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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준] 고전물 썰

 

 

 

트위터 썰 백업 입니다.

 

 

 

 

 

 

 

슈는 어려서 황제가 된 탓에 신하들의 기에 짓눌려 제대로 된 황제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자랐다. 그러다보니 절로 황권 강화에 열을 올리게 되고 그 방법 중 하나로 찾은 것이 바로 영토 확장.

겨우 열일곱의 나이로 나서게 된 정복 전쟁에 대신들은 또다시 혼인을 강요했다.

밍섟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그 혼례를 받아들였다. 상대는 재상의 아들, 쥰멵.

밍섟은 그에게 시선 한번 제대로 주지 않은 채 혼례를 치뤘고 식순이 모두 끝난 뒤엔 초야를 기다리는 반려를 두고 그대로 전장으로 떠났다. 

그에게 그 무엇도 주고싶지 않았기에.

너는 절대로 내 마음을 얻지 못할 거라 말하고 싶었기에.

혼례를 치르는 동안에도, 혼례가 끝난 뒤에도 쥰멵의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7년 후.

 

 

밍섟은 승전보와 함께 돌아온다. 대승이었다. 역사상 가져본 적 없는 거대한 영토와 명성, 수많은 백성들의 지지와 성원.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거머쥔 것은 승리인 동시에 모든 것을 베어낼 검이었으니. 

그러나 저들만의 힘겨루기에 빠져 고개를 들지 못한 이들은 하늘을 올려다볼 줄 몰랐다. 밍섟이 든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여직 밍섟을 열일곱 어린 황제로만 여긴 그들은 완연한 황제의 모습을 한 밍섟을 무시했다.

오랫동안 전장에 계신 탓에 정치에 대해서는 어려움이 많으실 테니 부디 저희에게 맡겨두라는 건방진 말을 서슴없이 내던지던 대신들은 그날 열린 승전회에서 모두 목이 잘렸다.

밍섟은 마음같아선 재상과 그의 아들 쥰멵까지 죽여버리고 싶었으나 뱀같은 재상은 와병을 이유로 칩거하였으며 쥰멵은 마땅한 명분이 없었다. 

 

 

 

-후后.

 

 

 

결국 제왕帝旺의 귀환이라 불리는 그 밤, 그토록 염원했던 재상과 쥰멵을 죽이지 못한 밍섟은 아침이 되기 무섭게 쥰멵과 수라를 같이 했다.

누가봐도 경고의 뜻이 다분한 행동이었다.

쥰멵은 내리깐 눈을 감히 들지 않은 채 묵묵히 밍섟의 하문을 기다렸다.

 

 

 

-짐이 오랜 시간 궁을 비워 궐 내 소식이 너무 어둡군. 갑자기 비게 된 자리가 너무 많아 빠른 시일 내에 인재를 찾아야 할 텐데, 혹 후께서 아시는 인재가 있습니까?

 

 

 

다정한 옥음을 내었지만 그것이 품은 것은 칼이었다. 본디 후后의 자리에 있는 자가 정무에 관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사실상 거의 조롱이나 다름없는 질문을 던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수저를 내려놓은 쥰멵이 뜻밖의 대답을 했다.

 

 

 

-예조의 부교리 오새혽, 이조의 정랑 볁벀혅, 병부의 좌랑 밬챥녈이 제법 좋은 재능을 가졌다 들었습니다.

-...들었다고? 

 

 

 

후后가 겨우 정 6품짜리 벼슬아치들을 알기는 힘들다. 게다가 망설임없이 나오는 이름들이라니. 밍섟은 치가 떨리는 기분에 들고있던 수저를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짐이 없는 사이 짐의 자리까지 대신하느라 고생이 많았나보군.

-돌아오실 자리가 평안하도록 살피는 것이 또한 저의 의무입니다.

 

 

 

분노를 숨기지 못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에 답하는 이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밍섟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고는커녕 인사도 없이 자리를 뜨는데도 쥰멵은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되려 의연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에 뒤 한번 돌아보지 않은 밍섟은 서둘러 궁을 나섰다. 

죽였어야 했는데. 반드시 죽여야 했는데. 원통함에 하늘이 핑 도는 것만 같았다.

밍섟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후后가 있는 궁을 노려봤다.

 

 

 

-후后가 말한 이들을 조사해보거라.

-예, 폐하.

-그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철저히.

 

 

 

죽이기로 결심하였으니 죽여야 했다. 밍섟은 소용 없을 걸 알면서도 쥰멵의 수라에 독을 타라 명하였다.

은밀한 명은 재빠르게 실행되었으나 아쉽게도 쥰멵이 중독됐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밍섟은 어차피 기대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딱히 실망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의외의 곳에서 밍섟을 놀라게 만드는 일이 일어났다.

 

 

 

-이게 진정 사실이더냐.

-예,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확인해본 결과로는 그러하옵니다.

 

 

 

어째서?

밍섟은 죥댸가 올린 보고서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해할 수 없게도, 쥰멵이 추천한 이들은 모두 쥰멵과는 면식조차 없는 이들이었다. 심지어 그들 중 하나는 쥰멵의 이종사촌 형제에게 입바른 말을 했다가 다른 관리들에게 배척 당하고 직책이 강등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었다.

무슨 속셈이지?

밍섟은 검지를 톡톡 내리치며 쥰멵의 속내를 짐작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7년 만에 만난 반려의 뜻을 읽기에 그들은 너무 먼 사이였다.

결국 작게 혀를 찬 밍섟은 죥댸가 올린 보고서를 가지런히 덮었다.

 

 

 

-좀 더 지켜보지.

 

 

 

 

 

 

 

 

-

 

 

 

 

 

 

 

 

 

-오늘도 죽었습니다.

-그렇겠지.

-헌데 이번엔, 독이 하나만 검출된 것이 아니라 합니다.

 

 

 

평온한 얼굴로 붓을 놀리던 쥰멵이 멈칫 손을 굳혔다. 겭스는 창백하게 질린 그의 얼굴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처음에는 그저 저 혼자 알고 묻어버릴까 싶기도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혹 화를 당하진 않을까 싶어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제 손으로 제 주군의 심장에 칼을 쑤셔넣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가 저라고 마음 편할 리 없었다.

겭스가 착잡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자 들고있던 붓을 그제야 내려놓은 쥰멵이 고개를 들었다.

 

 

 

-헌데 왜 그리 죄지은 표정이야.

-마마.

-독이 하나가 아니란 걸 알아차리다니, 그 철두철미에 칭찬을 들어도 모자랄 판에 어찌 그리 울상을 지어.

-마마. 차라리 모든 것을 밝히시고 폐하께 도움을 청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겭스야.

-이리 원통한 것이 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이용하다 못해 죽이려 하고, 아무것도 알지도, 알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죽이려 하다니,

-겭스야.

-

-듣는 귀가 많아.

 

 

 

주군의 모든 것이 애달프고 애달팠다. 겭스는 참지 못하고 눈을 꾹 감았다.

쥰멵은 세도가 김家의 병약한 넷째로 알려졌지만 실은 서출이었다. 그의 어미는 집에서 부리던 여종으로 재상의 둘째보다 나이가 어렸다.

눈에 띄게 배가 불러오던 시점부터 악을 쓰는 본부인의 눈을 피해 뒷방에 숨었던 그녀는 비명 한번 제대로 질러보지 못한 채 숨죽여 쥰멵을 낳았다.

그런데 태어난 아이는 아들이었으나 아들이 아니었다.

사내였으나 사내가 아니었다.

아이 울음소리가 터지기 무섭게 피가 배인 말을 쏟아내려던 마님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어미는 눈물과 땀이 뒤섞여 엉망이 된 얼굴로 아이를 끌어안았다.

분명한 향을 가늠할 순 없으나 아이가 가진 것은 분명 꽃의 향이었다.

화인花人.

사내의 몸으로도 아이를 낳을 수 있다던 기묘한 존재인 것이었다.

어미는 구슬프게 울었다. 태어난 아이가 가엾고 아이의 미래가 두려운 탓이었다. 

화인이란 이유로 죽음을 면하였으나 그 삶이 죽음보다 낫다고 단언하진 못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미를 잃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어미를 잃은 뒤 쥰멵은 단언했다.

죽음보다 나은 삶일 리는 없다고.

이름뿐인 가족들에게 갖은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자랐던 쥰멵의 삶이 바뀐 것은, 밍섟으로 인해서였다.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그를 손아귀에 넣고 흔들고 싶어했던 재상은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 바로 그의 장인이 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다른 대신들과 달리 첩실에게서도 여식을 얻지 못한 탓에 그는 금족령이 내려진다 하더라도 사주단지를 낼 수가 없었다. 결국 이대로 가다간 다 된 밥상을 눈 뜨고 빼앗기게 될 판이 돼버린 재상은 며칠을 고민하며 골머리를 앓다 떠올리고 말았다.

집안 가장 허름한 곳, 가장 그늘지고 초라한 곳에서 은은히 피어나던 그 이름모를 꽃.

후后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바로 후사였으니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화인이 황후 간택에 참여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재상은 결국 아이를 궁에 보냈고 기어코 후后의 자리에 올렸다.

쥰멵은 모든 것이 우스웠다.

사주단지를 내기 전 찾아왔던 재상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아비였는데도 애틋하지도 그립지도 않았다. 그의 눈빛을 통해 쥰멵은 그 또한 저와 같은 생각이란 걸 깨달았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손짓했고 쥰멵이 평생 본 적 없는 비단과 패물들을 방 안 가득 채웠다.

 

 

 

-이제 네 것이다.

-

-어쩌면 이것을 창고 가득 채워도 모자랄만큼의 패물이 네 것이 될지도 모르지.

-제게 바라시는 게 있습니까.

-머지않아 궁에 갈 것이다. 너는 후后의 자리에 오를 것이고 세상 모든 이들을 발 아래 꿇어앉힌 채 가장 고귀한 신분으로 자리하겠지.

-

-아무것도 하지 말거라. 그저 숨만 쉬고, 그저 살아만 있어.

-나으리.

-네 존재가 내가 바라는 것이다. 네가 서있는 것이 내 필요한 것이야.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죽이라든지, 황제를 꾀어내라든지 뭐 그런 일을 시킬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쥰멵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재상은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 섬뜩하여 쥰멵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네가 그 중한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 믿지 않으니.

-

-걸리적거리지 말고 숨만 쉬고 있어. 그래도 내 피가 섞인 자식인데, 내 손으로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에 절로 손이 떨렸다. 껄껄 소리를 내며 호탕하게 웃어보인 재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는데도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할 정도의 공포였다. 새하얗게 질린 쥰멵은 한참이나 그 자세 그대로 굳어있었다.

길거리에 핀 잡꽃, 누구에게나 쉬이 짓밟히고 꺾여 나뒹구는 그것이 된 기분이었다.

 

 

 

 

 

 

 

 

 

-

 

 

 

 

 

 

 

 

 

아무것도 하지 말자.

그 자의 말처럼 그저 숨만 쉬고 눈만 깜빡이며 감히 숨소리조차 내지 말자.

그리 다짐하고 그리 결심했다.

잡꽃이든 뭐든 살아야 했으니 더 그랬다.

그러나 이 필사의 다짐은 너무나 우습게도 쉽게 무너졌다.

후后로 간택된 후 혼례를 치르기 전 가지는 기나긴 교육중 벌어진 조우때문이었다.

비록 천시받고 자랐다고는 하나 재상의 핏줄이었으니 그 또한 재상의 이름에 먹물 한방울 튀길 정도의 존재는 되었다.

혹시 모를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어려서부터 쥰멵을 지켜온 겭스와 궁에 들어온 쥰멵은 이곳에서조차 저를 반기지 않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갖은 눈총과 경계를 받아야만 했다.

그나마 의지할 이는 겭스 하나인데 겭스조차 재상이 붙여줬던 사람이니 온전히 믿을 수가 없어 매일을 방황했다. 결국 겭스도 궁인들도 모두 피해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던 쥰멵은 얼마 되지 않아 길을 잃고 말았다. 커다란 궁의 위치를 외우는 것은 몇번을 해도 헷갈리는 것이라 대강 기억나는 지리를 따라 걸음을 옮긴 것이 화가 되었다. 쥰멵은 커다란 단풍나무가 있는 궁을 몇번이나 왔다갔다하며 길을 찾았다.

