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한번만! 응?"
제 팔을 부여잡고 매달리는 강우에 경수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태어나자마자 이웃사촌이 되어 29년을 소꿉친구로 지내면서 받았던 수많은 부탁들 중 가장 골치아픈 부탁이었다. 경수는 없던 두통이 생길 것 같은 느낌에 절로 이마를 짚었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가 누군지 모르니까 가서 나인 척만 해주면 된다니까?"
"걔는 너 좋아했다며. 네가 뭘 좋아하는지, 네가 어떤 성격인지 다 알텐데 내가 가서 어떻게 너인 척을 해. 너랑 내가 얼마나 다른데."
"괜찮아. 어차피 걔 나랑은 2년 좀 안 되게 같이 지낸 게 다야. 너네 집 사업 때문에 독일 갔을 때. 딱 그 때 너네 집 들어왔던 게 걔였거든."
"강우야."
"내가 진짜 양심이 찔려서 그래."
"양심이 찔리면 네가 가서 말해. 네 첫사랑 알파 때문에 착한 척 하느라 잘해준 거라고. 이용한 거에 네가 날 좋아할 줄은 몰랐다고."
"야, 그걸 어떻게 말을 하냐? 그래도 걔는 내가 첫사랑인데."
"이러는 거 자체가 더 나쁜 짓이야."
이 나쁜 놈아.
비난을 가득 담아 타박하자 울상을 지은 강우가 경수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야아, 나도 나 나쁜 거 알거든. 그냥 좀, 동심을 지켜주고 싶은 그런 거지. 솔직히 내가 걔 이용한 거 걔가 알아서 좋을 게 뭐 있냐. 어차피 난 영 앤 리치 앤 핸섬 앤 빅! 알파 만나서 결혼하는 게 소원인데 걔는 솔직히...."
"야."
"베타란 말이야. 베타 만나서 뭐해, 내가. 어차피 걔 만나서 내가 뭐 걔랑 잘 해볼 것도 아닌데. 그냥 나가서 나 이렇게 지낸다! 너랑 만날 일 이제 없다! 딱 해주면 깔끔하잖아."
"안된다고 했다."
팔을 잡은 손을 단호하게 뿌리치자 허공에 뜬 손을 휘저은 강우가 다급하게 경수를 불렀다.
"앙글앙글!"
"...뭐?"
"너가 좋다고 했던 앙글앙글 악보. 그거 쓴 사람 궁금하다고 했지?"
"...설마."
"걔가 쓴 거야."
"...."
"걔가 써서 나 줬던 거야. 이별 선물이라고 하면서."
그거 쓴 사람, 보고 싶지 않아?
경수는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망설였다. 은근한 강우의 목소리보다, 간절한 부탁보다 더 흔들렸다. 달디단 그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지는 그 음들을 만든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그랬다. 아무렇게나 방치되었던 그 예쁜 악보가 너무 안타까워서 직접 그 악보를 한 장 한 장 코팅까지 했었다. 제발 잘 좀 보관하라는 제 잔소리에 듣기 싫다는 듯 대놓고 인상을 찌푸린 강우가 악보를 대강 던지는 것에 결국 제가 서재 한켠에 고이 꽂아넣기까지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그 악보를, 그 예쁜 음들을 만들어낸 그를 만날 기회라니. 망설여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자 순간적인 흔들림을 눈치챈 강우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경수에게 매달렸다.
"한번이잖아. 너는 그 곡 만든 애 얼굴 한번 보고, 나는 만나고 싶지 않은 애 안 만나고. 걔는 첫사랑 환상 안 깨고! 응? 얼마나 좋아, 일석이조도 아니고 무려 일석삼조다!"
"강우야."
"한번만!"
경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망했다.
악보의 주인이라는 말에 경수는 이미 넘어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
"강우?"
"...아."
"한강우 맞아?"
