"나 네가 좋아."
사랑을 아끼지 않는 눈앞의 남자에.
세훈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제 대답을 기다리듯 눈물 방울이 맺힌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침묵하던 찬열이 커다란 눈을 굴렸다.
"그래도 돼?"
어떻게 아니라고 할 수 있지. 어떤 사람이면 이 마음을 거절할 수 있지.
세훈은 제 손에 얼굴을 묻었다. 숨길 수 없는 마음이 뺨에, 입술에, 귓가에 피어났다. 제 마음일까, 넘치는 것을 주체하지 못한 찬열의 마음일까. 무엇이든 상관 없었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저를 옥죄던 갖은 고민들이 모두 잊혀졌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세훈은 여전히 제 소매를 쥔 찬열의 손을 잡았다. 좀 전까지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던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졌다. 걱정할 필요가 있던가. 그가 내가 좋다는데. 고민할 것이 있나. 이 사람이 날 사랑하고 싶다는데.
세훈은 덮어 쥔 손을 제쪽으로 끌었다. 얼결에 고개를 든 찬열이 저와 눈을 맞추자 망설일 것이 없었다. 세훈은 피딱지가 앉은 입술에 입을 맞췄다. 따끔거리는지 닿기 무섭게 움찔거리던 찬열이 이내 두 눈을 질끈 감는 것이 보였다.
"박 선생님."
"응."
"사실 제가 지금 되게 복잡하고 힘들고 한 상황이거든요?"
"왜? 무슨 일 있어?"
"얘기하자면 길고 복잡한데 아무튼 그래서 되게 힘들었는데 박 선생님이 저 좋다고 해서 다 잊혀졌어요."
"진짜?"
"진짜."
둥근 이마에 제 머리칼을 부비며 속삭이듯 말하자 고개를 살짝 숙여 이를 맞춰준 찬열이 환하게 웃었다.
"어떡해."
"왜요?"
"주고 싶은데 자꾸 너한테 받는 기분이야. 네가 빨리 내 맘 받아야 되는데."
"천천히 주면 되죠. 오늘 지나면 뭐 없어질 건가?"
"절대 아니지."
제 허리를 꼭 안은 채 고개를 젓는 모습이 아이 같았다. 세훈은 괜히 콧방귀를 뀌며 입술을 비죽였다.
"얼마나 잘 하나 한번 보죠, 뭐."
이미 가득찬 것은 등 뒤로 숨겼다. 세훈은 채워도 채워도 다 채워지지 않는 것처럼 빈 잔을 내보일 작정이었다. 쏟아붓는 사랑을 모조리 다 담아낼 수 있게. 단 한방울도 아쉽게 흘려보내지 않게.
군기가 바짝 든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세훈은 제 허리를 끌어안은 단단한 팔을 느끼며 미소지었다. 저를 감싸안은 모든 것이 모두 제 것이었다. 믿기지 않게도.
-
"...."
불안했다. 혼나러 온 것도 아닌데 속이 복잡했다. 세훈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차에 기대 서있던 찬열이 양손을 번쩍 들었다. 화이팅! 주먹을 꼭 쥔 채 흔드는 것에 겨우 마음이 놓였다. 세훈은 저 또한 찬열을 따라 주먹을 쥐어보이곤 크게 심호흡을 했다. 초인종을 누르기 무섭게 아무런 대답없이 문이 열렸다. 세훈은 제 뒤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을 찬열의 얼굴을 떠올리며 무거운 걸음을 한걸음씩 옮겼다.
"왔으면 앉아."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저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애써 표정을 갈무리한 세훈이 자리에 앉았다. 정신없는 병원 일 때문에 제대로 식사를 하는 게 힘들다보니 세훈이 집에 올 때는 항상 다같이 모여 집밥을 먹는 것이 일상이었다. 세훈은 제 앞에 가지런히 놓인 찬들을 내려다봤다.
"병원은, 계속 거기 다닐 거고?"
이제사 걱정어린 눈빛이 보인다. 못마땅한 마음에 구겨진 것이 아니라, 걱정스러운 마음에 구겨진 미간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세훈은 콱 막힌 목에 무작정 고개부터 끄덕였다.
"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의사들은 알파던데."
애꿎은 국을 수저로 휘저으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호텔에서 저를 다그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답지 않게 언성을 높이던 아버지가 당황스러웠는데 그조차도 제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세훈은 이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괜찮아요. 다들 좋은 분이고, 서로 조심하고 있어요."
"세훈아."
"...."
"너 오메가로 발현한 건 너 나가고 나서 알았다. 네 방 정리하다가."
아직도 제 방 정리를 손수 하신다던 형의 말이 떠올랐다. 세훈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멀건 국그릇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우리 집이 알파 가문이니 뭐니 하는 걸로 불리는 건 알고 있는데, 그게 우리를 전부 말해주진 않아."
"...."
"네 형들이 알파라는 기질 하나 믿고 돌아다녔으면 진작에 내가 내쳤을 거다. 오메가였어도 마찬가지야."
"...."
"기질은 상관없어. 네가 오메가든 알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
"세훈아."