분명 이리 가면 바다만큼 넓고 깊은 호수가 있다 하였는데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옮기던 걸음만큼 쌓이고 쌓인 두려움을 견디지 못한 쥰멵은 왈칵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용기를 내서 나온 것인데 보고 싶은 연못도 못 보고 길도 잃었으니 이제 큰일이다 싶어진 탓이었다.

커다란 단풍나무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흑흑 설움 섞인 울음을 겨우 토해내자 고요한 사방에서 문득 낙엽 밟히는 소리가 나더니 밍섟이 나타났다. 양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본격적으로 울음을 터트리려던 쥰멵은 너무 놀란 나머지 울던 것도 잊고 그대로 굳어졌다.

세상에, 황제라니.

새끼 주제에 제가 맹수인 줄 안다며 재상이 몇번이나 비웃던 그 황제라니.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쥰멵은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궁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된 외부인들은 정식 궁인이 되기 전까진 금언령禁言令이 내려지는 덕에 쥰멵은 눈 아래를 완전히 가리는 얇은 비단을 두른 채였다.

제법 어린 태가 나는 황제는 멀뚱히 저를 바라보는 쥰멵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다 다가왔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

-황제의 명이니 대답하여도 좋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물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소인, 소신, 아니 소인 황궁에 자리했다는 호수가 보고 싶어 길을 나섰다 그만 방향을 잃어 헤매고 있었습니다.

-호수? 설룡이 오수를 든다는 그 호수 말이냐?

-예, 폐하.

-흐음.

 

 

 

황제만큼 쥰멵도 풋내를 풍겼으니, 아마 황제의 의심은 조금 쉽게 거둬졌던 것 같다. 그는 거리낌없는 몸짓으로 쥰멵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거라.

-예?

-데려다주마.

 

 

 

어떤 방법으로도 감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아니, 어떤 방법이 있었다 하더라도 감히 거절하지 못했을 제안이었다. 쥰멵은 제게 내밀어진 손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맞잡았다.

단단하게 저를 잡아주는 온기는 어미를 잃고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쥰멵은 저를 이끄는 손에 아무 생각없이 끌려가며 둥근 뒷통수를 훔쳐봤다. 보무도 당당한 황제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쥰멵을 호수까지 데려다주었다.

 

 

 

-와아!

 

 

 

바다는커녕 냇가 한번 가본 적 없는 쥰멵에게 호수는 미지의 세계였다.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주변을 돌아보고 웃음짓는 모습이 지나치게 순수하고 맑은 탓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린 밍섟은 슬그머니 쥰멵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리 신기하냐?

-예...! 이리 큰 물은 처음 봅니다. 정말 너무 커요. 여기 물을 길어다 써서 궁에서는 물도 아낌없이 쓰나봐요!

 

 

 

순수하고 엉뚱한 감상이었다. 터지는 미소를 참지 못한 밍섟은 바쁘게 돌아가는 아이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헌데 너는 어디서 온 것이냐?

-예?

-아직 금언령이 내려진 것이라면 궁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텐데, 어찌 들어왔어?

 

 

 

쥰멵은 아차 싶었다. 그러고보니 경황이 없어 제가 후后의 자리에 오를 사람이라는 것도 말하지 못했다. 재상에게 듣기로는 말하는 것이 서릿발내린 것처럼 차갑고 매섭기 그지 없다 하여 지레 겁을 먹었는데 우는 저를 지나치지 않고 말을 걸어준데다 호수를 찾아 데려다주기까지 하였으니 재상의 말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닌가. 쥰멵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소인은,

-폐하!

-이런.

-폐하! 여기 계셨습니까? 혼례 준비로 확인해야 할 것이 산더미인데 어찌 여기 계신단 말입니까. 혼례복 시침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깟 혼례 이름뿐인 것을.

 

 

 

그러나 겨우 벌린 입은 다시 굳게 감쳐물렸다. 일갈하듯 내뱉는 목소리는 냉기는 물론이거니와 어렴풋이 살의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에게서 악의와 멸시 섞인 시선을 받아 왔던 쥰멵이 모를 리 없었다.

황제는, 눈 앞의 남자는 쥰멵을 증오했다.

충격에 다리 힘이 풀린 쥰멵이 비틀거리자 밍섟은 재빠른 손길로 쥰멵의 허리를 붙잡아 안았다.

 

 

 

-괜찮으냐?

 

 

 

이 다정한 눈빛도, 목소리도. 모두 제가 제가 아닐 때만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쥰멵은 기가 막혔다. 어째서? 대체 어째서 내게는 이리 가혹하기만 하지?

물어도 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쥰멵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등을 돌려 달아났다. 놀란 밍섟의 목소리가 연신 저를 불렀지만 그 또한 뿌리쳤다.

억울하고 서러웠다.

존재만으로도 미움받아야 하는 것은 쥰멵의 잘못이 아닌데도 그러했다.

그리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치뤄진 혼례는 그 어떤 기대도, 기쁨도 없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쥰멵은 황제가 식이 모두 끝나기 무섭게 전장으로 달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뒤 한참이나 혼자 신방을 지켰다.

초야 날 후后의 머리와 혼례복은 오직 황제의 손만 거칠 수 있다. 허나 이를 내려줄 이는 이미 전장으로 가버렸고 돌아올 날도, 돌아오겠다는 다짐도 기약하지 않은 채였다.

이 선연한 거부를 그 누가 모를 수 있을까.

쥰멵은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직접 머리를 내리고 혼례복을 벗었다. 무겁고 화려한 것을 모두 내리고나니 면경 속에는 보잘 것 없고 초라한 쥰멵의 모습이 익숙하게 비춰졌다.

손아귀에 겨우 들어오는 비녀를 힘주어 몇번이나 움켜쥐며 그 모습을 새기듯 한참을 바라본 쥰멵은 새벽이 올때까지 그 자세 그대로 앉아있었다.

 

 

 

 

 

 

 

 

그 밤, 쥰멵은 제 속에 무언가를 죽였다.

 

 

 

 

 

 

 

 

 

-

 

 

 

 

 

 

 

 

 

 

황제의 편을 들 생각은 없었다.

황제에게 칼을 들이밀 생각도 없었다. 쥰멵은 처음 재상이 요구한대로 그저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막은 채 하루를 버텨내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 모시게 된 마마님이라며 수줍게 뺨을 붉히던 어린 것이, 멋모르고 마마님은 꽃같이 아름다워 화인인 것이지요, 하고 묻던 말간 것이 차가운 돌덩이가 되어 돌아온 날 쥰멵은 그 다짐을 버렸다.

그 밤, 손에 쥔 비녀로 몇번이나 찌르고 찔러 죽여버렸던 그것을 기어코 되살렸다.

쥰멵은 황제가 아닌 자신을 위해, 제 곁의 사람들을 위해 발톱을 세우기 시작했다.

후后의 권력을 모두 손에 넣어 재상의 손아귀를 벗어나리라. 저를 뒤흔들기 위해 주위의 사람들을 모두 길가에 핀 잡꽃마냥 대하던 재상의 위에 서리라.

쥰멵은 연모가 아닌 생존을 위해 악독하게 굴었다.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걸 이용하고 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렸다.

후后의 자리는 제법 쏠쏠한 것이라 아무리 재상이라 해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애초에 그가 조정에서 마음껏 날뛸 수 있는 것은 황제의 장인, 국구의 자리에 있다는 것 때문이었으니.

재상이 쥰멵을 쉬이 건드릴 수 있을 리 없었다. 쥰멵은 위태로운 힘겨루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이 팽팽하던 줄다리기에, 황제가 나타나면서 이상이 생겼다.

쥰멵은 겨우 한번뿐이었던 그 만남이 중요하지 않다 여겼다. 황제는 저를 싫어하니 저 또한 그에게 줄 마음따위는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건만.

전장에서 돌아온 그를 마주한 순간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를 맞이하기 위해 나온 쥰멵을 차갑게 내려다보는 시선을 마주한 순간. 그 시리고 시린 비수가 심장에 꽂힌 순간.

쥰멵은 제가 아주 오랫동안 그를 마음에 품어왔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깨달음은 너무 절실했고 한번 움튼 것은 끝을 모르고 자라났다. 쥰멵은 속에서 자라나는 그것을 잘라내지도 뽑아내지도 못하고 허둥지둥했다.

피어나서는 안 되는데, 꽃이 피어선 안 되는데.

매순간 초조함에 날이 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황제는 꽃이 피어날 양분도, 태양도 주지 않아서 겨우 자란 싹만 그 자리에서 말라갔다.

쥰멵은 차라리 그것이 썩길 바랐다. 썩어 문드러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를. 그 무엇도 남기지 않기를.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하늘은 이번에도 쥰멵의 손을 뿌리쳤다.

대신들의 강력한 요구로 이뤄진 합방이었다. 두 사람 다 원하지 않았지만 7년을 따로 지내며 소임을 다 하지 못하였다는 대신들의 말에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접경 지역에서 마음에 드는 이를 찾아 혼례를 할 거 그랬다며 우스갯소리같은 진담을 던진 밍섟은 무거운 걸음으로 합방을 치를 내실 안으로 들어섰다. 저만큼이나 굳은 얼굴을 한 쥰멵을 보니 이 모든 게 우습기까지 했다.

이런 두 사람이 어찌 합방을 한다고.

치미는 욕지기를 참으며 자리에 앉은 밍섟은 기미를 모두 마친 술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입에 댈 생각은 딱히 없었다. 지난 번의 보복으로 독이라도 들었으면 어쩌려고.

그런데 그런 밍섟의 시선을 어떻게 읽은 것인지 쥰멵이 덥석 손을 뻗었다. 느린 손짓으로 상에 올려진 안주들을 하나씩 꼭꼭 씹어 삼키고 한켠에 놓인 술까지 한잔 따라 꼴깍 비우자 밍섟은 되려 입맛이 떨어졌다.

먼저 나서서 음식에 손을 대는 것이 수상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밍섟이 멀뚱히 쥰멵을 바라보기만 하자 그 시선에 저도 모르게 회의감이 든 쥰멵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후后.

-

-그대에게 묻고싶은 것이 있소.

 

 

 

그리고 그런 쥰멵의 뜻 모를 웃음에 밍섟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대체 어떻게 그런 인재들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 그네들을 자신에게 추천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러나 밍섟이 채 질문의 서두를 꺼내기도 전에 쥰멵이 와락 밍섟에게 달려들었다.

밍섟은 쏟아지듯 제게 안기는 쥰멵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얼결에 그를 끌어안았다. 화인花人이라 하더니 그네의 몸에서 나는 정체모를 꽃향이 선명하게 와닿았다. 

 

 

 

-지금, 지금 이게 무슨,

-듣는 귀가 많음을 잊으셨습니까.

 

 

 

밍섟과 함께 있으면 제 몸이 제 것 같지 않았다. 자꾸만 밍섟을 보고 싶고, 그를 돕고 싶어 안달이 났다.

훗날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 점찍어 두었던 인재들의 이름을 술술 늘어놓고 주안상을 의심스레 바라보는 밍섟을 위해 재차 기미를 할 정도로 저는 미쳐있었다.

눈앞의 사내에게, 덜 익은 풋사랑에.

쥰멵은 매번 기구한 길만 골라 걷는 스스로가 가엾고 우스워 눈을 질끈 감았다.

 

 

 

-허면 다시 묻겠소.

-

-그대는 무슨 생각이지? 

 

 

 

제 말에 숨은 귀를 의식한 탓일까. 밍섟은 쥰멵의 허리를 끌어안고 제게 당겼다. 쥰멵은 잠시 숨을 멈춘 채 옷깃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아무리 의심을 담고 아무리 경계를 담았다 해도 쥰멵에겐 그저 달콤하기만 했다.

어쩌면 좋아.

새싹 하나 자랐다 여긴 마음에 떡잎이 자라고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쥰멵은 덤덤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애쓰며 마른 침을 삼켰다.