저를 보며 웃는 얼굴에 절로 몸이 굳었다. 경수는 뻣뻣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를 보며 환하게 웃어보이는 남자는 강우의 이야기와는 전혀 달랐다.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흐릿한 인상에 볼품없이 작은 체구를 가졌다던 남자에 대해 설명하던 강우는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아 한참이나 끙끙거리다 결국 사진을 찾아야만 했다. 경수는 사진 속 얼굴을 보며 어린 시절 집을 보러 왔던 작은 꼬마를 겨우 기억해냈다. 그쪽이나 이쪽이나 낯을 가린 탓에 서로를 본 체 만 체 지나치며 금방 잊어버렸던 기억 속, 어린 꼬마.
이렇게, 이런 모습으로, 이런 마음으로 마주할 줄은 몰랐는데.
경수는 어색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응. 잘 지냈어? 백현아."
-
오늘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만날 일이 없도록, 깔끔하게.
경수는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강우가 신신당부하기도 했고 스스로도 누군가를 속이면서 만나고 싶진 않았다. 더더군다나 그 곡을 만든 아이라면, 더더욱. 경수는 자꾸 땀이 배어나오는 손바닥을 바지춤에 문질렀다.
"나 너 보고싶었는데. 정말."
하지만 이렇게 달콤한 말을 쏟아내는 이를 앞에 두고 있으면 그런 다짐이 휘발되고 만다. 경수는 입술을 뻐끔거리다 한박자 늦게 미소를 지었다.
"...나도, 너 보고싶었어."
"내가 편지 보냈었는데. 혹시 봤어?"
아니.
경수는 쓰레기통에 버려졌던 설익은 손편지를 떠올렸다. 봉투에 그려진 어설픈 그림이 마음 쓰여 강우에게 쥐어주었다가 재차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만 보았다.
"...응. 봤어."
멍청하게 그걸 다시 주워온 자신은 결국 편지의 주인이 아니었기에 봉투 한번 뜯지 못하고 고스란히 편지를 보관했다.
"예쁘더라."
내가 뭘 하는 건가 싶어 버리려다가도 그 편지를 쓴 사람이 곡을 만든 이라기에 버리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댔다.
"답장, 기다렸는데."
"...미안해."
나는 답장을 쓸 수가 없었어.
나는 편지의 주인이 아니라서, 네가 쓴 모든 고백의 주인공이 아니라서.
"너 미국 가고, 얼마 안 되서 나도 독일 갔거든. 좀 급하게 가게 돼서 네 주소를 잃어버렸어."
"아아, 어쩐지. 네가 편지 받았으면 답장을 안 했을 리가 없는데."
턱을 괸 채 미소를 짓는 얼굴이 지나치게 매력적이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상당한 미형의 얼굴이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에 짐짓 당황한 경수가 어색한 얼굴로 눈을 굴렸다. 강우가 보여줬던 사진 속 인물과는 너무 달랐다. 백현은 누가봐도 근사한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인상이 흐리다 혹평하던 강우의 목소리를 떠올린 경수는 이게 어딜 봐서 흐린 인상이야, 하고 소리없는 투정을 늘어놓았다.
"혹시 일은? 회사 다녀?"
"아. 아니. 아직 공부중이야. 사실, 얼마 전까지 독일에 있었거든. 다시 돌아가야 돼."
"...독일로? 한국에 있는 거 아니었어?"
"잠깐 들어온 거야. 때마침 너도 미국에서 온다길래 만나면 좋을 것 같았어."
"아... 그랬구나."
때마침 제게 던지는 질문에 미리 준비했던 이야기를 이때다 싶어 꺼내자 백현의 얼굴이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경수는 그를 속인다는 죄책감에 연신 그의 눈치를 살피며 바지를 구겼다. 단정하게 다려진 바지가 엉망으로 구겨졌지만 평소와 달리 그것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이렇게 겨우 만났는데. 다시 가는구나...."
"여, 연락 하면 되지."
"답장 보내줄거야?"