아버지는 한참을 망설였다. 세훈은 이미 손톱을 잔뜩 세워 무릎을 움켜쥐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터지려는 울음을 꾹 참고자, 따뜻한 밥을 앞에 두고도 손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너 내 아들이야."
그러나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 세훈은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눈가를 덮은 손바닥이 금세 눈물로 축축했다.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나 보다. 스스로도 모르게, 저조차도 모르게 간절했던 말이었나 보다. 알게 모르게 쌓여있던 설움이 씻겨내려갔다. 혼자 끌어안고 어찌할 줄 몰라하던 두려움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세훈은 제 등을 토닥이고, 제 어깨를 끌어안는 손길들을 느끼며 더 크게 울었다.
혼자서 지켜내기엔 너무 거대하다고만 생각했던 집이 모두가 함께 손 잡은 울타리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왜 이렇게 늦게 알았을까. 대체 뭘 이렇게 모르고 살았지. 후회스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훈아."
세훈은 아주 오랜만에 듣는 따뜻한 목소리에 양팔을 벌려 그를 안았다. 저만큼이나 애틋한 얼굴을 한 아버지가 있는 힘껏 세훈을 안아주었다.
"괜찮아. 울어."
숨통이 트였다. 창문 하나 없이 사방이 막힌 방 안에 저를 가두고 숨기기만 했던 세훈에게 겨우 문이 열렸다. 세훈은 필사적으로 저를 안아주는 품에 뺨을 부볐다.
이제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제가 지켜낸 이가 저를 지켜줄 것이었다. 저를 지켜준 이를 제가 지킬 것이었다. 그거면 되었다.
그거면, 이제 다 되었다.
-
집을 나서기 전 확인한 얼굴이 엉망이었다. 감추고 싶어도 붉게 달아오른 것이 눈물의 흔적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세훈은 민망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부러 더 무표정한 얼굴로 찬열의 차에 다가갔다. 가볍게 노크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 락이 풀리고 문이 열렸다.
"세훈아, 왔어?"
걱정을 담은 시선이 재빠르게 얼굴을 확인한다. 괜히 헛기침을 하며 입가를 가린 세훈이 고개를 돌리자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찬열이 뒷좌석에서 비닐 봉지 하나를 챙겼다.
"목 마르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쥐어주는 것은 차가운 물과 편의점에서 파는 얼음컵이었다. 누가 봐도 엉망이 된 얼굴의 열기를 달래라고 건네는 것임을 알아서 마음이 뭉클했다. 세훈은 바스락 소리를 내는 비닐 봉지를 대충 구기고 찬열을 바라봤다.
"형."
"응?"
제가 민망하기라도 할까봐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이 사랑스럽다. 저를 배려하고 싶어 서툴게 준비한 얼음컵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찬물도. 애꿎은 핸들을 쥐었다 놓는 찬열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세훈은 이내 고개를 들어 찬열의 뺨을 감쌌다.
"...."
고마움을 담아, 애틋함을 실어 입을 맞추자 놀란 듯 눈을 크게 떠보이던 찬열이 이내 귓가를 빨갛게 물들였다.
"세훈아, 너 좀 너무한 거 아니니."
"왜요?"
"내가 준다고 했는데 매일 네가 주잖아. 나도 너한테 주고 싶은데."
"그럼 주면 되죠. 자."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자 당황하는 기색이 여실히 느껴졌다. 세훈은 치미는 웃음을 꾹 참고 얇은 입술을 아기새처럼 내밀었다.
"왜요, 준다면서요."
놀릴 의도가 다분한 마음으로 내준 얼굴이었는데 조심스러운 손길이 뺨에 와닿았다. 세훈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려던 것을 꾹 참고 제 뺨을 감싸는 온기를 받아들였다. 찬열만큼이나 온기가 도는 손이었다. 다칠 리도 없건만 엄지로 살살 뺨을 쓰는 것에 괜히 간지러워진 세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슬쩍 몸을 물리자 기다렸다는 듯 입술이 닿았다. 세훈은 천천히 눈을 떴다. 가볍게 입술 도장을 찍은 얼굴이 멀어지자 아쉬우면서도 좋았다.
"세훈아, 사랑해."
커다란 눈 가득 제가 담긴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세훈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찬열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랑을 하는 이는 눈부시다 하지만 찬열만큼은 아니었다. 자신의 사랑에 숨김이 없는 남자는 매순간 망울진 자신의 마음을 터트렸다. 한껏 부풀어올라 터지는 마음들은 하나하나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만큼 생기 넘치고 향긋했다. 속이 뜨거울 정도로 차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한 세훈은 찬열의 멱살을 덥석 잡아 제쪽으로 끌었다. 무력하게 끌려온 입술을 허겁지겁 삼키자 순순히 벌어진 입술이 저를 반겼다. 욕심껏 베어물고 삼키려 했는데 되려 제 뒷통수를 감싸쥔 찬열이 코끝을 부딪히며 더 깊게 파고들었다.
아, 어쩌면 좋아.
온몸으로 쏟아지는 꽃비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훈은 꽃잎에 파묻힌 채 눈을 질끈 감았다. 향기에 절여진 몸에서 제 것인지 찬열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향이 물씬 풍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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