 

 

 

-폐하와 같은 생각이옵니다.

-뭐?

-저 또한 폐하와 같이 여우 사냥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호랑이가 자리를 비운 산에는 여우가 왕 노릇을 한다 하였다. 쥰멵은 평생을 아버지라 여겨본 적 없는 아비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목을 끌어안은 팔을 잡아 내린 밍섟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쥰멵을 바라봤다.

 

 

 

 

 

 

 

 

-후后.

-

-여우를 사냥하는데 여우를 이용하는 사냥꾼은 없어. 

 

 

 

너도 똑같은 부류잖아, 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에 순간 심장이 멎었다.

아아, 그래.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재상과 처절한 힘겨루기를 했으니 그게 그에게는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한 추악한 욕망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아니, 보였을지 모르는 게 아니라 그렇게 보였겠지.

당연한 일인데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합리적인 의심인데, 당연하게 나올만한 이야기인데 눈앞의 그에게 정신이 팔려 그런 것에 대해 해명하거나 설명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혼자 급급했다. 쥰멵은 아랫입술을 말아물었다.

어리석다, 어리석어.

이제와 무슨 해명을 해도 밍섟의 마음을 돌리기는 어려우리라.

한번도 이런 적이 없는데, 지나치게 조심성이 넘쳐 수십번을 확인하고 정리하여 겨우 한걸음을 내딛는 성격인데 조바심에 쫓겨 스스로 일을 망쳤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쥰멵은 여전히 밍섟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은 채 그 칼날같은 시선을 마주했다.

너무 아픈 시선인 탓일까. 이제사 깨달은 연모의 감정이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무겁고 두려운 탓일까.

심장 한구석이 저릿할만큼 아프고 당겼다. 쥰멵은 견디지 못하고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황후?

 

 

 

뭔가 이상했다.

쥰멵은 반사적으로 밍섟을 밀어냈다.

틀어막은 손 틈새로 붉은 꽃잎이 점점이 떨어졌다. 놀란 얼굴로 재차 저를 부르는 밍섟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쥰멵은 주안상을 돌아봤다.

독毒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어떻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재상에게 맞서기로 결심한 뒤 쥰멵은 오랜 시간에 걸쳐 독에 대한 면역을 길러왔다.

웬만한 독에는 반응조차 하지 않고 혀만 대면 단번에 눈치를 챌 정도로 독을 배우고 대비했는데.

왈칵 뱉어낸 핏덩이가 제법 컸다.

쥰멵은 다급하게 궁인들을 부르는 밍섟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암흑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었다. 

 

 

 

 

 

 

 

 

 

-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이틀이 지난 뒤였다. 쥰멵은 일어나자마자 날짜를 확인한 뒤 생각에 잠겼다.

비록 재상과 힘겨루기를 하며 척을 지긴 했지만 밍섟이 돌아온 이상 재상은 쥰멵이 필요했다.

명분도 없이 반정을 일으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후계라도 세운 뒤 밍섟을 죽이든 해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죽이려 했을까.

아니, 애초에 노린 것이 내가 맞을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쥰멵은 주위를 물린 뒤 겭스를 불러 제가 잠든 사이 있었던 일을 확인했다.

 

 

 

-뭐?

-희熹비의 지밀이 배후로 몰려 추포당했습니다. 현재 희喜비는 금족령이 내려진 상태이구요.

 

 

 

헌데 겭스의 답을 통해 재상의 간악한 수가 읽혔다. 쥰멵은 주먹을 꾹 쥐었다. 희喜비는 쥰멵을 제외하곤 유일한 비妃의 직책을 가진 이로 만약 밍섟이 후사를 봐야 한다면 반드시 찾을 이였다. 그의 아비는 이미 오래전부터 밍섟의 편에 서서 밍섟을 따랐고 희喜비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현명하고 성품이 온화해 태자의 어미가 되기에 적당한 이였다. 쥰멵 또한 내심 그 이의 태를 타고 태어난 이가 태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던 차였는데 이런 변고라니.

쥰멵은 이마를 짚었다.

 

 

 

-혹 진범에 대해서는 알아보았느냐.

-심증일 뿐이지만, 그날 윤 상궁의 거동이 수상했다 합니다.

-윤 상궁이?

 

 

 

예상한 일이긴 했으나 믿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그래도 나름 제 지밀로 7년을 함께 보낸 이가 아니던가.

쥰멵은 착잡한 얼굴을 했다. 설마 했던 윤 상궁이 재상의 사람이라는 걸 알아버린 것에 대한 배신감도 있었고 진범이 제 지밀 상궁인 탓에 희喜비를 구해줄 수 없다는 절망감도 있었다. 자칫하다간 쥰멵의 자작극으로 몰릴 위험이 있으니, 아마도 재상은 이 모든 것을 계산해 윤 상궁을 이용했으리라.

 

 

 

-마마.

-끔찍해.

 

 

 

정말 끔찍해. 결국에는 내 손으로 그를 뿌리치게 만들다니. 그의 손을 놓게 만들다니.

끔찍해.

끔찍해.

내가 너무,

나는 내가- 

 

 

 

 

 

 

 

 

 

희喜비는 결국 폐비가 되었다. 아직 해독이 완전히 되지 못한 쥰멵은 미령한 몸을 핑계로 떠나는 그 이의 뒷모습을 외면했다.

아직 무르익지 않은 단풍이 꼭 제 마음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멍하니 그 잎을 바라보던 쥰멵은 작게 들리는 문소리에 입을 열었다.

 

 

 

-겭스야.

-

-이번 단풍이 질 때까진 끝나지 않겠지?

-

-다음 단풍이 질 때는 끝날까?

 

 

 

나는 끝낼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마음도 이 길고 긴 싸움도.

나는 끝맺을 수 있을까. 

서글픈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후유증으로 숨을 쉴때마다 찢어질 듯 아픈 가슴께를 움켜쥔 쥰멵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희喜비를 잘 살펴. 그 자는 한번 목표한 사냥감을 놓치지 않으니, 기어코 그를 죽이려 할 거야.

비틀거리는 저를 부축하는 손길에 마음놓고 기댄 쥰멵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어렴풋이 코끝에 밍섟의 향이 나는 것만 같았다.

아아, 정말 중증이다.

꿈에서조차 그 향을 그리다니. 

 

 

 

 

 

 

 

 

 

-

 

 

 

 

 

 

 

 

 

-폐하. 제가,

-되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겭스가 안절부절 못하며 손을 뻗었지만 밍섟은 가볍게 그를 거절했다.

곤한 얼굴로 잠든 쥰멵의 얼굴은 밍섟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잠시 말없이 그 얼굴을 내려다보던 밍섟은 쥰멵을 번쩍 안아들어 침상에 눕혔다.

조금 복잡해졌다. 밍섟은 희喜비가 궁에서 쫓겨나는 것이 누군가의 간계로 인해 벌어진 일임을 알았다. 그게 과연 재상의 짓인지 쥰멵의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위중한 상태로 생사를 오간 쥰멵보다는 재상의 간계로 무게가 더 쏠리긴 했다.

하지만 쥰멵이 이 사건에서 완전히 결백하다고는 믿지 않았다. 어찌 됐든 희喜비가 폐하면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 중 하나이니까.

게다가 그의 휘하에 있는 윤 상궁이 한 달 전 은밀하게 재상을 만난 것을 이미 확인하였기에 밍섟은 의심의 눈초리를 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헌데 지금 이것은,

 

 

 

-폐하.

 

 

 

교묘한 연기일까. 숨기지 못한 진심일까. 

서글픈 색이 가득한 얼굴은 감히 단 한번도 보지 못한 슬픔을 담고 있었다. 밍섟은 그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든 이의 얼굴에서 속내를 읽을 수 있을 리 없건만, 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오랫동안 그 곁을 지켜야 했다. 

 

 

 

 

 

 

 

 

 

-

 

 

 

 

 

 

 

 

 

-마마께서 몸이 미령하신 듯 하여 보신하기 좋은 삼을 몇뿌리 가져왔으니 잘 달여 아침 저녁으로 드시면 좋을 겁니다.

-마음은 감사하나 관직을 가진 이가 주는 것은 그 무엇이든 받을 수 없습니다.

-나라의 녹을 먹는 이가 아닌 마마의 아비로서 온 것이니 너무 부담갖지 마십시오.

-어찌 부담을 갖지 않는단 말입니까. 그대는 이 나라의 재상이고 나는 이 나라의 후后인데. 제아무리 부자지간이라고는 하나 단순히 만나는 것만으로 눈총을 받는 것이 당연한 관계입니다. 허니 정말 제가 걱정되는 거라면, 더 이상 저를 찾아오지 마세요.

-마마.

-정녕 제가 걱정되신다면 짊어진 이름을 모두 내려놓고 오로지 제 아비로 이곳에 오세요.

-마마. 아무리 지금 후后의 자리에 올랐다 하나 주제를 잊어서는 아니되지요.

-재상.

-

-그대야말로 아무리 국구의 자리에 올랐다 하나 그게 누구 덕분인지, 잊어선 아니되지 않겠습니까. 

-네 놈이 감히,

-그러게 어찌 그러셨습니까. 그냥 두었다면 눈이든 귀든 꼭 막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저를, 어찌 깨우셨어요.

-나 없이 네 놈이 그 자리를 지킬 성 싶으냐.

-이 자리에 미련이 있었다면 당신의 손을 잡았겠지요. 아니면 하다 못해 폐하께 매달려 빌기라도 하였겠지요.

-내 너를 죽였어야 했다.

-예. 그러셔야 했습니다. 하다 못해 이번에라도, 죽이셨어야 해요.

-천한 씨는 어쩔 수 없다더니 너는 기어코 은혜를 잊고 은인의 목을 베는구나.

 

 

 

누가 은인이랍니까.

쥰멵은 그 차가운 골방에서 떨었던 것을 기억했다. 어린 저를 끌어안은 채 미안하다, 미안하다 속삭이던 그녀를 제외하고 제게 은인은 없었다. 갚아야 할 은혜도, 마음도 없었다.

쥰멵은 재상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수치로 얼굴이 달아오른 그는 인사도 없이 내실을 나갔다.

 

 

 

-마마.

-괜찮아.

 

 

 

뱀같은 이를 상대하기 위해 쥰멵은 스스로 독을 품어야 했다. 이는 살기 위해 품은 것이었으나, 그 독은 쥰멵까지 좀먹고 말았다.

 

 

 

-당분간 주시하거라. 분명히 얼마 가지 않아 또 무슨 수작을 부릴 것이다.

-폐하께 말씀드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더는 마마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일이 커지는 듯 합니다.

-이미 알고 계실 거다. 재상과 내 사이를 가늠하며 진짜 적인지 아군인지 판별하고 계시겠지.

-허면,

-그러니 조용히 있는 게 좋아. 폐하와 손잡는다 해도 나는 결국 버려지는 패. 버려야만 쓸 수 있는 패라면, 끝까지 내가 쥐고있다 내 스스로 버리는 것이 낫다.

-

-누군가에게 버려지는 건 이제 지긋지긋하니까. 

 

 

 

 

 

 

 

 

-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밍섟은 방향잃은 걸음을 돌려 궐 내 자리한 호수로 향하였다.

 

 

 

-게 누구냐.

-헉!

 

 

 

그런데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겁에 질린 얼굴로 일단 엎드리고 본 궁인이 벌벌 떨기 시작하자 그 가녀린 어깨를 발견한 밍섟이 매섭게 치떴던 눈꼬리를 내렸다.

 

 

 

-축시丑時가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 어찌 이곳에 있는 것이냐.

-소, 송구하옵니다, 저는 그저 호수가 너무 보고싶어서.

-호수?

-예, 예 그렇습니다. 바다만큼 넓고 깊은 호수라 들었습니다. 설룡이 오수에 들 정도로 크고 아름답다 하여 너무 궁금한 나머지...

 

 

 

겁에 질린 아이의 머리통을 가만 내려다보고 있으니 그 옛날 단수각에서 홀로 울던 아이가 떠올랐다.