간절한 백현의 표정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당연히 그럴 거라고,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섣부른 제 거짓에 답장을 기다릴 백현의 모습이 절로 눈에 그려졌다. 몇번이고, 답 없는 메세지를 보내며 핸드폰을 확인할-
"답장 안 하려나 보네?"
"할게. 할거야."
장난스레 짓는 울상에 다급하게 대답하자 기다렸다는 듯 손을 내민다.
그럼 약속.
"어?"
"새끼 손가락 걸고, 약속."
왜 그렇게 찬란한 걸까.
네가 그 곡을 쓴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너의 화려한 외양 때문일까.
경수는 버릇처럼 제 손을 허벅지에 대충 문지른 뒤 내밀었다. 얽히는 새끼 손가락, 맞닿는 온기. 연결된 거라곤 고작 손가락 하나인데 왜 모든 것을 훤히 내보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장난스레 손을 흔드는 백현 덕에 아이처럼 함께 손을 흔들면서도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강우야. 내가 너한테 선물했던 곡 기억나?"
"곡?"
설마. 경수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종종 들리던 레스토랑은 평소와 약간 달랐다. 그저 장식품처럼 진열되어 있던 피아노가 홀의 한가운데서 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에 그저 위치를 바꾼 건가, 하고 단순히 넘어갔던 경수였다.
"짐정리하다가 발견했는데 아까워서, 조금 고쳐봤거든."
자리에서 일어서는 백현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경수는 제가 그토록 좋아하던 곡을 직접 들을 수 있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피아노를 향해 걸어가는 백현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리던 경수는 피아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백현이 저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하자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에게 집중했다.
약속을 하겠답시고 맞닿았던 손이 얼마나 예쁘고 아름다웠는지 기억했다. 곧고 가늘게 뻗은 손가락은 보는 것만으로도 유려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 손으로 지금, 그 곡을 연주한다. 쏟아지는 음들을 들으며 무의식중에 제 가슴께를 움켜쥔 경수는 눈부실 정도로 찬란한 백현의 모습을 그리듯 눈에 담았다.
갑작스런 연주에 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백현을 바라보는데도 그의 시선은 온전히 경수에게만 쏟아지고 있었다. 너만을 위한 연주라는 듯이, 너만을 위한 마음이란 듯이.
경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감히 제 것일 수 없는, 제 것이어서는 안 되는.
백현이 쏟아내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낼 수가 없는 스스로를 너무 늦게 깨달았다. 순간의 욕심을 참지 못하고 이 자리에 나온 나는 뭘 기대한 걸까.
여기서 뭘 하겠다고, 너를 봐서 무슨 얘길 한다고.
지독한 환멸이 밀려들었다. 차라리 만나지 말 걸. 기억 속에서만 그리고 말 걸. 내가 아닌 나를 보며 웃는 너의 얼굴이, 목소리가, 그 곡이 커다란 문이 되어 제 앞을 가로막았다. 저는 아무리 두드리고 불러도 열리지 않을 커다란 문.
"...."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며 웃는 백현을 보며 경수는 겨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처음부터 잘못 엉킨 실은 잘라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이미 되돌릴 수 없을만큼 스스로 망쳐버렸다. 강우의 제안을 거절했다면 차라리 친구로라도 지내보자 할 수 있었을 것을, 순간의 욕심에 눈이 멀었던 자신은 하룻밤의 꿈을 위해 제 마음을 팔았다. 서글프게도. 어리석게도.
-
헤어짐의 시간은 빨랐다. 차라리 시간이 빨리 갔으면 할때는 눈을 깜빡이는 시간조차 의식될 정도로 느리게 흐르더니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무섭게 시간은 물처럼 쏟아졌다.
조금만 더 같이 있을 수는 없을까.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백현의 뒤를 따라 걸으며 경수는 생각했다. 레스토랑을 나서면 당연한 수순처럼 각자의 차에 오를 것이다. 오지 않을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지고, 다시는 마주치지 않겠지.
문을 열고 먼저 걸음을 옮긴 백현이 열린 문을 잡은 채 경수가 나오길 기다리자 잠시 머뭇거리던 경수는 무거운 걸음을 한걸음 내딛으며 스포트라이트 밖으로 나섰다.