단풍나무에 기대 앉아 엉엉 울던, 그 맑고 고운 아이의 눈가를 몇번이나 달래주고 싶었는지.

밍섟은 저도 모르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되었다. 마침 적적하던 참이니 말동무나 되어주렴.

 

 

 

이름도 묻지 못하고 보내야 했던 아이는 밍섟의 마음 속에 깊이 남아있었다. 얼굴을 반이나 가린 탓에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다. 눈앞의 아이와 꽤 비슷한 연배일텐데.

 

 

 

-우와아. 호수가 정말 커요!

 

 

 

잔뜩 신이 난 얼굴로 호수를 가리키는 아이를 보자 그 아이가 생각났다.

밍섟은 조금 풀어진 얼굴로 아이의 뒤를 쫓아 걸었다.

 

 

 

-어? 으앗!

-조심해야지.

-가, 감사합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호수를 구경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 애였다. 밍섟은 비틀거리는 아이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아 부축했다.

놀란 듯 뺨을 붉힌 아이가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 귀여웠다.

밍섟은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

 

 

 

 

 

 

 

 

 

 

-폐하께서 궁인 하나와 단둘이 밤산책을 하셨다 하여 궐이 떠들썩합니다.

-밤이라면 길이 어두웠을테니 등불 들 이가 필요했겠지.

-

-등불을 들지 않기라도 했어?

-...폐하께서 손수, 드셨다 합니다.

 

 

 

쥰멵은 잠시 말을 잃었다. 황제가 제 손으로 직접 등불을 들고 밤산책이라니, 그것만으로도 기함할 일이건만 함께한 궁인이 있었다 하니 더 말이 막혔다.

쥰멵은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 애쓰며 고개를 돌렸다.

 

 

 

-적적한 밤길에 좋은 말동무를 만나셨나 보구나.

-마마. 

-그 얘기는 더 꺼내지 말거라. 국정을 돌보느라 고단하신 폐하께서 잠시 즐거우셨다면,

-오늘은 그 이와 후원 산책을 하셨습니다.

-

-승은을 입은 것은 아니나 그와 다름이 없이 대하신다 합니다. 낮것상을 물리신 뒤 함께 다과를 받고 차를 마시기까지 했다 하여 궐 내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래?

-예, 마마. 하온데 송구하옵게도 그 아이. 분명 대감마님의 사촌되시는 김ㅁ은 대감의 집에서 의탁하던 아이입니다.

-뭐?

-우연히 확인한 얼굴이 낯익어 알아보았는데 확실합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김ㅁ은 대감의 집에서 심부름꾼 노릇을 하던 아이입니다. 종종 서신을 전해주러 갔다 마주한 적이 있어 얼굴을 기억합니다.

-

-마마. 혹 그 아이, 대감 마님께서...

-너는 모른 척 있거라.

-

-일단, 좀 더 알아봐. 어쩌다 그 아이가 궁에 들어온 것인지, 언제 들어왔는지. 일단은 좀 더 조사해보거라.

-예.

 

 

 

쥰멵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가를 가렸다. 갑작스레 나타나 밍섟의 곁에 선 것도 당황스러운데 그 이가 재상과 관련이 있는 자라니. 대체 무슨 속셈인 거지.

초조했다. 혹 달기나 양귀비같은 존재를 노린 것일까. 허나 밍섟은 은나라 주왕이나 당 현종과는 거리가 멀었다.

만약 후사를 보기 위해 노린 계책이라 해도 천한 궁인의 신분으로 수태한 아이가 태자에 책봉될 리도 없고, 만약 태자가 된다 해도 쥰멵의 아들로 입적되어 쥰멵이 키우게 될 것이다.

헌데 대체 왜?

무엇을 노리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쥰멵은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무엇을 노리는지 알지 못하니 모든 것이 두려웠다.

 

 

 

 

 

 

 

 

-

 

 

 

 

 

 

 

 

아이는 재상과 관련된 이가 확실했다. 아이의 얼굴을 직접 마주한 순간 아이를 만난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 이보다 더한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쥰멵은 확신을 얻었으면서도 감히 이것을 말할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에게 총애를 받기 시작한 궁인과 거리를 두라는 말을 하는 순간 쥰멵은 투기에 눈이 먼 황후가 되고 말 것이었다. 밍섟은 제 마음을 모른다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되려 제 자리가 위태로울까 경계하는 추악한 이의 모함이라 여길지 모른다.

대체 이걸 어찌하면 좋지?

아무리 증거를 들이밀어도 밍섟에겐 잘 꾸며진 거짓말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쥰멵은 저를 보던 밍섟의 눈빛을 기억했다. 독을 마신 뒤 제법 누그러진 듯 보였던 그 눈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매섭게 변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후사 문제 때문이었다.

쥰멵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쥰멵은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었고 낳을 수 있는 몸도 아니었다.

화인花人으로 태어나 사내의 몸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다 하였으나 그 또한 건강한 몸이여야 가능한 일이었다.

독에 면역을 갖기 위해 수백가지의 독을 직접 들이키고 삼켜 내성을 키운 쥰멵이 과연 정상적인 몸 상태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쥰멵은 회의적으로 생각했다.

아이를 키우기에 자신의 몸은 지나치게 척박했다. 메마른 땅에 내려앉은 씨앗은 아무리 애를 써도 싹을 틔우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런 쥰멵의 사정을 알 리 없는 이들은 어서 후사를 만들어야 한다고 재촉했고, 밍섟은 그런 쥰멵을 경계했다.

결국 아이의 출신은커녕 간단한 문안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며 시간을 흘려보낸 쥰멵은 억지로 맞게 된 두번째 합방일이 돼서야 겨우 밍섟을 다시 만날 기회를 잡았다.

합방일이라고는 하나 두 사람이 정말 교접을 할 리도 없고 사이가 정다운 것도 아니니 준비하는 과정은 그저 무심하기만 했다.

쥰멵은 옷 매무새를 단정히 고치는 궁인들의 손을 물린 후 자리에 앉았다. 합방은 매번 실패했고 하게 되리라는 기대따윈 한적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근히 고개를 드는 꽃망울을 숨길 수가 없었다. 결국 면경을 펴고 바로 앉은 쥰멵은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사랑이란 것은 주제를 몰라 감히 꽃을 피우고 감히 향을 보내 사람을 홀리려 들었다. 그러나 지독한 향은 사람을 뒷걸음질치게 만들었고 질색하여 도망가게 만들었다.

아직 꽃이 피기 전이라고 하나 쥰멵은 분명하게 알았다.

자신의 꽃은 가히 악취라 불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지독한 향을 풍길 거라는 걸.

아닌 척 해도 은근히 머금고 만 설렘이 방울로 맺혀 뚝뚝 떨어지는 게 거울로도 보였다.

쥰멵은 도망치듯 면경을 덮었다.

초야 아닌 초야.

쥰멵은 밍섟과 나눌 운우지정이 아닌, 밍섟과 보낼 밤의 노래를 기다렸다.

이름모를 벌레가 현을 켜고 들어본 듯한 새가 목청껏 우는 밤의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같은 것을 듣고 같은 것을 보며 보낼 그 의미없는 시간이 기대됐다.

 

 

 

-마마.

 

 

 

그런데.

 

 

 

-폐하께서 그, 그 아이와.. 

 

 

 

싹을 잘라내지 못한 댓가는 참혹했다.

쥰멵은 창백한 얼굴로 제게 달려온 겭스와 윤 상궁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아아.

문득 죽이고 싶어졌다.

아슬아슬하게 싹튼 이 모든 것을, 전부.

 

 

 

 

 

 

 

 

 

 

-

 

 

 

 

 

 

 

 

 

 

궁인들이 제각기 떠드는 것과 달리 밍섟은 그 아이에게 승은을 내리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 마주쳤던 단수각 그 아이처럼 느껴져 애틋하고 귀여워했을 뿐.

꼭 그 아이 때문이 아니더라도 합방은 어떻게든 피하려 했었다. 다만 잠든 아이를 미처 깨우지 못했고, 저 또한 아이가 피워놓은 향로의 향에 취해 곤히 잠들어버렸을 뿐.

미리 전하지 못한 것은 미안했으나 어차피 합방이 치뤄지지 않을 거라는 걸 쥰멵이라고 모를 리 없었으니 어느 정도는 예상했으리라 여겼다. 헌데,

 

 

 

-폐하를 뵙습니다.

 

 

 

묘하게 쥰멵의 태도가 싸늘해졌다.

원래도 그닥 정다운 사이는 아니었다고 하나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밍섟은 혼란스러웠다. 그렇다고 쥰멵에게 혹 마음이 상한 것이냐 묻기도 이상했다.

쥰멵이 마음 상했다 해도 그걸 내가 왜 신경쓰지? 후后와 사이좋았던 적이 언제 있다고? 아무리 혼자 생각하고 물어도 이렇다 할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밍섟은 쥰멵의 옆에 붙어섰다. 

 

 

 

-어디 가는 길이오?

-...후원 산책을 가는 중이었습니다.

-같이 가지.

-예?

 

 

 

예가 아님을 알면서도 쥰멵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저와는 눈 마주치는 것도 불편해하던 이가 갑자기 무슨 일로.

그러나 의아함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종식되었다.

아아. 그 아이.

기어코 첩지를 내리시려나.

아무리 마음에 드는 이가 있어도 결국 내명부의 일은 후后의 권한이라 쥰멵의 동의가 있어야만 후궁 첩지를 내리는 게 가능했다. 눈 마주치는 것도 싫어하던 후后와 함께 산책까지 하며 이를 말하려 하다니.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벌써 이렇게나 귀애하게 되신 건가.

가슴이 지끈거렸다.

쥰멵은 앞서 걷는 밍섟의 뒤를 따라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밍섟의 입을 타고 나올 말을 수십, 수백번씩 상상하고 각오하니 겨우 마음의 준비가 된 것 같았다.

 

 

 

-후后.

-예, 폐하. 마음 쓰실 일 없도록, 그 아이에겐 미인의 첩지를 내리겠습니다.

-뭐?

-미인美人으로... 혹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따로 생각해놓은 품계가 있으시다면,

-후后.

-예, 폐하.

-짐은 그 아이에게 첩지를 내릴 생각이 없소.

-...허나, 승은을 입은 궁인은 그 아이가 처음이니,

-그날은 아무 일도 없었소..! 단지 바꿔 피운 향로의 향이 좋아 오수에 들었을 뿐.

 

 

 

당황한 얼굴로 화급히 부정하는 밍섟을 보니 어쩐지 기분이 사르르 풀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절로 좋아진 기분에 입꼬리가 움찔거린 쥰멵은 이를 숨기고자 고개를 돌렸다.

 

 

 

-송구합니다. 제가 오해를 하였습니다.

-그날 가지 못한 것은 나 또한 미안하오. 정신없이 잠에 들어 눈을 뜨니 이미 아침이었소. 부러 그런 것은 아니나 미리 전갈을 보내지 못한 탓에 후后를 기다리게 한 것은 과인의 잘못이지.

 

 

 

후원을 걷는 걸음이 예상보다 더 가벼워졌다. 쥰멵은 부드럽게 풀어진 분위기를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서로를 알고 나서 처음 겪는 평화였다.

한편 밍섟 또한 이 기묘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제가 왜 심통난 새신부를 달래기 위해 쩔쩔매는 새신랑처럼 구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런 행동 자체가 싫지 않았다.

밍섟은 쥰멵과 발 맞춰 걸으며 꽃을 구경했다.

바쁜 정무 핑계로 제대로 돌아본 적 없는 화원은 제법 많은 꽃이 피어 알록달록했다. 

꽤 아름답네.

새삼스러웠다. 밍섟은 곁에서 걷는 준멵을 돌아보았다. 흐드러지게 핀 꽃 덕분인지 항상 딱딱하게만 보였던 쥰멵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려있었다.

 

 

 

-꽃을 좋아하나?

-...싫어하는 이가 있겠습니까.

 

 

 

문득 던진 질문은 충동이었다. 밍섟은 은근한 미소가 감도는 얼굴로 꽃을 돌아보는 쥰멵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화인花人이라더니 정말 그와 같았다.

아름답네.

불현듯 든 생각에 제 스스로 놀란 밍섟은 도망치듯 고개를 돌렸다.

그럼 뭐해.

애써 부정하는 마음과 달리 시선은 다시 쥰멵을 향했다.

 

 

 

 

 

 

 

 

 

-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점점 밍섟과 가까워졌다. 쥰멵은 때때로 나선 산책길에서 두 사람이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걸 발견하곤 도망치듯 발을 돌렸다.

아이가 재상의 사람이라는 걸 말해줘야 하는데, 말할 수가 없었다.

 

 

 

-마마.

 

 

 

그나마 밍섟이 아이에게 승은을 내리지 않아 다행이지.

쥰멵은 은근히 안도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밍섟이 온전한 황권을 손에 쥐기 위해선, 최대한 빨리 후사를 가지는 것 또한 필요했다.

그러나 그게 자신은 아니었다.

쥰멵은 씁쓸한 얼굴로 발끝을 내려다봤다.

쥰멵은 절대 밍섟의 아이를 가져서는 안되었다.

지금은 재상과 척을 지고 있다고 하나 결국 쥰멵은 재상의 아들이었고 그 가문의 사람이었다. 쥰멵이 회임이라도 한다면 그것은 밍섟이 아니라 재상에게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될 것이었다.

게다가 쥰멵에겐 유일한 겭스는 그 출신이 기구하고 복잡하여 혹 재상이 이를 밝히기라도 한다면 당장에 궁을 떠나야 하는 처지이기도 하니 쥰멵은 아닌 척 해도 재상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은 밍섟이 궁을 비운 사이 정사를 돌본다는 핑계로 왕의 장인이자 후后의 아비라는 이름이 필요했었기에 그가 쉽사리 쥰멵을 건드리지 못했다. 그나마 보내는 독약조차 쉽게 해독이 가능하거나 미량이 섞여, 사실 죽이기보단 쥰멵을 잠시 묶어두려는 의도가 더 강한 듯도 했었다.

하지만 밍섟이 돌아오면서 권력 구도가 크게 변하였고 재상이 원하는 쓰임, 즉 후사에 관한 것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재상은 본격적으로 쥰멵을 죽이려 하기 시작했다.

내온 차는 버린 지 일각도 되지 않아 난蘭을 모두 죽였고 기미를 한 쥐는 일식경도 가지 않아 거품을 물었다. 결국 쥰멵은 더 이상 수라를 들 수 없었다. 어디에 독이 들었을지 알 수 없으니 손을 대는 것도 꺼려졌고 기미를 위해 죄없는 생명을 이용하는 것도 마음이 불편해 들어오는 상을 몇번이고 그냥 물리고 말았다.

이는 솔직히 말하면 두려움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쥰멵의 행동이 기묘한 소문으로 번져갔다. 궁인들은 폐하의 성총이 다른 이에게 향하는 것에 상처입은 후后께서 식음을 전폐하고 마음을 끓이는 것이라 떠들었다.

터무니없는 소문이었지만 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꽤 그럴 듯한 이야기라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갔다.

쥰멵은 곤란했지만 나서서 이를 해명하는 것이 일을 더 크게 키울 것만 같아 어쩔 수 없이 침묵했다.

어찌 됐든 자신이 수라를 들지 않는다는 게 알려지면 애꿎은 음식을 버리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후后.

 

 

 

이런 것을 바란 건 아니었다. 

기별도 없이 저를 찾아온 밍섟에 놀란 쥰멵은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히 묻진 않았지만 여길 왜 왔는지 묻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예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도 더 자신을 반기지 않는 모습에 밍섟은 기분이 묘해졌다.

 

 

 

-수라를 들지 않는다지.

-송구합니다.

 

 

 

주변 궁인들을 모두 물린 뒤 묻자 그제야 밍섟이 찾아온 이유를 눈치챈 쥰멵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 표정을 눈치챈 밍섟은 쥰멵의 사정과는 다르게 그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어찌 됐든 그 밤, 쥰멵은 저를 위해 기미를 했고 중독 되었다.

독을 탄 것이 그의 휘하에 있는 윤 상궁으로 의심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쥰멵은 그 독을 먹고 이틀이나 의식을 찾지 못했고 윤 상궁 또한 쥰멵보다는 재상의 사람에 더 가까운 것이 정황상 드러나면서 밍섟은 혹 쥰멵이 음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수라를 물리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게다가 저 또한 그에게 독을 보낸 적이 있으니 사실 이것은 일종의 죄책감이기도 했다. 제 시선을 마주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쥰멵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던 밍섟은 밖에 서있을 진 내관을 불렀다. 기다렸다는 듯 열린 문 사이로는 세명의 궁인이 겨우 들 정도로 화려한 수라상이 등장했다.

쥰멵은 뜻밖의 것에 놀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온갖 산해진미가 올라온 상은 보기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갈 정도로 화려했다. 거기다 기미 상궁을 부른 밍섟이 쥰멵의 앞에서 모든 음식을 기미하도록 하니 궁인들이 다시 물러난 뒤에도 쉬이 수저를 들 수가 없었다.

쥰멵은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고민했다.

 

 

 

-망극하옵니다.

-딱히 그럴 것 없소. 짐은 그저 빚을 갚는 것 뿐이니. 

 

 

 

수저를 드는 손이 덜덜 떨려왔다. 쥰멵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하얀 쌀밥을 입안 가득 밀어넣었다. 벌어진 입술 새로 사랑이 튀어나올까 봐, 당장이라도 제 마음을 토해내 버릴까 봐 겁이 났다.

얼결에 함께 하게 된 식사는 혼인을 한 뒤 무려 7년 만에 갖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자리가 쥰멵에게 쉬울 리 없었다. 쥰멵은 고개 한번 들지 못한 채 밥과 찬들을 우겨넣었다. 예법 같은 걸 생각할 겨를따윈 없었다. 체를 한다고 해도, 너무 많이 먹어 탈이 난다고 해도.

쥰멵은 입안 가득 든 것을 필사적으로 씹었다.

절대로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이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밍섟에게는 실失이었다. 쥰멵과 밍섟의 사이가 돈독해 보일수록, 두 사람이 어렴풋한 다정을 보일수록. 모순적이게도 그것은 재상에게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되었다.

쥰멵은 이 서글픈 괴리의 구조를 잘 알았다.

이는 곧 저의 애정이 그의 발목을 잡는 덫이라는 거니까.

바라보지 않으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고 그리지 않으려 했으나 또한 그러지 못했다. 이미 주인이 바뀐 마음은 제가 아무리 화를 내고 당겨도 말을 듣지 않았으니.

쥰멵은 그저 그가 스쳐 지나가길, 웅크리고 있는 자신을 그저 무심히 지나쳐가길 기도했다.

양분도 없이 핀 꽃은 이름조차 가지지 못했으니, 지나치는 길에 혹여 그것을 보더라 궁금해하지 말길.

짓밟아도 좋으니 부디 꺾어 쥐지 말길.

쥰멵은 타게 바랐다.

동정이든 증오든, 그 어떤 것이든.

제가 받아서는 안되는 것들이었다. 

 

 

 

 

 

 

 

 

 

-

 

 

 

 

 

 

 

 

 

본래도 건강한 몸은 아니었지만 근래 들어서는 정말 이상했다. 문득문득 뱃속 어딘가에서 불씨가 번진 것처럼 뜨겁고 속이 뒤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또다시 찌를 듯한 고통이 느껴지는 배에 잠시 그대로 몸을 굳힌 쥰멵은 그 모습을 겭스에게 들켜 호되게 혼이 났다.

 

 

 

-그때 중독되신 일 때문에 폐하께서 직접 신경써 살피라 명하셨으니 섣불리 탕약에 농간을 부릴 리는 없잖습니까. 진맥을 받아보시라 그리 말씀드렸거늘, 이리 버티시다 탈이 나는 법입니다.

 

 

 

걱정이 담긴 말이라는 걸 알아서 듣기 싫지 않았다. 쥰멵은 태의를 불러 진맥을 받겠다 약속하며 겨우 겭스의 화를 풀었다.

밍섟의 말 덕분인지 태의는 지체없이 달려와 쥰멵을 살폈다. 신중하게 맥을 짚는 태의의 얼굴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으나 사실 태의의 입에서 나올 말은 대강 예상이 갔다. 쥰멵은 흥미없는 얼굴로 그를 지켜봤다.

갖은 종류의 독에 내성을 기르면서 속이 많이 망가졌다. 게다가 이번의 독은 제가 겪어본 적 없는 독이었으니 약해진 속이 견디지 못하고 탈이 난 것일 테다. 겨우 정신을 차린 뒤에도 식사를 제때 챙기지 못했으니 때때로 찾아오는 고통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쥰멵은 맥을 확인한 뒤 뒤로 물러나는 태의에게 탕약이나 주라고 말할 요량이었다.

 

 

 

-마마, 혹 중독되셨던 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갑작스런 질문만 아니었다면.

쥰멵은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겭스를 돌아봤다. 겭스 또한 태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얼굴이었다.

 

 

 

-듣지 못하였네. 그게 뭔가 문제가 된 것인가?

-그 독은 사화목死花木이라 불리는 나무의 뿌리를 달여 만든 것이옵니다. 일견 벚나무와 비슷한 모양이라 흔히들 벚나무로 착각하기도 하는데, 사화목死花木은 딱 한가지, 벚나무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사화목死花木은 오직 화인花人에게만 독이 됩니다.

-뭐?

-화인花人이 아닌 자들에겐 그저 나무뿌리에 지나지 않지만 화인花人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극독이지요.

-

-원래라면 화인花人이 품은 꽃을 시들게 만든다 하여 사화死花라 불리는 것인데 마마께는 그것이 조금 다른 반응을 일으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상이라니. 이를테면?

-갑작스레 만화기滿花期가 오실 겁니다.

-뭐?

 

 

 

쥰멵은 놀란 눈을 했다.

만화기滿花期라니. 그것은 화인花人이 꽃망울을 터트리는 시기를 말했다.

사내의 몸으로도 교접을 하면 회임이 가능한, 오로지 화인花人만이 가지는 축복. 

하지만 그것은, 쥰멵에겐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쥰멵은 굳은 얼굴을 애써 감추며 겭스를 돌아봤다.

갖가지 독에 내성을 기르기 위해 스스로 마시고, 먹으면서 쥰멵은 더 이상 만화기滿花期가 오지 않았다.

처음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조금 슬프고 서럽기도 했지만 금방 적응하여 되려 잘된 일이라 여기기도 했다. 어차피 두 사람이 동침을 할 리도 없을 뿐더러 만에 하나의 확률로 동침을 한다 하여도 절대 아이를 가져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다행히 밍섟이 없는 동안은 아무도 저의 만화기滿花期를 신경쓰지 않아서 이를 숨기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밍섟이 돌아오고, 의례적인 합방을 가지게 되면서 재상이 이를 눈치채고 말았다. 제 가문의 사람이 황자를 낳아야 외척이 될 수 있고 여차하면 밍섟을 제거하고 그를 옹립하여 황제로 세울 수 있으니, 쥰멵이 아이를 낳는 것은 그의 계획에서 반드시 성사되어야 하는 일 중 하나였다.

그런데 쥰멵이 더 이상 만화기滿花期가 오지 않는 폐 화인花人이 되다니. 재상은 그때부터 쥰멵을 제거하기 위해 애썼다.

폐 화인花人이 되었다는 것이 들통나면 반역에 준하는 죄인이 되어 궐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 테니 그 전에 쥰멵을 제거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일전에 경고의 목적으로 보냈던 독에 중독되어 열병을 앓았던 쥰멵은 그 일을 계기로 이미 온갖 독에 내성을 가진 상태였고 거기다 기미까지 철저하게 하는 덕에 독으로 그를 죽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재상은 그 아이를 보내 밍섟의 마음을 얻고자 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쥰멵에게 사화목死花木이라는 특이한 독을 먹인 것일 테다. 누군가의 악의로 폐 화인花人이 되면 그것은 죄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 될 테니까.

그런데 그것이 갑작스런 만화기滿花期를 불러 온다니. 이미 폐閉한 화인花人의 개화開花를 일으킨다니.