"어느쪽으로 가?"
"아, 나 차 가져왔어."
"그러니까."
"응?"
"더 같이 있으려고, 너랑. 핑계댈 겸 차 안 가져왔거든."
작게 벌어진 입이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한 채 굳었다. 저를 보며 웃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박자 늦게 얼굴을 붉힌 경수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눈을 굴렸다. 숨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저를 향하는 그 선명한 호감을 알았다. 백현은 구태여 제 감정을 감춰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되려 오늘의 만남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만약 경수가 강우였다면, 백현이 보이는 호감에 망설임없이 제 마음을 표현했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고. 나도 널 좋아한다고.
하지만 경수는 강우가 아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백현이 그리고 고대해온 그의 첫사랑이 될 순 없었다. 경수는 끌어올린 입꼬리에 힘을 주며 부러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떡하지. 나 들를 데가 있어서."
"...이 시간에?"
"어?"
"애인이야?"
좀 전까지 짓고있던 미소는 거짓이었다는 듯 백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변했다. 그제야 누군가를 만나기엔 제법 늦은 시간이라는 깨달은 경수가 한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애인, 이구나."
"...."
"애인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러고보니 안 물어봤었네. 어떤 사람이야?"
저를 보는 얼굴에 어렴풋한 상처가 보였다. 경수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강우의 애인을 떠올렸다. 요새 강우가 만나는 알파는 얼마전 주말극에서 주연을 맡아 상당한 인지도를 쌓은 배우였다. 갈색 머리에,
"눈꼬리가 조금 올라갔고 입술은 도톰해. 조금 날카로운 인상인데 체격이 있어서-"
"좋아해?"
"...응."
"좋겠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백현의 목소리가 괜히 더 크게 들렸다. 경수는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로 양 손을 붙잡았다. 눈을 내리깐 채 잠시 미소를 지어보이던 백현이 불시에 고개를 들더니 조심스런 얼굴을 해보였다.
"그래도 태워다주면 안 돼?"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감히 거절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경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되는데. 자정이 되어도 왕자가 사랑에 빠졌던 아름다운 미소를 그대로 간직했던 신데렐라와는 달랐다. 경수는 요정의 손길에 모습을 바꿨던 호박마차였다. 자정이 지나면, 마차였다는 걸 알아볼 수도 없게 땅바닥을 나뒹굴다 깨지고 말.
제 스스로의 처지를 알면서도 조금씩 새어나오는 욕심은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경수는 웃음기 어린 얼굴을 숨기지 않은 채 좋다, 라고 중얼거리는 백현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실은 나도 좋다고, 말하고 싶었다.
-
백현의 집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망설였던 것이 무색하게, 분침이 숫자 세개를 순서대로 톡톡 두드리자 그의 집 앞에 차가 멈춰섰다. 예민한 성정 탓에 혼자 지내는데도 불구하고 독채를 골라 샀다는 백현은 차가 집 앞에 멈추고도 안전벨트만 만지작거리며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경수는 제 얼굴을 살피는 백현의 기색을 느끼며 이제 진짜 두 사람의 만남을 정리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먼저 말할까? 하지만 좀 더 이대로 있고 싶은데. 차 안을 감도는 어색한 침묵을 조금만 더 모른 척하면, 그럼 좀 더 같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못된 욕심이 또 새어나왔다. 애꿎은 핸들만 문지르며 치미는 욕심을 삼켜내던 경수가 저를 부르는백현의 목소리를 밀어내듯 잘랐다.
"늦었다. 들어가."
"강우야."
"...."
"독일가도 연락하자던 거 빈말 아니야. 나 진짜 진심이니까 꼭 받아줘. 응?"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는 어쩜, 이렇게나 다정하고 빛이 날까. 왜 자꾸 욕심이 나게 할까. 차라리 강우 모르게 연락이라도 하고 지낼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의 목소리였다. 부드러운 핸들 그립 위에 맞춤처럼 올려진 제 손가락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경수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백현이 알고있는 번호는 강우의 번호이고 그마저도 오늘의 만남이 끝나면 사라질 것이었다. 제 대답에 겨우 안심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백현이 그렇게 소중히 기억할만한 그런 번호는 아닌데.