이것은 결코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재앙에 가까웠다.

쥰멵은 일단 태의의 입을 단단히 막았다. 어차피 밍섟이 돌아온 뒤 직접 등용한 이라서 재상에게 이야기가 흘러들어갈 가능성은 많지 않았다. 예상대로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일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겠다 장담했다. 하지만 만화기滿花期에 대비한 약을 달라는 말에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쥰멵은 의아한 얼굴로 저를 보는 태의를 못 본 체 하며 탕약을 줄 것을 종용했다. 다행히 눈치가 빠른 그는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

 

 

 

 

 

 

 

 

 

톡, 톡-

일정한 박자로 탁상을 두드리는 손가락에 절로 긴장감이 들었다. 태의는 마른 침을 삼키며 황제의 어심을 헤아리기 위해 애썼다.

 

 

 

-만화기滿花期에 대비한 탕약을 지어 달라 하였다고?

-예, 폐하. 그러하옵니다. 

 

 

 

어째서?

밍섟은 질문을 하는 대신 찻잔을 들었다. 기묘한 일이었다. 쥰멵의 입장에선 용종을 잉태하는 것이 가히 필수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다. 쥰멵이 재상의 편이든, 아니면 그에 맞서는 편이든 상관없이 무조건.

헌데 어째서 만화기滿花期가 오는 것을 피하려 할까.

황손을 낳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밍섟은 곰곰이 생각했지만 이렇다 할 이유를 찾기는 어려웠다.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물끄러미 한참이나 내려다 보던 밍섟은 일단 그의 말대로 탕약을 지으라 이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 됐든 제가 손해볼 일은 아니었다.

 

 

 

 

 

 

 

 

 

 

-라고, 생각한 게 불과 얼마 전이다.

밍섟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속에서 들끓는 것을 참아내려 애썼다.

혹시 몰라 사람을 붙이긴 했지만 태의가 처방한 약을 꼬박꼬박 달여먹는다는 얘기만 들려와 한동안 잊고 있었다. 몰아치는 정무에 바빴으니 딱히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이렇게 눈부신 향의 주인임을 알았더라면, 어렴풋이 느꼈던 그 향이 쥰멵이 가진 향의 전부가 아님을 알았더라면 이리 방만하게 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밍섟은 격통이 느껴지는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달이 내린 새벽녘에 올라온 간단한 다과상이 문제가 되었다. 기미를 마쳤으리라 여겨 별다른 경계없이 차와 다과를 즐긴 밍섟은 몰려오는 수마를 피할 요량으로 밤산책에 나섰다.

늦은 밤에 나선 산책이기에 수행인들은 모두 물렸고 홀로 단수각丹秀脚 앞에 위치한 단풍나무를 바라보던 차였다. 갑자기 숨이 막히고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밍섟은 처음에 이것이 독인 줄 알았다.

그런데 독이라기엔 증상이 이상했다. 피를 토하지도 않았고 시야가 흐려지지도 않았다.

밍섟은 열이 오르는 몸을 느끼곤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미약이었다. 

온갖 독에 내성을 가졌건만 겨우 미약 따위에 시야가 아찔해진 꼴이 우스웠다. 밍섟은 서둘러 걸음을 돌렸다.

어린 시절부터 제 모든 것을 탐내는 이들 사이에서 자랐다. 이 약을 탄 자가 얻고자 하는 결과가 무엇인지 모를 리 없었다.

감히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그들이 원하는대로 해주진 않으리.

밍섟은 바쁘게 주변을 돌아봤다. 단수각丹秀脚은 근래 들어 밍섟이 가장 자주 찾는 곳이었다.

어린 시절 우연히 마주쳤던 어린 궁인 아이가 생각나 걸음하던 것이 늘어나 못해도 주에 한번은 단수각丹秀脚과 그 뒤 호수로 산책을 나갔다.

그러니 제게 이 약을 먹인 자는 분명 단수각丹秀脚 뒷편 호수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 자가 절대 찾지 않을 곳이 어디일까.

인적이 가장 드문 곳은?

바쁘게 머릿속 지도를 들여다보며 마땅한 곳을 찾아 걸음을 옮기던 밍섟은 문득 떠오른 최적의 장소에 저도 모르게 머뭇거렸다. 

그곳이라면, 지금쯤 오가는 사람 하나 없이 고요할 것이다. 게다가 그 아무도 설마 밍섟이 거기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하겠지.

밍섟은 애꿎은 입술을 잘근거리다 발을 뗐다.

 

 

 

 

 

 

 

 

후后의 궁.

그곳이라면 그 어느 누구도 밍섟을 찾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

 

 

 

 

 

 

 

 

 

밍섟은 무작정 그곳으로 향했다.

사실 약에 취해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 어려웠지만 쥰멵이 만화기滿花期에 대비한 탕약을 꾸준히 마시고 있다는 것만은 기억이 나서 걸음을 옮기는데 망설임이 없어졌다.

하지만 미약에 취해 엉망인 꼴을 하고 궁인들 앞에서 후后의 궁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일.

밍섟은 후后의 궁 뒷편에 있는 후원에 몸을 숨길 생각이었다. 이 어둑한 밤에 후원에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니 그곳에서 약기운이 가실 때까지 버티면 되리라, 그리 생각했다.

그러나 후원에 도착한 밍섟이 발을 들이기 무섭게 조금씩 조금씩 옅은 향이 나기 시작했다.

밍섟은 그것이 후원에 자리한 꽃의 향인 줄 알았다. 지난 번 얼핏 맡았던 쥰멵의 향과는 다른 느낌이라 제가 잘 모르는 꽃의 향이라고만 여긴 것이다.

그런데 그 향이 발끝을 타고 올라와 머릿속을 온통 잠식했다.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가빠와서 제대로 호흡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밍섟은 더듬거리는 손으로 옆에 선 나무를 짚었다.

대체 왜 이렇게 향이 심하지?

분명 오늘도 쥰멵이 약을 먹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게다가 코앞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실에 몸을 뉘였을 쥰멵의 향이 어째서- 

 

 

 

 

 

 

 

 

망할.

 

 

밍섟은 정통으로 맞닥뜨린 쥰멵에 우뚝 멈춰섰다. 저만큼이나 놀란 눈을 한 쥰멵이 뒤로 물러서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혹 쥰멵이 간계를 부린 건 아닌가 생각한 게 민망할 정도의 반응이었다.

어떡하지.

밍섟은 초조한 얼굴로 머뭇거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쥰멵 또한 갑작스런 상황에 몸을 피한 것으로 보였다. 작은 움직임에도 물씬 풍겨오는 아찔한 향을 보니 갑작스레 찾아온 만화기滿花期 때문인 것 같은데, 그런 사람에게 자리를 피해달라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이 곳은 후后의 궁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와서 다른 장소를 찾아 몸을 피하려니 저 또한 사정이 좋지 않았다. 갑작스런 마주침에 놀라 잊고 있었지만 그에게서 풍겨오는 향은 숨을 쉬는 것조차 기갈을 느끼게 할 정도로 저를 뒤흔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당장 그에게 달려들지 않고 서있는 것이 기적일 정도로.

덜덜 떨리는 손을 힘주어 쥔 밍섟은 자리를 뜨지도, 그에게 다가가지도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차라리 이대로 정신을 잃고 싶었다.

그러나 자칫해서 정신이 아닌 이성을 잃을까봐, 그로 인해 눈앞의 여린 이를 짓밟기라도 할까봐 두려워서 감히 자신을 놓을 수가 없었다. 밍섟은 땀에 젖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모르는 사이 온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폐하?

 

 

 

저를 향하는 시선에 향이 묻어난다. 조심스레 부르는 목소리에도, 달빛이 내려앉은 그의 어깨 위에도. 

 

 

 

-물러서시오, 후后.

 

 

 

밍섟은 손을 들어 쥰멵에게 경고했다.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에 그제야 밍섟의 상태를 알아차린 쥰멵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사람 모두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눈치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몇번을 물어도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밍섟은 애써 주의를 돌리기 위해 허리께에 흐드러지게 핀 꽃을 노려봤다.

 

 

 

-후后는, 어찌 이곳,에 나왔지.

 

 

 

다른 것에 집중하면 약기운이 조금이라도 가실까 하는 마음에 이를 악문 채 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밍섟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쥰멵은 무언가 들킨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곡을 찔린 것마냥 커다랗게 뜨인 눈에 저도 모르게 고개가 갸웃거렸다. 밍섟은 다시 한번 쥰멵을 불렀다.

후后.

재촉하려 부른 것은 아니었는데 다급하게 시선을 피한 쥰멵은 송구하다는 말로 대답을 피했다.

평소라면 그 수상한 낌새를 놓치지 않고 캐물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평소가 아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약기운이 가시지 않는 것으로 볼 때, 이 미약은 분명 필지정必至情이었다.

밍섟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허리춤에 감춰두었던 장도를 꺼냈다. 필지정必至情은 반드시 토정吐情을 해야만 해독이 되는 미약이었다.

어떻게든 밍섟의 아이를 가질 생각으로 이 미약을 먹인 것이겠지만 그들의 뜻대로 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밍섟은 꺼내든 장도를 높이 들었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도록 허벅지를 찌를 심산이었다. 고통이 찾아오면 약기운 또한 어느 정도 사그라들 테니, 지금의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안 돼!!

 

 

 

그런데 달빛을 받아 번쩍 빛이 난 장도가 제 허벅지 위로 내리꽂히기 전에 날아갔다.

밍섟은 제게 달려들어 저를 넘어트린 쥰멵을 멍하니 바라봤다.

방심한 사이 온몸으로 쏟아진 향에 힘이 절로 빠졌다. 

제게 닿은 그를 안을 수도 밀어낼 수도 없어 품에 안긴 그의 등 위로 손을 올렸다 떼었다를 반복하자 쥰멵이 힘주어 밍섟을 끌어안았다.

 

 

 

-그냥, 그냥...

-

-오늘은 달이 어두우니까요.

-후后.

-옥체를 상하게 하시느니 차라리 저와...

-후后, 이건. 

-구름이 달을 가린 밤입니다. 달빛이 없으니 눈앞의 저는 얼굴 없는 자요, 이름 없는 꽃이지요.

-

-꺾는다 하여 원망하지 않으니 망설임없이 꺾으십시오. 꺾인다 하여도 탓할 이 없고 꺾였다 하여도 미워할 이 없습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마치 아이를 달래듯 다감했고 침착했다. 하지만-

 

 

 

-...!

 

 

 

저를 끌어안은 그의 온몸이 떨리는 것을 어찌 모를 수 있을까.

밍섟은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낯선 감정이 무엇인지 몰라 당황했다.

동정이라기엔 깊었고 애정이라기엔 가벼웠다.

차오르는 감정이 무엇인지도 정의 내리지 못한 채 쥰멵을 끌어안은 밍섟은 움찔거리며 피하려는 쥰멵의 등을 조심스레 토닥였다.

 

 

 

-얼굴이 없다면 그릴 것이요, 이름이 없다면 지어야지.

-폐하.

-짐은 그대가 아니고 그대와는 너무 다른 곳만 바라보며 걸어왔어. 하여 그대가 어찌 그렇게 서글픈 말로 스스로를 노류장화路柳牆花처럼 말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

-그러지 마.

-

-함부로 꺾어도 되는 것처럼, 꺾여도 어쩔 수 없는 것처럼. 그리 굴지 마.

-폐하.

-제발.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든 걸 아는 것처럼 구는 것이 신기했다. 미웠고, 고마웠다. 쥰멵은 밍섟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어디든 어느 때든 그대가 뿌리 내리고 피어나는 것은 그대의 마음이야. 화인花人이라 불린다 하여 꽃이라 할 수 없고 혹 꽃이라 한들, 어찌 꺾이기만 하겠는가. 누군가를 기쁘게 하지 않아도 꽃은 피고 누군가를 슬프게 하지 않아도 꽃은 지는 법이니. 꺾이는 것이 그대의 숙명인 것처럼 여길 필요는 없어.

 

 

 

작게 늘어놓은 위로가 두 사람 사이에 어울릴 만한 것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오늘쯤은 뭐 어떠랴 싶었다.

달빛에 젖은 몸이, 향에 물든 마음이 어떻게든 제 품 속의 이를 위로하고 싶어 안달을 내는 것을.

밍섟은 굳이 말리고 싶지 않아 쥰멵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빈틈없이 맞닿은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이 제 것인지, 쥰멵의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 다정한 위로를 온몸에 꽁꽁 싸매게 된 쥰멵은 붉게 타오른 뺨을 감추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쉬이 꺾으라 말했지만, 어쩔 수 없이 꺾이는 것처럼 굴었지만 내심 그에게 안길 것을 기대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다정하게 저를 달래는 목소리가 돌아올 줄은 몰랐다.

좋았지만, 기뻤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그래도 서글픈 마음에.

답지 않게 용기를 낸 쥰멵은 용이 수놓아진 옷의 어깨 부근을 꾹 쥐어 당겼다.

 

 

 

-허면, 제가 싫지 않다 하면요?

-...음?

-제가 싫지 않다고 하면, 그러면... 

 

 

 

차마 끝맺지 못한 말 대신 시선이 닿았다. 쥰멵은 달빛을 등진 제 얼굴을 그가 읽을 수 있을까 궁금했다.

뜻 모를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할지, 제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두려움과 기대가 점철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밍섟의 눈에 담겼던 흐린 달이 크게 일렁였다.

꿀꺽, 넘어가는 마른 침 소리가 누구에게서 난 것인지 몰랐다.

조금씩 조금씩 부딪히는 코끝의 시작도, 끝내 닿아 벌어진 입술도.

진득한 소리를 내며 미끄러진 혀가 서로를 간질이자 절로 마음이 조급해졌다.

서로에게 매달린 두 사람은 숨조차 아쉬워하며 서로를 당겼다. 

손가락 끝에 걸리는 옷고름을 당겨 풀어내니 달빛을 머금은 속살이 드러났다.

밍섟은 용포를 벗어 바닥에 깔았다.

팔을 벌리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달겨드는 향도, 온기도 모두 아찔했다.

어찌 그대를 쉬이 안을 수 있지.

이리도 찬란하고 이리도 선연한 그대를 어떻게 꺾어낸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어.

밍섟은 제 품에서 만화滿花하는 쥰멵을 느끼며 그의 향이 느껴지는 모든 곳에 입을 맞추었다.

아아, 우습게도 이름없이 날뛰던 감정이 제 이름을 찾기 무섭게 이름이 불린 강아지처럼 귀를 늘어트렸다.

 

 

 

 

 

 

 

 

 

 

후后, 나는 그대가 애틋한 듯해.

아니. 애틋해.

이유 모를 그대의 떨림이 섭섭하고 어설프게 짐작하는 그대의 두려움이 안타까워.

이것을 함부로 애심愛心이라 칭할 수는 없겠지만 심心이라 칭할 순 있겠지.

그게 무엇이건, 그대에게 품은 마음 한자락은 될테니. 

 

 

들끓는 마음만치 뜨거운 손이 쥰멵의 얼굴을 쓸었다. 애틋하다 이름짓던 마음과 꼭 같은 손길이었다.

쥰멵은 그 손이 가진 온기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뺨을 기댔다.

달빛이 눈을 감았다는 핑계로 겨우 손에 넣은 온기였다. 놓칠 수 없었고 놓쳐서도 안 되었다. 감히 다시는 욕심낼 수 없는 것이리니.

쥰멵은 마음대로 그 손에 입을 맞추고 이를 세워 잘근거리며 희롱했다.

제 것인양 구는 꼴에도 다정히 뺨을 끌어 입을 맞춰주는 것이 좋았다.

탐스러운 꽃잎 사이를 가르고 들어선 밍섟에게 기다렸다는 듯 향을 퍼붓자 제 향에 흠뻑 젖은 밍섟은 고개를 숙여 입술과 턱, 목에 무분별한 입술 도장을 찍어댔다. 쥰멵은 위태롭게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눈을 감지 않으려 애썼다.

어떻게든 담고 싶었다.

어떻게든 기억하고 싶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온기를, 그의 다정을.

쉬이 흘려보내고 싶진 않았다.

쥰멵은 밍섟의 어깨 너머로 한쪽 눈을 가린 달을 보며 빌었다. 

 

 

 

 

 

 

 

 

 

 

부디 오늘은 눈을 감아주시길.

구름 사이로 비친 나의 욕심을 몰라주시길.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스스로 내다버려야 할 것이었다.

그러니 부디 나의 은애를, 나의 애정을.

가엾게라도 여겨 안아주시길.

모른 척 지나쳐주시길.

쥰멵은 바라고 또 바랐다. 

 

 

 

 

 

 

 

 

 

 

-

 

 

 

 

 

 

 

 

 

 

 

-황제의 정을 받지 못했다고?

-대, 대감마님.

-황제를 만난지 벌써 석달이 되었는데 여직 동침 한번 하지 못한 네가 가엾어 힘써준 내 수고를, 네가 이리 무시하는구나.

-대감마님! 제 말 좀 들어주십시오. 폐하께서 단수각丹秀脚에 오지 않으셨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 그래서 저는 일이 그르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입니다!

-멍청하게 호숫가에서 기다리기만 했으니 당연히 일을 그르치지. 길목에서 마주해 함께 할 생각은 못 했더냐? 그 사소한 것조차 알려줘야 할 정도로 덜 떨어진 것이야?!

-송구합니다. 송구합니다, 대감마님. 제가 너무 멍청하여, 제가 부족하여...

-너처럼 모자란 이를 어찌 쓰겠다고. 쯧쯔,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잘못했습니다. 다음에는 꼭,

-다음은 없다.

-예?

-황제가 자시는 수라에 약을 타는 것이 그리 쉬운 줄 아느냐? 이번에야 내 갖은 수를 써 미약을 넣었다지만 두번째도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다.

-대감마님.

-허니 네가 직접 하거라.

-예?

-황제를 유혹해. 어심을 얻어 그의 정을 받거라. 어찌 됐든 지금 가장 총애받고 있는 것은 네가 맞으니, 하다 못해 첩지라도 받을 수 있게 계책을 내보거라.

-제가 어찌...

-네 쓸모를 보여야 내가 너를 살려둘 생각이 들지 않겠느냐.

 

 

 

차가운 말만큼 묵직한 발이 영의 머리통을 짓밟았다. 영은 바닥에 이마를 박은 채 숨을 죽였다.

 

 

 

-후后가 되고 싶다, 네 입으로 말했지. 그때의 발칙함을 아직 갖고 있다면 해보거라. 황제의 눈길이 아직 네게 닿아있으니 제법 맹랑히 굴어도 좋을 것이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돌아서 가는 재상의 발소리가 멀어진 뒤에야 겨우 고개를 든 영은 서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맹랑하게...

 

 

 

 

 

 

 

 

 

 

 

-

 

 

 

 

 

 

 

 

 

 

화인花人은 만화기滿花期에 정교를 나누면 반드시 회임을 한다. 그러나 만화기滿花期에 대비한 약을 복용하면 아무리 깊은 운우지정을 나눈다 하여도 회임할 확률이 거의 없다.

밍섟은 이미 알고있는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몇번을 되짚어보며 고민했다.

태의에게 탕약을 주라 명한 것도 자신이었고 쥰멵이 탕약을 제대로 복용했는지 확인한 것도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기분이 묘했다.

쥰멵이 회임을 했으면 싶기도 했고 그가 회임을 하지 않았으면 싶기도 했다.

밍섟은 복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마른 세수를 했다.

일전에 가졌던 합방일에 재상을 잡고 싶다 말하던 쥰멵의 말을 좀 제대로 들어볼 걸 그랬다.

얄팍한 수로 제 눈을 가리는 거라 치부하지 말 걸. 좀 더 귀를 기울일 걸.

뒤늦은 후회에 목이 탔다.

그 밤, 그날의 쥰멵을 온몸으로 느낀 뒤에야 아쉬워진 제가 너무 어리석어 보였다.

군주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어찌 그리 빳빳하게 굴었을까.

저를 보는 올곧은 눈에 아차하는 순간 흠뻑 젖어버릴까봐 지레 날을 세웠나.

밍섟은 몇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며 방안을 거닐다가 진 내관을 불렀다.

 

 

 

-후后에게 가겠다. 채비를 하거라.

-...예.

 

 

 

입안의 혀처럼 구는 진 내관조차 곧바로 대답하지 못할 정도로 뜻밖의 행보였다.

지난 밤 일어난 일을 모르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인데, 밍섟은 어쩐지 기분이 상했다.

평소보다 빠른 걸음에 뒤쫓아오는 궁인들의 걸음이 허겁지겁 엉망으로 흐트러진 걸 알았지만 괜히 돋은 심술을 굳이 감추고 싶지 않아 부러 모른 척한 밍섟은 기별을 받고 미리 나와있던 쥰멵을 보고서야 걸음을 늦췄다.

억지로 정해진 합방일이 아니면 걸음한 적 없는 궁에 갑작스레 찾아온 탓인지 쥰멵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려있었다.

밍섟은 궁인들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하도록 멀찍이 물린 뒤 함께 후원으로 향했다.

그 밤에 대체 무슨 사술이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달빛이 내리지 않아 짙어진 그늘 아래에서 내보인 쥰멵의 얼굴은 더없이 솔직하고 더없이 눈부셨다.

밍섟은 그날 보여준 얼굴이 쥰멵의 진짜 얼굴일 것이라 믿었다.

저를 보는 눈에 담겼던 열기, 숨기지 못했던 처연함.

어쩌면 그도 이 구중궁궐에서 자신의 손을 잡아줄 사람을 애타게 찾고있는지도 몰랐다.

밍섟은 의뭉스레 굴던 쥰멵의 행동을 돌아보며 그의 손이 자신을 향해 뻗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후后, 지난 밤엔.

-폐하.

 

 

 

섣부르긴 했지만 서투르진 않았기에.

저를 끌어안고 제게 입을 맞추던 그의 눈빛 또한 저처럼 애틋함을 담고 있었다 믿었다.

애심愛心이라 할 순 없지만 마음 한자락 정도는 되는.

 

 

 

-지난 밤은 달이 가려 너무 어두운 밤이었지요.

-

-저는 구름이 달을 덮어 더듬거리는 밤을 보냈습니다. 폐하께서도 그리 하셨겠지요.

-...후后.

-넘어졌다 해도 어둠 속이니,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게 다행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것이라 기대하진 않았다. 밍섟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쥰멵을 바라봤다.

제 눈을 똑바로 마주보지도 못하면서, 쥰멵은 필사적으로 지난 밤을 없던 일로 치부하기 위해 애썼다.

밍섟은 가슴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후后에게 지난 밤은 넘어지고 무릎이 깨지는 고난의 밤이었나 보군.

-

-유감이야. 짐에게 지난 밤은 넘어진 몸을 일으키고 손잡아주던, 따스한 밤이었는데.

-폐하.

-고난이었다면 굳이 기억하지 않는 게 좋겠지.

-폐하.

-잊어버려.

-

-짐도 잊어버릴 테니. 

 

 

 

밍섟은 찬바람이 일 정도로 세차게 몸을 돌렸다. 쥰멵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멍하니 그 찬바람을 맞았다.

다치지 않으려고, 기대하지 않으려고.

지난 밤에 많은 의미를 두지 말라거나, 그 밤의 일로 용종을 품을 것이라 기대 말라는 일갈을 들을 것이라 예상했다.

당연한 일이고 저 또한 같은 생각이라 여겼지만 그래도 제가 사랑하는 이의 얼굴로 듣고싶은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그저 먼저 얘기를 꺼낸 것 뿐이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덜 아프고 싶은 욕심에 내세운 방패였는데.

저를 밀어내리라 여겼던 손이 저를 끌어안기 위해 뻗어진 손이었음을 몰랐다.

쥰멵은 망연한 마음으로 멀어진 밍섟을 바라봤다.

그 밤은 제게도 고난의 밤이 아니었다.

밍섟만큼, 아니 밍섟보다 더.