필사적일 정도로 눈 앞의 핸들에 집중한 경수는 손에 쥔 핸들을 손톱 끝으로 꾹꾹 눌러가며 괴롭혔다.
"...그럼 나 갈게, 강우야."
"응."
돌아서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백현을 붙잡고 자초지종을 털어놔 용서를 구하고 제 마음을 말해버릴 것만 같아서. 그런데 그럼 백현이 다시는 자신을 봐주지 않을 것 같아서. 경수는 온 힘을 다해 백현의 마지막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강우야."
그런데.
"나 사실 걱정 많이 했어. 아무리 첫사랑이라도 너 하나 만나겠다고 한국까지 오는 미친 짓을 해도 되나."
어떻게 너는,
"근데 오늘 너보고 너무 좋았어."
"...."
"후회 안 해. 아니 못 해. 오늘의 너는 지금까지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야."
굳게 닫았다고 생각했던 문을 그렇게 쉽게 넘어버릴까.
경수는 멍하니 열린 차 문 너머로 보이는 백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경수의 얼굴을 보기 위해 슬쩍 허리를 숙이고 있던 백현이 건반을 두드리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고마워. 오늘의 강우야."
잘 가. 라는 인사가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마치 지금 눈 앞의 경수가 강우가 아니라는 걸 안다는 듯, 과거의 강우와 지금의 경수를 구분하는 말에 가슴이 벅차왔다. 물론 백현의 말이 두 사람을 구분짓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 말을 듣는 경수의 입장에서는 달랐다.
오늘의 강우.
오늘의 너.
지금까지의 내가, 오늘까지의 내가.
가장 좋아할 사람.
마치 경수를 좋아하게 됐다는 고백을 듣는 것만 같았다. 경수는 핸들에 머리를 묻었다. 이마에 눌린 클락션이 울리는 바람에 허둥지둥 다시 고개를 들긴 했지만 소란스러워진 마음을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네가 좋아.
백현아.
나는 네가 너무 좋아.
감히 주체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마음이 흘러넘친다. 겨우 밀어넣었던 욕심이 틈 사이로 콸콸 쏟아지고, 당장이라도 네게 달려가려는 스스로의 발을 멈출 수 없었다.
아니, 멈추지 않았다.
경수는 달렸다. 제가 감당할 수 없을만큼 뛰던 심장과 같은 속력으로. 그보다 빠르게.
"백현아!"
체념을 위한 만남이라 여겼다. 오늘의 만남은 얼굴도 모르는 너를 좋아했던 나에 대한 보답이라고. 강우의 말대로라면, 꽤나 보잘 것 없고 초라한 너를 보고 마음을 정리할 좋은 기회가 되리라 여겼다. 그러나 오늘 마주한 너는 너무 근사했고 단념되리라 믿었던 마음은 보다 깊고 짙어졌다. 조금은 가볍다고 여겼던 자신의 감정이 백현을 마주하는 순간 끝을 모르고 자라나버린 것이다. 경수는 저를 돌아보며 놀란 눈을 하는 백현에게 온 힘을 다해 안겼다. 얼결에 저를 마주안은 백현이 놀란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저를 불렀지만 꼭 잡은 손을 풀지 않은 채 고개를 파묻은 경수는 아무것도 듣고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 보내지마."
"강우야."
"같이 있어줘. 제발."
오늘의 나는 너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자정은 지났지만 아직 달빛이 비추지 않으니까. 아직 깜깜한 밤이니까. 허술한 핑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경수는 저를 끌어안는 백현의 어깨에 뺨을 부볐다. 금이 간 호박은 밤의 그늘 아래서 조금 더 호박마차 행세를 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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