그 밤은 쥰멵이 가진 전부였다. 

 

 

 

 

 

 

 

 

 

-

 

 

 

 

 

 

 

 

 

더 나빠질 사이도 없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고개 숙인 저를 본 척도 하지 않은 채 지나치는 밍섟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쥰멵은 소매 아래 숨긴 손을 꾹 쥐었다.

어차피 마주칠 일이 많지 않으니 괜찮을 거라 여겼다.

섣부른 저의 실수로 망가진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고.

그 밤은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되는 하룻밤의 꿈이었고 저에게조차 잊혀져야만 하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애써 합리화를 했다.

그 밤을 재상이 알지 못해 다행이라고, 우리가 돈독해질 일이 없을 테니 잘 됐다고.

하지만 그런 말이 진짜 위로가 될 리 없었다.

처음 며칠이야 애써 늘어놓은 핑계로  스스로를 달랬지만 그게 보름을 넘어가고 달포를 넘어가자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쥰멵은 입맛까지 떨어져 올라온 수라를 모두 물리고 말린 사과를 끓인 차만 연달아 비웠다.

벌써 며칠째 수라를 제대로 들지 않자 이를 지켜보던 견스가 걱정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음식 냄새만 맡아도 속이 뒤집어지는 탓에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정금나무의 열매에는 손이 가는 것에 커다란 그릇 가득 열매를 담아온 견스는 이거라도 맞는 것이 다행이라며 은근슬쩍 다른 과일들을 함께 내왔다. 쥰멵은 그런 견스의 행동이 귀여워 억지로라도 과일을 먹으려 애썼지만 능금이나 배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풀내가 역해 한조각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릇을 슬쩍 밀어내며 견스의 눈치를 살피자 미간을 찌푸린 견스가 혹 몸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냐며 걱정했다.

 

 

 

-딱히 어디가 아픈 건 아닌데.

-입맛이 없으시다 하기엔 종종 헛구역질도 하시잖습니까. 혹 지난번 중독되었던 게 문제가 된 건 아니겠지요?

 

 

 

중독이라.

쥰멵은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만화기滿花期가 왔던 그 밤을 떠올렸다.

해독을 위해 먹었던 탕약과 만화기滿花期에 대비한 탕약은 서로 상성이 맞지 않아, 못해도 한시진의 여유를 두고 먹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날은 갑작스레 열기가 치솟아 어쩔 수 없이 약을 조금 빨리 먹었다. 당장의 열기는 가라앉았지만 약효가 가신 새벽이 오기 무섭게 다시 열이 올라 얼마나 놀랐는지.

쥰멵은 가만 그날을 헤아려보다,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그 새벽에 탕약을 내오라 말할 수도 없고 혹 궁인들을 불렀다 만화기滿花期가 온 것이 알려지기라도 할까 저어되어 직접 내실을 나섰던 쥰멵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숨겨두었던 약초를 생으로 씹어먹었다.

탕약을 달이기 힘들 때 급처방으로 먹는 약초인지라 쓰고 떫었지만 만화기滿花期가 왔다는 게 알려지는 것보단 나았다. 그런데 겨우 약초를 모두 삼켰을 때, 뒤에서 기척이 들렸다.

쥰멵은 혹 금군이 제 소리를 들은 건가 싶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자꾸만 고개를 드는 향을 숨기기 위해 숨을 멈추고 온몸의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채 였으나, 등을 돌리기 무섭게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 옷자락을 밟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폐하?

 

 

 

절대 여기서, 이 시간에 볼 거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이의 등장에 얼마나 놀랐는지.

저만큼이나 놀란 얼굴을 한 밍섟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덜컹거리며 걸음을 멈춰섰고 쥰멵은 딱딱하게 굳은 밍섟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가 평소의 상태가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굳이 따져 묻지 않아도 재상의 간계로 벌어진 일임에 틀림이 없어 입안이 썼지만 아직 꽃향이 풍기는 몸으로 내실에 돌아갈 순 없어 자리를 피하지도 못하고 밍섟의 눈치를 살폈다.

만약 그때 약효가 더 빨리 돌았다면, 제 향이 조금만 더 빨리 갈무리가 됐다면. 그 밤은 아무것도 아닌 밤으로 지나갔을 테지.

닿았던 시선, 느꼈던 숨결 모두를 기억하는 쥰멵은 그 서글픈 우연의 밤이 서러워 울상을 지었다.

섣부른 제 오해로 싸늘해진 밍섟을 마주할 때마다 어찌나 심장이 내려앉던지. 어쩌면 입맛이 없어진 게 그때부터였는지도 몰랐다.

음식 냄새를 맡기만 해도 역한 느낌이 들고 심지어는 물을 마실 때조차 비린내가 느껴져 헛구역질을 하는 것이,

 

...어? 

 

쥰멵은 파리하게 질린 안색으로 손가락을 접었다. 그럴 리 없어, 라고 부정하면서도 얼추 들어맞는 날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분명히 보였다.

하지만 어떻게?

만화기滿花期에 대비한 탕약을 먹었고 약초를 삼켰다.

심지어 그 밤이 지난 뒤에도 다시 한번 탕약을 들이켜 혹시 모를 싹을 완전히 잘라냈다고 그리 확신했거늘.

쥰멵은 저도 모르게 입가를 가렸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쥰멵이 근래 들어 보이는 증상은 태기를 가진 자들이 흔히 보이는 증상이었다. 계산한 날짜도 얼추 회임 증상과 들어맞고.

독에 면역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면서 읽었던 수많은 의학 서적을 떠올린 쥰멵은 망연한 얼굴로 제 배를 더듬거렸다.

 

 

 

-마마, 어찌 그러십니까?

-...견스야.

-예.

 

 

 

내가 여기서 누구를 믿을 수 있지?

쥰멵은 걱정스레 제 얼굴을 살피는 견스의 얼굴을 바라봤다.

당장 이 궁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견스 하나뿐이었다. 7여년동안 자신의 곁을 지켰던 윤 상궁마저 재상의 명을 받아 희喜비를 몰아내지 않았던가.

제 앞에 엎드려 빌며 용서를 빌던 윤 상궁은 그저 저에 대한 지극한 충심으로 벌인 일이라 변명했지만 쥰멵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 추악한 방식이 저를 위한 길이었다는 게 끔찍했다.

쥰멵은 다시 저를 부르는 견스에게 눈짓하곤

주변을 물렸다.

 

 

 

-궁 밖에서 진맥을 받아야 해.

-예?

-궁의가 아닌 의원을 만나야 한다.

 

 

 

심상찮은 쥰멵의 표정 덕인지, 내용 덕인지. 잠시 말이 없던 견스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조심스레 몸을 낮춰 앉았다.

어디가 아픈 것이냐 묻는 목소리가 저에 대한 걱정으로 잔뜩 구겨져 있었다.

쥰멵은 저를 향한 마음이 애틋하고 고마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알아봐야 할 것이 있어. 은밀히 내 진맥을 살필 이가 필요하다.

-...마마 허면, 굳이 궐 밖을 나가지 않아도 진맥을 볼 수는 있습니다.

-어찌?

-동문 바로 앞에 자리한 혜惠민民서署로 가면 됩니다. 신입 의관들이 있는

곳이라 마마의 옥안을 알 리 없고, 평복을 입고 진맥을 받으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것입니다.

-허면 그리로 가야겠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갈 수 있도록 채비를 해다오.

-예.

 

 

 

견스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쥰멵은 그런 견스에게 아무 설명도 하지 못하는 것이 미안해 말을 삼켰다.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적당한 날이 잡혔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대청소를 하고 이불 갈이를 하는 날이었다.

저마다의 일로 바쁜 궁인들 틈으로 바람을 쐬고 오겠다며 자리를 피한 쥰멵은 견스가 준비한 평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동문으로 향했다. 앓는 소리를 내며 차례를 기다리는 이들 사이에 섞여 숨을 죽이자 차례가 금방 돌아왔다. 쥰멵은 놀란 눈으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원래라면 며칠을 기다려도 진맥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밍섟이 집권한 뒤 인원을 대폭 늘리면서 점심쯤 줄을 선 쥰멵도 진맥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쥰멵은 안도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피곤한 기색이 묻어나는 얼굴을 한 의관은 얼굴 한번 돌아보지 않고 어디가 아프냐 물었다.

 

 

 

-며칠째 체기가 가시지 않고 음식에서 비린내가 올라옵니다. 심할 땐 헛구역질도 하고 물을 마시는 것도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흠, 손목 이리 주시오.

 

 

 

맥을 짚으려는 의관의 거리낌없는 손길에 잠시 움찔한 쥰멵은 애써 덤덤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열의없는 얼굴로 맥을 짚던 의원은 쥰멵의 얼굴을 흘깃 돌아보고는 붓을 들어 처방전을 썼다.

 

 

 

-화인花人이시오?

-...예.

-맥이 두개 잡히는 걸 보니 회임인 듯 한데 혹 단연환斷緣丸이 필요하거든 지금 말씀하시오.

-지금 무슨...!

-...환丸은 언제까지 먹어야 효험을 볼 수 있습니까?

 

 

 

회임, 거기다 단연환斷緣丸이라니.

견스는 순식간에 쏟아진 이야기에 정신없이 눈을 굴리다가 왈칵 인상을 구겼다.

단연환斷緣丸이라 함은 복중 태기를 끊어내는 약이었다. 그런데 그런 약이 필요하냐 묻다니, 회임을 했다는 말을 꺼내놓기 무섭게 이어질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견스의 팔을 붙잡아 만류한 쥰멵은 담담히 질문을 던졌다.

견스는 예상했다는 듯 의연한 쥰멵의 태도에 놀라 입을 꾹 다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지.

감히 묻지 못한 견스가 궁에 다다를 때까지 차마 입을 열지 못하자 다시 후后의 복색으로 옷을 갈아입은 쥰멵이 견스를 돌아봤다.

 

 

 

-묻고싶은 게 있느냐.

-어찌 되신 겁니까?

-그리 되었다. 해독을 위해 먹던 약이 만화기滿花期가 오게 만든 모양이야.

-...허면 뱃 속 아이는 혹,

-견스야.

-

-화인花人은 아이를 가질 수 있어. 사내의 몸이든 여인의 몸이든 상관없이, 아이를 품고 낳을 수 있는 그런 존재야.

-마마.

-무엇이든 꽃 피울 수 있으니 축복받은 존재라 할 수도 있겠지만 원치 않아도 싹을 품고 틔워내니, 저주라고도 할 수 있겠지. 하여 화인花人의 회임은 거진 반갑지 않은 소식이라 여겨지기도 한단다.

-마마...!

-내게도 이 아이는 반가운 소식이라 할 수 없겠지. 축복받을 수도 없을 것이고 기뻐할 수도 없는 탄생일 것이야.

-

-헌데...

 

 

 

 

 

 

 

 

헌데 낳고 싶어.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견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런 쥰멵을 바라봤다.

떨어지는 눈물만큼 욕심이 번진 쥰멵은 흠뻑 젖은 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허둥댔다.

그날, 그 밤.

유일하게 남은 흔적이자 마음이었다.

가지고 싶었고 지키고 싶었다.

아니, 지켜야만 했다.

쥰멵은 아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배를 끌어안은 채 울었다.

손에 쥐어지는 것 하나 없이 그저 허공을 휘저으며 가늠하던 추억이었다.

혹여 지독한 꿈은 아니었을지, 쉬이 내어주어 이미 잊혀져버린 과거는 아니었을지 혼자 고민하고 걱정하며 더듬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이는, 제 뱃속의 이 온기는 그 밤이 꿈이 아니었다고 말해주었다.

잊지 않아도 된다고. 묻어두고 아무것도 아닌 밤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지나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니 쥰멵은 감히 아이를 놓을 수 없었다.

아이는 그 밤이었고, 그 시간이었고, 그 마음이었다.

아무것도 쥔 것 없이 놓기만 해야 했던 쥰멵의 손을 잡아준 유일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쥰멵은 더더욱 그 온기를 놓지 못했다.

먼저 제 손을 잡아준 것을 뿌리치는 방법을 쥰멵은 배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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